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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평화 속의 작은 빌런들_(1)

[6~12개월] 다른 사람들은 뭐 하고 있었을까?

by 하이히니

다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쉽게 말해 또라이는 어디에나 일정량 존재한다는 것인데, 나는 이 법칙이 회사 간은 물론 회사 안에서도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입사 이래 최단기간, 최대 빌런으로 등극한 민경 언니의 퇴사 후, 우리 팀에는 한 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그 시기에 체대 출신의 인턴이 입사했는데, 팀장님은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그 덕에 팀 분위기는 정말 최고였다. 팀장님은 워낙 노래방, 술과 회식을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그 인턴은 팀장님의 니즈를 모두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솔직히, 인턴도 나름대로 맘고생을 많이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쨌든 표면적인 팀 분위기는 최고였다. 팀장님 기분이 최고면, 팀 분위기도 좋았다.


하지만 곧, 이 평화 속에 숨죽이고 있던 작은 악마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팀 구성원 대부분은 민경 언니가 활개를 치고 있을 때, 그 극악무도함을 외면하고 몸 사리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좋은 구성원일 리 없었다.


일단, 팀의 수장인 팀장님. 영화배우 황정민님을 닮은 인상에, 엄청난 술톤을 자랑하는 분이었다. 성격은, 좋게 말하면 털털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초다혈질이었다.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엄청 좋아해서, 해외 출장 갔을 때도 나에게 행사장을 맡겨두고 혼자 놀러 나갔던 적이 있었다. 근데, 하필 팀장님이 놀러 나가고 1시간쯤 뒤에 현지 외교관이 행사장을 방문한 것이다.

"고생 많으십니다. 팀장님은 어디 계세요? 행사장에 계실 것 같아서 왔는데?"

"아, 안녕하세요...지금 잠깐 자리 비우신 것 같은데...아까까진 계셨는데..."

"네, 기다리겠습니다."


외교관은 행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난 즉시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지금 어디세요?"

"응, 지금 시내야. 여기 좋다!"

"팀장님, 큰일 났어요. 지금 외교관님이 행사장에 와서 팀장님 찾으세요."

"뭐? 그래서 뭐라고 했어? 설마 놀러 갔다고 했어?"

"아니요. 자리 잠시 비우셨다고 했는데, 지금 오실 수 있어요?"

"오실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야지. 지금 당장 출발할 테니까, 조금만 시간 더 끌어줘. 10분?"


그때부터, 나도 행사에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팀장님은 언제 올 것이며, 팀장님이 놀러 간 것을 외교관이 눈치채면 어떻게 될 것인지 초조해졌다. 15분쯤 시간이 지나자, 외교관은 다시 나에게 질문했다.

"주임님, 근데 팀장님이 어디 가신 건지...?"

"아...그게 어제부터 속이 안 좋아서...아까 화장실 가신다고 가셨...는데...좀..."


현지 일정 대부분을 외교관님 통해서 조율했기 때문에 더 그럴듯한 변명을 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화장실에 갔다고 하자, 민망했는지 더 이상 추가 질문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뻘쭘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빠르게 '딱딱딱딱딱딱' 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이었다. 휴. 드디어 한시름 놓은 건가? 는... 대실패로 돌아갔다.

"헉헉...헉헉...헉...저 찾으셨다고..헉헉....허허...헉..."


팀장님은 뛰어와서 그런지, 숨을 헐떡대고 있었고, 심지어 한 손에는 거대한 조명까지 들고 있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얼굴이 탔는지 볼도 새빨갛게 달아 올라 평소보다 훨씬 더 술톤이 짙었다. 누가 봐도 관광지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겨서,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봐도 이상한데, 외교관이 봤을 때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100% 눈치를 챈 듯했으나,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혼내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예...팀장님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헉...헉...그나저나, 무슨 일로...?"


두 분은 자리를 옮겨서 한참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마친 뒤 팀장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눈치 못 챈 것 같지?"

"네?"

"내가 밖에 나갔다가 온 거 모르는 것 같지? 뭐라고 하지도 않고...안 그래?"

"음...다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팀장님 얼굴도 많이 탔어요. 아까 숨도 너무 헐떡 거리시던데...그리고 이 조명은 뭐예요?"

