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개월~2개월] 언니, 도대체 왜 이래요?
다음 날. 갑자기 방이 환해지고 눈이 부셨다.
7시로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2시간 전. 비몽사몽 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민경 언니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언니, 지금 뭐하세요?”
“나 지금 기도 가야 돼.”
“네? 어디로요?”
“None of you business. 다들 일어나.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
그녀가 기도를 하러 간다는 말에, 나 또한 기도하고 싶었다. 언니를 향한 저주 기도...
그녀는 심지어 나갈 때 불을 꺼주지도 않았다. 나는 젖 먹던 힘을 짜내 불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 뒤 울린 알람에 일어났지만 찌뿌둥함이 몸을 감쌌다.
5시에 나간 민경이 언니는 8시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8시 20분 정도에는 출발해야 일정에 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초조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현수야, 나 진짜 이 언니 보면 한 대 칠 거 같아. 지금 정리하고 가야 되는데 어쩌자는 거야.”
8시 10분. 그렇게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던 민경이 언니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났다. 태평스러운 모습에 보라 언니는 이성을 잃었다.
“언니, 저희 가야 되는데, 지금까지 뭐했어요?”
“필라테스. 난 새벽에 기도하고 필라테스 꼭 하거든. 너희들도 관리 슬슬 시작해야 되지 않니?”
필라테스? 우리가 지금 여기에 호캉스라도 하러 온 줄 아는건가? 그리고 도대체 여기까지 와서 필라테스를 어디서 하는 거지? 너무 황당해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이런거였다.
“필라테스요? 여기서 어떻게...”
“사우나 좀 다녀올게. 여기 샤워 시설이 별로야.”
“네? 언니...지금 출발해야 돼요.”
“So what? 나 신경 쓰지 마. 우리 성인이잖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상한 정도가 내 예상 범위를 늘 넘어서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그 때, 보라 언니가 강단있게 말했다.
“성인이면 좀 제대로 하세요. 같은 숙소 쓰면서 다 따로 나타나는 게 좋아보일 것 같아요? 지금 강준영 선임이랑 세호 오빠한테 언니 때문에 늦을 것 같다고 전화 할거예요."
참고로, 강준영 선임은 민경 언니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남자 선배들 중 하나였다. 보라 언니의 말에 민경 언니는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25분쯤에 숙소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학교에 딱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혹시나 늦을까 봐 초조했다.
보라 언니는 택시를 잡기 위해 뛰어갔고, 나도 민경이 언니의 짐까지 들고 뛰어가고 있었다.
“현수야! 언니! 택시 잡았어요. 어? 현수야. 언니 어딨어?”
뒤를 돌아보니, 뒤에서 뛰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없었다.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었다.
“아가씨들, 지금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기사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죄송해요.”
이때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언니가 지금까지 30년 넘게 온 세상에 적을 만들고 다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된 것이 아닐까? 하수구 구멍에 갑자기 빠진 건 아닐까?
그러다 5분 만에 나타난 민경이 언니의 손에 들려 있는 건...이삭...토스트?
보라 언니는 또다시 이성을 잃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요?”
“택시 딱 대기시켜 놨구나?”
“어디 있었냐고요.”
“이거 안 보여? 토스트 잖아. 필라테스까지 했는데, 배가 안 고프겠니? 난 솔직히 당연히 너희가 토스트 정도는 만들어 둘 줄 알았어. it's kind of... 출장 온 사람들끼리 매너잖아?”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재주가 대단한 여자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우리는 조용히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민경 언니는 토스트를 맛있게 먹으면서 good을 연발했다.
'그래. 배고프면 미칠 수도 있지. 내가 참아야지.'하고 생각해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 본격적인 일정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의욕도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더 심한 일은 택시 안에서 벌어졌다.
“저기요, 기사님. 저희, 나라일 하는 사람들이에요. 빨리 가주세요? ‘Z’ 대학교 아시죠?”
민경이 언니의 ‘나라일’ 발언에 기사님은 어색한 웃음을 띄었고 나와 보라 언니의 손발은 오그라들었다. 참고로, 우리의 출장지는 지역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고, Z대는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대학이었다.
