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히니 Mar 18. 2021

선배가 하던 일이 너무 쉽다

퇴사자의 변명

 "일단 본인이 맡은 것들 중에서 제일 하기 싫은 업무를 얘기해봐."


 회의 중, 차장님이 내뱉은 저 한 마디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제일 하기 싫은 업무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손이 많이 가는데 티 안나는 일, 엄청난 감정노동이 필요한 일, 미친 듯이 까다롭고 복잡한 일,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 일, 쳐다보기도 싫은 일 등등...


 이 회의는 어떤 회의였을까? 지금까지 힘들었던 업무를 정리해서 개선점을 도출하는 회의? 서로의 업무에 대해 의견을 교류하는 회의? 불필요한 업무를 없애는 회의?


 아니. 모두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회의는, 새로 올 신입에게 어떤 업무를 맡길까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회의였다.


 "일단, 지금까지 하던 업무들 중에서 하기 싫고 짜증 났던 것들 다 말해서, 그걸 신입한테 주자고."


 어쩐지! 아무리 고생을 해도 특별히 남는 것도 없고 배우는 것도 없고 괴롭기만 하더라니!

 그제야, 나는 몇 년 전 입사하자마자 왜 그토록 업무 간 연관성이 적으면서도 거지 같고, 손은 많이 가는데 티는 더럽게 안나는 일들만 맡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맡고 있는 일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나로선, 이 회의가 내심 반갑기도 했다. 잘만하면 나도 지금까지 하고 있던 것들 중에 정말 견디기 싫었던 몇 가지 업무를 쳐낼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그런데, 이게 맞는 일이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차장님, 신입한테 이런 식으로 일을 넘기는 것보다는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업무를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일을 주면 업무 간 연관이 별로 없으니까 신경 써야 할 범위는 너무 넓고, 일을 깊게 배울 수도 없고... 힘들기만 할 것 같은데."

 "그럼 짜증 나는 거 현수씨가 다 할래?"

 "그게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하기 힘들다고 하는 거 다 현수씨가 할 거냐고. 아니잖아. 신입들 다 이러면서 일 배우는 거야."


 이게 말이야 방구야?

 

 차장님의 반응에 할 말을 잃었을 때, 구세주처럼 내 의견에 동조해주는 선배가 한 명 나타났다.

 "차장님은 왜 말을 그렇게 해요? 김현수 대리가 하는 말 맞죠 뭐. 왜 맨날 신입만 오면 하기 싫었던 거 다 모아서 그냥 넘겨요? 그러니까 신입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지. 지금 김대리 업무 분장도 완전 누더기잖아요."

 "강과장, 그게 일부러 그러는거야? 우리가 하는 일은 지금도 엄청 힘들잖아. 안 그래? 그럼 신입 대신에 강과장이 할래? 다들 성격 좋네. 좀 편하게 가자. 어? 원래 신입이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

 "같은 팀이면 일을 제대로 분배해야죠. 지금 의견 냈다고 강과장이 다 하라느니, 김대리가 다 하라느니 이러면 이게 회의예요?"


 역시 과장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나 같은 대리 나부랭이는 차장님의 한 마디에 동력을 잃고 바다로 추락했지만, 과장님은 차장님의 한 마디에도 쉽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 나도 용기 내보고 싶었다.


 "차장님, 제가 지난 몇 년간 이런 식으로 받은 업무를 해보니까, 제가 맡은 업무들 하나하나가 너무 연관성은 적고 범위가 넓어서, 신경 쓰기도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어떤 업무를 깊게 배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신입이 원래 그런 업무 하는 거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업무들만 받다 보니까 나중에 업무에 대해 질문을 하려고 해도 답변할 수 없는 분들도 안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저 정말 일하기 힘들었거든요... 이런 식으로 일주는 건 신입한테 좋은 것 같진 않아요..."


 나까지 이렇게 나오자, 차장님은 할 말을 잃은 듯한 눈치였다.

 "강과장이랑 김대리 성격 좋네. 그래 그럼 둘은 알아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신입한테 빼줄 업무 따로 정해놓자고. 나는 내가 하던 업무 중에 이거 매달 계산하는 거 있지? 이것만 좀 빼줘. 난 이게 어렵다기보다, 나머지 업무들도 너무 벅차. 신경쓸 것들도 너무 많고. 간단한 업무니까 이것만 빼자고."

