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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인생에 다신 없길, 그녀_(1)

[2~4개월] 이게 진짜 산전수전

by 하이히니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바탕 해버린 동기들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솔직히 직장 안에서 우당탕 거리고 싸웠다는 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 만큼 다시 그 사이를 되돌리기 힘들었다. 사실 보라 언니는 민경 언니와 마찰을 빚었던 것을 후회하고 못내 마음에 걸려 했다. 그래서 그다음 주에 먼저 사과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온 다음 주.

출장 기간 동안 사용한 금액 정산 결과, 민경 언니는 보라 언니에게 30,500원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언니, 정산 내역은 카톡으로도 보내드렸고, 저한테 30,500원 주시면 돼요. 그리고 언니..."

"Stop stop stop. 그냥 요점만 말해."


요점만 말하라는 말에, 보라 언니의 사과 열차는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쯤 지났을까? 민경 언니가 검은 봉지에 뭔가를 들고 왔다.


"30,500원. 확인해 봐."


봉지 안에는 500원짜리가 있었다. 민경 언니가 보라 언니의 책상 위에 봉지를 내려놓았을 때, 엄청 묵직한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기점으로 순간적으로 내 귀에도 이명이 들렸다.


이 상황에서 30,500원을 500원으로만 준다고? 그녀의 인간성으로 미뤄봤을 때 50원짜리로 돈을 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보라 언니가 화난 채로 500원짜리 개수를 새고 있을 때,

“Sorry. 여기 500원 하나 빠졌다. 이거 받아.”

하면서, 민경 언니가 500원짜리 동전을 보라 언니 팔에 세게 던졌다.

“아!”

“맞았니? Oops. Sorry. 실수했네?”

잠시나마 사과를 생각했던 보라 언니의 마음은 짜게 식었고, 그 둘은 정말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한편, 우리 중에 그나마 민경 언니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세호 오빠는, 민경 언니에게 한 마디 한 대가로 그녀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오세호, 너 사무실에선 좀 조용할 수 없어? 그렇게 크게 웃어야겠니? 나 일하는 거 안보여?"

사실, 지금까지 세호 오빠는 민경 언니를 최대한 맞춰줬었는데, 한 번 이렇게 되니까 더 이상 맞춰주기 싫은건지 오빠도 민경 언니에게 한 마디도 안 지기 시작했다.

"네. 안 보이는데...지금 일하고 계세요? 맡은 거 없지 않아요?"


그 사이 인턴이었던 은성님도 퇴사를 하게 되었고, 민경 언니 입장에서 팀에서 만만한 사람은 이제 나 하나뿐이었다. 신경전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보라 언니와 세호 오빠는 부담스러운 상대로 분류되었는지, 뭔가 직접적으로 질타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한 기싸움을 하고 싶었는지, 보라 언니에게 할 말이 생기면 나를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호 오빠랑은 직접 대화했다.)


“김현수. 김보라한테 전해. 시끄럽다고. Tell her.”

“...”

“현수야. 민경 언니한테 전해. 할 말 있으면 직접 하라고.”


이런 날들이 반복되었고, 안 그래도 힘든데, 민경 언니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괴로운 일도 생겼다.


"김현수, 너 기독교라고 했지?"

"네."

"오늘 내가 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 같이 갈래? 그냥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 건데, 다들 대단한 사람들이야. 알고 지내면 손해는 아닐 거야."


성경 공부 모임? 이 단어를 듣자마자 뭔가 소름이 돋고 오싹했다. 교회를 다니며 몇 번 교육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회랑 무관하게 진행하는 성경 공부 모임은 진짜 성경 공부 모임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급적 사적으로 진행되는 성경 공부 모임은 참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솔직히 난 평소에 언니의 종교가 정체불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교회도 아닌 곳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아...언니 전 괜찮아요."

"Why? 진짜 편하게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와."


내가 초대에 응하지 않자, 그녀는 카톡으로 따로 메시지를 보내며 모임 참여를 권유했고, 아니 종용했고, 난 탈압박에 실패하고 그녀와 성경 공부 모임에까지 갔었다. 그리고 예상한 것처럼 그 모임에서 나는 내가 평소 교회에서 들었던 내용과 다른 이상한 내용을 주입당하다가 몇 시간쯤 지나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의 피로감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그날 대부분의 팀원들은 출장 중이었고, 선배 몇 명과 민경 언니,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업무상 은행에 가끔 가야했고, 약간 여유가 있는 시간이 생겨서 은행으로 갔다. 나갈 때만 해도 민경 언니와 선배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도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우리 팀에 남은 사람은 민경 언니뿐이었다. 그리고 전화가 많이 왔다. 늘 고고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하는(솔직히 시키는 일 하나도 안 하면서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민경 언니는 그 상황이 무척 성가셨다. 전화 당겨 받는 일은 김현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내가 자리에 없는 것을 알고 무척 화가 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곧장 나에게 전화했다.