최소한 택시 안에서만큼은 서로 별다른 갈등이 없이 조용히 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민경 언니는 그 기대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기사님, Z대는 서울로 대학 못 온 애들끼리 모여 있는 학교 맞죠?”
나와 보라 언니는 귀를 의심했다. 기사님은 당황한 눈치였다. 우린 기사님의 눈치를 살피며 분위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언니, 요즘 Z대학교 취업률 대박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맞아요. 인풋이랑 아웃풋 다 좋아지고 있다는데. 그지 언니?”
우리의 적극적인 분위기 수습에 다행히도 기사님은 기분이 풀린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의 민경 언니는 어택을 멈추지 않았다.
“Don't be silly. please. 너희들이 뭘 모르는 거겠지. 그래 취업률 높을 수도 있지. 그런데 취업하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 모르잖아? 이상한 회사 취업하고 취업률 높은 게 무슨 소용이야? 너희들 그러니까 수치만 볼게 아니라 그 수치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한 거야. Please be professional.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건, 돈이 없어서 서울에 대학 못 오는 거잖아. 요즘 다들 서울 오려고 하는데 지방에 뭐하러 남아있겠어?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Right?”
도를 넘은 민경이 언니의 어택에 정말 눈앞이 아득했다. 택시 안은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진짜 기사님은 갑자기 일하다가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걸까?
어색한 침묵이 잠시 감돌았고, 그 침묵을 깬 것은...기사님이었다.
“에휴. 아가씨 말이 맞네. 여기 이 사진 내 딸인데, 우리 딸이 돈이 없어서 서울로 대학을 못 갔어. 내가 택시를 하니까...그래도 우리 딸 Z대학에서는 전장학금 받아~”
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정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사님이 가지고 다니는 아들 사진. 그것은 그의 자랑이었으리라. 저 말을 하고 있는 기사님의 심정이 어떨까? 우리 아빠도 저렇게 힘들게 사회생활을 했을까?
“See that? 가난해서 서울로 대학 못 오는 거 맞지? 요즘 누가 이런 데서 학교를 다녀? 난 한국도 답답한데.”
기사님이 어떤 말을 하든, 그녀는 끝까지 사람의 마음을 짓밟았다.
이 와중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보라 언니뿐이었다.
“아, 이 분이 기사님 따님이세요? 진짜 예쁘시다. 그지 현수야?”
보라 언니는 내게 분위기 수습에 대한 지원 요청을 했고, 그 소리에 나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진짜 효녀시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 많을 것 같아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공기가 나아지지 않은 채로 Z대학에 도착했다. 개념 없는 손님을 태우고도 늦지 않게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해 준 기사님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선배들의 부스 세팅을 돕기 시작했다. 그날 부스를 운영하는 기관, 단체, 대학생들은 상당히 많았다.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민경이 언니는 어디선가 의자를 가지고 와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우리는 이제 놀랄 것도 없었다.
차라리 그녀의 한결같은 무개념이 좋았다.
그날 우리 부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두가 입이 욱신거릴 정도로 상담을 해주고, 홍보를 했다. 사업 내용을 숙지하지 못해서 뒤에 계속 앉아 있었던 민경 언니만 빼고.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가까워 왔는데, 주최측에서 홍보 부스를 운영하는 담당자들을 위해 점심으로 김밥을 준비해주었다. 근데 생각보다 김밥이 모자라는 건지, 행사 지원하는 학생들이 김밥을 못 받았다는 말이 들렸다.
“강준영 선임님, 우리는 점심 밖에서 먹죠?”
“응. 점심은 다 같이 하자고 하셔. 1시간 동안 부스 비워놓고.”
“아, 그럼 김밥 반납할까요? 부스 운영하는 대학생들은 못 받았대요.”
“그럼 반납하고 올래? 우린 밖에서 먹을 거야.”
그렇게 김밥을 반납하려고 챙기는데, 민경 언니가 내 옆에 오더니,
“Stop. 반납하지 마.”