"아, 이거 거리에서 산 건데, 느낌 있지? 행사장 밖에 두고 올까 하다가 훔쳐갈까 봐..."

"팀장님, 제가 봤을 때 100% 눈치챘는데, 그냥 모르는 척하시는 거예요."

"진짜? 하...좀 그렇네...아...근데 뭐 어때~ 근데 조명 어때?"


팀장님은 조명을 고른 스스로의 안목에 감탄하며 한 동안 내게 조명 자랑을 했다. 나였다면, 행사장을 비우지도 않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을 때 너무 신경 쓰여서 한 동안 우울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만큼 그는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은 화통한 사람이었다.


화나는 일이 있거나, 팀원이 일을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큰 소리를 질러서, 같이 사무실을 쓰는 다른 팀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팀을 자주 쳐다봤다. 우리팀에서 그의 호통을 듣지 않은 직원은 나와 권책임이 유일했다. 한편, 그가 자주 화를 내는 대상 중 하나는 정책임이었다.


유명 재벌을(특이하게도 외국 갑부를 닮았다. 말 한마디로 코인의 판도를 바꿔버리는 그...를) 닮았지만 엄청난 겁쟁이였던 정책임. 그는 나보다 20살 정도 나이가 많은 남자였는데,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내가 혼나면 어떡하지?’였다. 추측건대, 그가 그렇게 겁이 많은 이유는,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혼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혼나서 이상해진 건지, 이상해서 혼나게 된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평소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심지어, 복사 붙여 넣기를 잘못하면 한글 문서 틀이 어그러질까 봐, ctrl+c, ctrl+v를 인턴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나에게 몇 번 일을 부탁했을 때도, 계획표를 ‘1시간 단위로 만들어->30분 단위로->10분 단위로->1분 단위로.’ 등 수 없이 지시를 번복했다.

“정책임님, 근데 일주일 행사 계획표를 1분 단위로 만들어요? 가독성도 너무 떨어지는데...VIP 오는 20분 정도만 1분 단위로 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혼나지 않을까? 팀장님이 혼내면 현수씨가 그렇게 했다고 말해도 돼?”


혼내면 내가 했다고 말해도 되냐고?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 그는 혹시 혼날지도 모른다면서 기어코 내게 1분 단위로 계획표를 만들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30분 단위 계획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늘 책임 분담을 위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두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메일을 포워딩하고 CC(참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도 금요일 오후 8시 같은 메일을 보기 어려운 시간에 말이다.

“현수씨. 이건 업무 노하우야. 만약 행사 준비할 때, 외부 업체에서 확인해야 하는 내용이 1%라도 있으면 그걸 그 사람들이 확인하기 어려운 시간에 메일로 보내. 그럼 성공이지. 팀장님이 준비 상황 물어보면, 아직 업체에서 답변 기다리느라 준비 못했다고 하면 돼. 그럼 내 책임은? 없는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노하우가 통하지 않아 늘 혼나는 정책임이었지만, 그때는 나한테까지 책임전가 메일을 보낼 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금요일 오후 8시, 내가 출장 중일 때 메일을 보내는 것을 보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책임이 단독으로 6개월 동안 준비한 행사에 나와 보라 언니가 지원을 나가게 되었는데... 행사 전날 행사장을 방문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작동되지 않는 기계...배송 전인 물품...미정 상태의 배치도 등등...

“해외 출장 끝나자마자 여기로 가라고 한 이유가 있었네.”

“그러게, 현수야. 우리 이거 완전 덤터기 쓰겠다.”


그 혼돈의 틈에, 본부장님과 팀장님이 나타났다. 본부장님은 행사장 구석구석을 살피며 하나하나 지적하기 시작했다. "여기 기계 확인했어?", "이번에 들어오는 기업 수 몇 개야?", "VIP 동선은?", "VIP 일정 변동 있어?" 등등... 그가 아무리 질문을 쏟아부어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린 그 현장에 몇 시간 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담당자인 정책임만이 대답할 수 있는 내용들에 진땀을 빼며 우린 계속 그에게 전화했다.


“(모기만 한 목소리로) 책임님, 지금 어디세요? 본부장님 오셨는데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본부장님이랑 팀장님 같이 오셨니?”