“(매우 격앙된 목소리) 너 어디야?”

“지금 은행이요.”

“너 왜 보고도 안 하고 돌아다녀?”

“지금 근처 은행이에요. 온 지 5분도 안됐어요.”

“You can't do this to me!! 내가 지금 전화 벨소리나 듣고 있어야 되니?”

“언니. 지금 일 때문에 온 거예요. 그리고 언니가 전화받으면 되잖아요.”

“어디서 말대답이야? 지금 당장 올라와! 오래 안 기다려.”


내가 언니와 통화를 하면서 받았던 느낌들이 활자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나는 저 말을 들으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리 참아도 나아지지 않는 여자. 저 구제불능인 여자! 더 이상 나도 참지 않는다.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화를 이기지 못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나를 다른 팀 선배가 불러 세웠다.


“현수야, 방금 쟤 난리도 아니었어.”

“잠깐 일 때문에 갔다 온 건데...죄송합니다.”

“아니, 네가 뭐가 죄송해. 지금 너랑 전화 끊고도 욕하고 난리 치고. 또 너네 팀장한테 전화해서 자리 이탈하는 직원 감시하라고 화내는 것 같더라.”


아니나 다를까. 그때 출장 중이던 팀장님에게도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받으려는데, 민경 언니가 내 쪽으로 오더니 내 휴대폰을 낚아채갔다.

“Stop. 지금 이 전화받으려고 한 거야?”

“네. 주세요. 왜 이러세요?”

“지금 노닥거릴게 아니라 자리에 빨리 와서 전화를 받아야지. 뭐하는 태도야? 어리다고 봐줬더니.”

“언니, 제가 어디서 밥을 먹고 왔어요, 아니면 카페를 갔다 왔어요? 그 사이에 누구 죽었어요?”

“What? excuse me? 미쳤니? 돈 받고 일하면 제대로 해.”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언니도 우리랑 동기예요. 그냥 나이만 많은 동기라고요. 우리도 받는 전화 언니는 왜 못 받아요? 나이 많은 게 선배가 아니에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했던가! 조직에 유해한 해충 같은 인물이 내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내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거라고 생각을 못 했는지, 민경 언니는 쿵쾅대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쿵쾅쿵쾅쿵쾅.

회사를 다니다 보면, 걷는 소리로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능하다. 팔자걸음, 높은 구두를 신는 사람, 걸음이 빠른 사람, 느린 사람 등등...모두 그들만의 소리가 있다. 그녀의 걸음은 강하고 크고 빨랐다. 쿵쾅쿵쾅쿵쾅!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지만 몸이 파르르 떨렸다. 회사는 원래 이런 곳이란 말인가? 맘 속에 있는 말을 꺼내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갈등이 두려웠다. 보라 언니는 속이 시원하다고 했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 뒤로도 최대한 갈등을 피하는 쪽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특히 그날은 사무실 전체 전용 대형 프린터기에 인쇄 대기 중인 프린터물이 너무나 많은 날이었다. 그 와중에 팀장님이 본부장 보고용 원페이퍼 보고서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때,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했다.


민경 언니가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팀 전용 프린터기. 그걸 사용해보리라!


떨리는 마음으로 그 프린터를 클릭하고 인쇄를 눌렀다. 한 장의 종이가 약간의 소음을 만들어내며 프린터기를 빠져나왔다. 종이가 중간쯤 나왔을 때부터, 민경 언니는 그 프린터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어떤 사람이 소음을 만들고 있는지, 프린터를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종이 한 장이 어떤 나비효과를 만들어낼지 긴장이 되었지만...솔직히 이걸 못 쓰게 하는 건 완전 비정상 아닌가?


그 종이를 집으려는 순간. 민경 언니가 출동했다.

“김현수. 너 내가 이 프린터 쓰지 말라고 했지. You can't. 뭐하니?”

“저 좀 급해서요.”