“아, 김밥 드시게요? 그럼 하나 빼고 반납할게요.”
"Nope. 다 반납하지 말라고. 그리고 내가 반납하지 말랬다고 강준영 선임한테 말하지 마. Got it?”
“왜요? 저희 곧 점심 먹으러 갈 건데...”
“내가 나중에 어떤 종류의 김밥을 몇 개나 먹고 싶을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다 반납하겠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상하지 않니? 이건 common sense아니니?”
“언니...김밥 종류 하나 밖에 없어요. 지금 학생들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 빼고 다 반납할게요.”
솔직히 이제까지 쌓인 것도 너무 많고, 택시에서의 일도 그렇고 너무나 이기적인 그녀의 태도에 나도 이골이 난 상태였다. 더 이상 나도 그녀를 상대하기 싫어서 그 말만 남기고 나머지 김밥을 챙겨서 운영본부로 향했다. 아마 반납하고 다시 부스로 오는 시간이 1분도 안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바닥에는 온통 김밥들이...?
민경이 언니와 보라 언니는 대치 중?
부스 주변에 떨어져 있는 팸플릿과 기념품들?
“(보라 언니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너 따라 나와! 무슨 짓이야!”
“그만해요! 저 일하는 거 안 보여요?”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뭔지는 몰라도 이 상황을 말려야 했다.
“보라 언니, 언니가 참아. 무슨 일이야. 민경이 언니도 그만해요. 왜 이래요?”
“현수야, 나도 일하고 싶은데 이 언니가 자꾸 따라 나오래. 저기요! 언니는 일이 없어서 나갈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일이 많다고요. 그만 잡아당겨요!”
“(계속 보라 언니 손목을 끌어당기며) 따라 나와!”
보라 언니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중학교 때까지 육상 선수였으며, 평소 운동을 즐겨하는 타입이라서 체력이 굉장히 좋다. 그 말인 즉슨, 민경 언니가 끌어 당긴다고 해서 쉽게 끌려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뭔가 열세에 몰리자, 민경 언니는 세호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세호야, 지금 이 상황이 이해 되니? 회사에서 이런 하극상이 말이 되니?"
하지만, 이번 만큼은 세호 오빠도 민경 언니를 진정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어휴...그만 좀 하세요. 사람한테 김밥 던진게 누군데 지금 이해 되니 마니 하고 있어요. 그리고 외국에 오래 살다오셔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하극상은 여기서 쓰는 말 아니에요. 누나가 저희보다 높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세호 오빠의 반응에 충격을 먹었는지, 민경 언니는 잠깐 굳은 것 같았고, 그 때 보라 언니는 그녀를 강하게 뿌리쳤다.
우당탕탕탕아타아탕탕
민경 언니는 힘없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X배너까지 넘어져 꽤 큰 소리가 났다. 패배감을 맛본 민경 언니는, 그 자리에서 행사장을 박차고 나갔고, 저녁 식사 시간에 행사장으로 돌아왔다.
보라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열심히 상담을 시작했다. 강준영 선임은 이 상황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흥미진진한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선임님, 근데 둘이 어쩌다가 싸운 거예요?”
“아까 네가 김밥 반납하러 갔잖아. 근데 그때 정민경이 뒤에서 너한테 김밥 던졌어.”
“저한테요?”
“어. 자기 말 안 듣는다고. 그때부터 보라랑 싸우게 된 거야. 도대체 왜 그러냐고. 정민경 영어로 욕하고 화내고 난리였어. 나도 말려야 되긴 하는데 처음엔 황당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보다 보니까 보라 응원하고 싶어서 말리지도 못했네. 그리고 보라가 이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민경 언니 정도인 사람들은 상사들도 건드리지 않는다. 상사들은 자신이 피해야 할 사람, 자신이 일을 시켜도 괜찮은 사람을 귀신같이 구별해낸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상사들은 이 상황을 영원히 방치할 것이다.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어떤 상태인지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경 언니 같은 사람과 싸움을 하는 것은 어리석을지 몰라도, 최소한 이 상황에 대해 상사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서 상사들이 이 상황을 해결하도록 노력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