“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나는 본부장님이랑 팀장님 가시면 갈게.”

“네? 지금 오셔야 돼요. 본부장님이 계속 물어보시는데.”

“그렇겠지. 근데 나 이제 혼나고 싶지 않아. 난 더 이상 혼날 나이가 아니야. 아직 보라씨랑 현수씨는 혼나도 괜찮아. 난 세 아이의 아버지야. 잠깐 숨어 있다가 본부장님 가시면 갈게.”

“책임님? 책임님??”


세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혼나기 싫다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참 욕을 먹다가 기진맥진해졌고, 그 순간에 정책임에게는 문자가 왔다.

‘이제 본부장님 갔니?’. ‘가면 얘기해줘,’


젠장...우리는 해외 출장 갔다 온 바로 다음 날부터 영문도 모르고 욕을 먹다가 그 날 새벽까지 정책임이 싼 똥을 치워야 했다. 그렇게 다음날, 혼자 숙소를 쓴 정책임은 오전에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로 팀장님의 신뢰를 완전 잃은 그는, 그다음부터 더욱 혹독하게 혼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육아 휴직을 선포했는데, 그 시기 또한 본인이 (1년 동안 담당하는 단 2개의 행사 중 하나인) 담당하는 행사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이런 정책임과 달리, 회사에 최선을 다하는 권책임이라는 남자도 있었다. (나와 함께 팀 내에서 팀장님의 호통을 듣지 않은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는 일도 일이지만, 머리도 좋았고, 사내 정치에 누구보다 열심히 였다. 본부장님의 만족을 위해서는 뭐든 하는 사람으로, 회식과 노래방 문화 혁신에도 기여했다. 그는 건배사를 할 때도, 본부장님의 이름 ‘이경원’으로 삼행시를 지었다.

“이! 제야 만나다니! 경!원 본부장님,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 원!이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충성” 이러면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노래방에선 나와 같은 젊은 여직원들에게 억지로 소녀시대 춤을 추게 했고, 춤을 추지 않으면 노래를 취소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악마의 모습도 보여줬다. 난 춤을 추면서도 속상한 마음에 화장실에서 울기도 했다.


그럴 때면 보라 언니는,

“현수야. 너는 하지 마. 언니가 출게. 너는 이런 거 하지 마? 응? 울지 마?”라고 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렇게 울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또 권책임이 다가와서, “고생했어. 우리 다 힘내자.”와 같은 멘트를 날리면서 우리가 모두 함께 피해자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정말 우리가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그가 모든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고생하고 힘쓰는 사람으로 기억했고, 사실 나와 보라 언니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쨌든, 그건 대단한 능력이었다. 모두에게 모두의 욕을 하지만, 모두에게 자신은 피해자이며 노력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능력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이 외에, 기가 너무 세서 심지어 민경 언니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던 송선임이라는 여자 선배가 있다. 일전에 감사실에서 정신을 잃은 나를 보건실로 옮겨주었던 사람으로, 사실 난 송선임이 나서서 민경 언니를 정리해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송선임도 본인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녀도 움직일 마음은 없었던 듯하다.


나는 팀장보다 그녀를 더 무서워했는데, 내 사수도 아니었지만 늘 휴가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미리 확인을 받았다.

“선임님, 저 다음 달에 이틀 정도 휴가 다녀와도 될까요?”

“왜? 언제?”

“셋째 주에 금요일이랑 그다음 주 월요일이요. 친구랑 대만 가려고요.”

“그래. 허락해주지! 팀장님한테도 말씀드려.”


여행 가기 한 달 전쯤 그녀와 팀장님에게 휴가를 허락받고, 티켓팅과 숙소 예약을 모두 마쳤다. 그 사이 소문이 빠른 회사에서 내 휴가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그 소문은 본부장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기념품 대량 구매는 불가피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대만 생각으로 정신을 부여잡고 살던 내게 어느 날 송선임이 말했다.

“너 언제 대만 간다고?”

“저 다음 주 금요일, 다다음주 월요일이요."

“아, 티켓팅 안 했지?”

“이제 2주 전이라...숙소랑 항공 다 예약했어요.”

“그래? 취소 수수료 얼마야?”

“알아본 적은 없는데...혹시 무슨 일 있어요?”