“(내 손목을 확 낚아채며) 확실히 대답하고 가. 앞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하고 가!”


나는 애써 그 말을 무시하고 프린터물을 들고 팀장님의 자리로 갔다. 가면서도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언니가 눈 뒤집고 화내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팀장님께 보고 자료를 설명하면서도 언니가 해코지 하진 않을까 신경 쓰였다. 역시. 보고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내 앞을 가로막는 민경 언니.


“마지막으로 기회 줄게. 죄송하다고 다시는 안 쓰겠다고 말해.”

“제가 개인적인 용도로 쓴 것도 아니고, 앞으로는 저도 필요하면 이 프린터 쓸 거예요.”

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손은 덜덜 떨렸다. 애써 담담한 척하면서 자리에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프린터기의 코드를 뽑았다. 그러더니 사람의 상체 정도 크기인 그 프린터기를 들었다. 그 순간 나와 그녀의 거리는 2~3m 정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 프린터기를 내게 던졌다.


난 그 순간이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아직도 기억나고, 그 장면을 생각하면 제삼자가 된 것 같다. 아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기이한 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고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하다는 느낌을 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에게도 그 프린터는 매우 무거웠을 것이고 그 덕분에 정확도가 떨어졌고, 그 프린터를 내 쪽으로 던지긴 했지만 내가 맞지는 않았다.(나를 정말 명중시킬 생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목표를 맞추지 못한 프린터기는 큰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그 사무실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팀 쪽을 쳐다봤다.


“이거 정리하고 앞으로는 내 말 잘 들어!”


민경 언니가 악다구니를 썼다. 여기서도 놀라운 것은,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심지어 우리팀 팀장님도 민경 언니를 말리진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1장 인쇄에 대한 대가로 프린터기에 맞을 뻔했지만 말이다. 세호 오빠가 그 프린터기를 들어서 옮기고 작동해봤지만 고장 났는지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민경 언니의 소원대로 그 뒤로 그 프린터기를 아무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린 언니와 거의 어떤 말도 섞지 않게 되었다. 프린터기 사건은 회사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민경 언니는 거의 매장당한 상태였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로 살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욕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큰 발걸음 소리. 그녀의 얼굴. 그녀의 옷차림. 그녀의 나이. 그녀의 몸매. 그녀의 능력. 그녀의 목소리.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욕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가, 어떻게 보면 민경 언니의 인생도 안타까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언니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만 당하고 살았다.


우리 사이가 파국을 맞기 전에, 민경 언니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희, 민성씨 어때?”

“민성 오빠요?"

“Yes..um...민성씨 어때? 가끔 둘이 밥도 먹고 하는데, 여자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민성씨가 따로 밥 먹자고 하더라? 이런게 썸인가? 그래서 갔는데, 그럼 남자가 계산해야 되는 거 아니야? 더치페이를 하더라? 민성씨가 여자를 잘 모르는 스타일이지? 돈도 안 쓰고?”

“아닐 텐데?(눈치 없음) 그 오빠 잘 사줘요. 저희한테 피자도 사주고, 지나가다 만나면 맨날 아이스크림이랑 빵 사줘요.”

“그래? 너희들한테 잘 사줘? 민성씨 어린 여자 밝히는 그런 남자였어? 너희는 또 그런 민성씨를 이용했고? shame on you.”


저 때는 그냥, 언니가 화가 났나 보다 했는데, 민성 오빠의 얘기는 이와 전혀 달랐다. 애초에 그들은 단 둘이 밥을 먹은 적은 한 번도 없단다. 동기들 중 30대 중반 이상 되는 사람들이 5~6명쯤 있었는데, 그냥 그들끼리 단톡방을 새로 만들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모임 사람들끼리 몇 번 모였을 뿐인데, 다짜고짜, 민경이 언니가 밥값을 계산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오늘 저한테 밥 사주실 거죠? 기대할게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그녀가 거북하게 느껴져 “아니요, 각자 내야죠.”라고 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민경 언니는 그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와의 식사자리를 자랑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우리의 반응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이 외에도 어떤 남자 동기들에게 꽃을 선물 해달 라거나, 가방을 들어달라거나, 따로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단다. 평소 의존적인 사람이 싫다는 언니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안을 받은 남자 동기들은 한사코 정색하고 거절하거나 무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거절당한 일화들이 쏟아져 나오자, 언니에게 피해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이때 순간적으로 언니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그녀의 모난 부분을 넘겨보자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우리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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