 

 차장님을 필두로, 강과장과 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팀원들이, 본인들 업무가 너무나 과중하다며 읍소했고 결국 그들은 본인들이 정말 '이것만큼은 빼줬으면'하는 업무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들이 벗어던진 업무는 신입의 업무가 되고, 나의 업무가 되고, 강과장의 업무가 되었다.


 나 또한 누더기가 될 대로 된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가 더 생기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컸지만, 그래도 선배들이 저렇게까지 죽는소리를 하는데, 나보다 돈을 얼마를 더 받는데, 그들이 최소한 나보다는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나대로 누더기가 된 업무를 소화해내고, 새로 온 신입도 그 나름대로의 누더기 속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차장님이 다른 부서에 가고, 그 대신 나보다도 더 후배인 어떤 직원이 우리팀에 새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다시, 팀 회의가 진행되었다.

 팀 회의의 주제는, '새로운 팀원이 차장님이 하던 일을 그대로 맡을 것인가?'였다.


 "박차장 업무가 어려웠을 텐데, 입사 얼마 안 된 사람이 그냥 맡는 게 괜찮으려나?"


 팀장님이 말문을 열었다. 사실, 난 누더기 업무에 꽤 적응을 한 이후였기 때문에 다른 업무를 맡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죽는소리+그의 연봉 등을 고려했을 때) 차장님이 하던 업무가 내 업무보다 훨씬 어려운 업무일 거라고 생각했고 더 어려운 업무를 나보다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맡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팀장님, 조금 걱정되기는 한데, 차장님이 하시던 업무 제가 해볼게요. 아무래도 새로 오시는 분은 팀에도 적응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차장님이 하던 거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김대리 그래도 되겠어? 박차장 하던 업무 만만치 않을 텐데..."

 "해볼게요!"


 그렇게 시작된 인수인계. 근데, 뭔가 이상했다.


 박차장이 하던 업무가...너무 쉽달까? 신경 쓸 것도 별로 없달까? 그렇다고 큰 책임을 질 부분도 없달까...? 박차장은 왜 이 정도 업무를 맡고 있으면서 그렇게 죽는소리를 했을까? 아니면, 정말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차장님, 지금 말씀해주시는 부분만 신경 쓰면 되는 거죠? 생각보다..."

 "생각보다 별로 어렵지 않지?"

 "네...그렇네요."

 "이게 회사생활 팁이라면 팁이야. 무슨 일이든 간에 내가 맡게 된 일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처럼 말하고, 여유 없는 것처럼 말하고. 이것도 다 능력이야. 이제 현수씨도 선배급이잖아. 괜히, 조금 더 할 수 있느니 뭐니 그러지 말고. 회사생활이 갈수록 편해져야지. 고생은 신입 때 하는 거고. 안 그래?"

 "근데..."

 "만약에 지금 내가 하던 업무 받은 다음에, 업무가 생각보다 쉽다더니 여유 있어서 더 할 수 있다느니 하면 현수씨도 괜히 일이 늘어나겠지만, 내 입장도 상당히 좀 우스워지는 거야. 안 그래?"


 박차장은 자신의 업무가 크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꽤 힘들지 않은 업무를 하면서 죽는소리를 하고, 그 업무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선배급의 헤게모니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헤게모니에 날 끼워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그 헤게모니를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김대리님, 박차장님이 하던 업무 새로 받았는데 어때요?"

 "음..."

 "대리님이 하던 업무보다 쉽죠?"

 "아..."

 "곤란한 질문이었나?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요. 딱 봐도 박차장님이 하던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긴 한데."

 "강과장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나야...뭐 오래 다녔으니까 딱 보면 알죠."

 "우리팀 사람들, 우리만 빼고 아마 다들 살만하긴 할걸요?"

 "이런 걸 다 알면서도 그냥 참으시는 거예요?"

 "괜히 이런 거 말하면 역적 취급받죠. 지금 우리 회사에서는 대부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더 어렵고 힘든 일 하고 있을걸요? 박차장님이 하던 업무 설명 들으니까 좀 편한 업무죠?"


 강과장의 질문처럼, 박차장의 업무는 정말 쉬웠다. 그의 업무를 맡으면서 내 회사생활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편해지긴 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내가 하고 있는 업무를 받은 사람은 지금 고생하고 있을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무기력을 향한 가스 라이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