“어. 알아봐 한 번. 그때 너 해외 출장 가야 될 것 같아.”

“출장이요? 해외요?”

“어. 팀장님이랑 얘기 끝났어.”


‘너네가 가도 괜찮다고 했잖아!’라고 생각했지만 조용히 수수료를 알아봤다. 여행을 취소할 경우 손해 금액은 약 30만 원. 이 정도면 휴가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에,

“선임님, 수수료가 30만 원 넘게 나올 것 같아요.”

“그래? 너 돈 많이 깨지겠다. 너 러시아로 출장 가야 되는데 관련 담당자들 연락처 넘겨줄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30만 원은 내게 너무 큰돈이었고, 돈을 떠나 이 상황 자체에 화가 많이 났다. 원래 예정되어 있지도 않았고, 내 담당도 아니었던 출장을 갑자기 가야 하는 상황.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송선임. 친구에게 여행을 못 간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 (심지어 이 말을 듣고 친구는 울었다)


“선임님, 근데 다른 분이 출장 가실 수 없을까요? 저도 갑자기 듣게 된 거라서...”

“원래 내가 가야 되는 거였는데, 난 사정이 있어서 못가. 네가 한 번 찾아봐. 대신 갈 사람.”

찾아보라고? 어떻게 말하면 될까? 혹시 저 대신 출장 가실 수 있는 분! 하면 누가 손을 들어주려나? 이런 헛된 꿈을 꾸고 있을 때,

“맞다. 그리고 대신 갈 사람 구해도 출장 준비는 네가 해. 네 실적으로 인정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준비해야지. 너 대신 가는 거니까.”

“(그래...내가 꼭 가야 된다 이거지?) 여행 취소하고 제가 갈게요...”

“그래? 취소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휴가보다 일을 선택한 건 니 선택이다?”

이죽거리는 송선임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절대 그러진 못하고, 대만에 함께 가려고 했던 친구에게는 욕을 먹고, 러시아 출장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알고 보니, 이 출장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된 거라는 것!

“송선임은 출장 일정 알고 있었어요. 원래 본인이 가려던 출장이니까. 근데 갑자기 안 간다고 담당자 바꿨고. 일을 추진하다 보니까 생각보다 좀 챙길게 많아서 그런가?”

외부 담당자의 말을 듣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송선임이 내 휴가를 허락해준 건지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삭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 협의가 지속될수록, 조율이 어려운 부분들이 생겼다.


‘이거 이러다가, 출장까지 엎어지는 거 아니야?’


불안했다. 대만도 날아간 마당에 러시아까지 엎어지면 억울해서 살 수 없다! 하지만 난 그 해에 참 불운한 사람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은 언제나 사실이 되었다. 내가 러시아로 출발하기 며칠 전, 외부 담당자는 이 일을 추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출장도 취소되었다.


출장이 취소되자, 천하의 송선임도 내 심기를 약간 살펴주는 듯했지만 그 당시 내겐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다.

“근데 잘됐다. 그냥 대만 가면 되겠네.”

“(그거 취소한 지가 언젠데) 이미 여행 수수료 다 물고 취소해서 그러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내가 휴가를 내려던 그 기간, 나는 대만도 러시아도 아닌 한국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행사를 진행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외국어를 써서 외국에 있는 느낌이 물씬 나기는 개뿔 그렇게 우울해하고 있는데, 우리 팀 쪽으로 본부장님이 왔다.

“다들 여름휴가도 못 가시고 고생하시네. 근데 현수는 지금 대만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네...근데...”


내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송선임은 내 말을 끊고,

“아 본부장님, 현수가 친구랑 싸워서 대만 못 갔어요.”

“어? 친구랑 싸웠다고 취소했다고?”

“그렇대요. 요즘 애들은 싸우면 제대로 싸우더라고요. 그지 현수야?”

“네...”


내 대답을 들은 본부장님은 “현수가 생각보다 무서운 구석이 있네.”라며 우리 팀을 떴다. 송선임은 앞으로도 대만에 못 간 이유는 '친구와의 다툼'이라고 말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대만 건은 이렇게 끝났지만 나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이 재수 없는 일을 시작으로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사전 협의한 휴가를 3번이나 취소하게 되면서, 수수료를 옴팡지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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