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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Feb 11. 2021

무기력을 향한 가스 라이팅

퇴사자의 변명

 "요즘 일하는 건 어때? 힘들지? 팀 분위기는 어때?"

 "뭐...똑같죠."

 "그래? 편하게 생각하고 얘기해 봐.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어때 요즘? 힘들어?"


 나는 알고 있다.

 '편하게 생각하고 얘기하라는 사람'을 절대로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꽉 막힌 사람 아니라는 사람'이 제일 꽉 막힌 사람이라는 것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끝까지 속내를 털어놓지 말아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너무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마 저들이 나에게 와서 이것저것 말을 붙이는 이유도, 내 솔직함이 결국 뭔가를 말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응? 편하게 말해봐. 소문 들어보니까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던데."

 "그냥 뭐...이 회사가 조직 문화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답답한 것도 있고 업무도 너무 많이 쏠리고..."

 "뭐? 우리 회사가? 이만한 회사가 어딨어. 아니, 도대체 뭐가 별로야?"

 "아... 아니에요."

 "아. 오해하지 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조직 문화가 어떻게 별론데?"


 뭐가 별로냐고?

 돈을 많이 받는 직원일수록 일을 적게 하는 것도, 술자리에서 욕지거리가 오고 가는 것도, 회식자리와 각종 주말 행사도, 관대하지 말아야  일에 관대한 것도... 별로였다. 하지만, 이런 속마음까지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었다. 직장  많은 구성원이,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것에 굉장히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가 다녔던 직장처럼 좀 들어가기 힘든 직장들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다.

 1) 정년이 보장된다.

 2) 인기가 많아서 정규직으로 입사하기가 어렵다.  

 3) 한 번 입사한 사람들이 오래 동안 근무하다 정년퇴직하는 경우가 많다.

 4) 그래서 그런지, 회사의 불합리한 점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5) 또, 그래서 그런지, 이 회사의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다.

 

 저런 공통점들 때문에 직장 내 구성원들은 본인들이 속한 곳이 마치 견고한 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런 불합리함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반항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난 끝까지 내 솔직한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순 없었다.


 "아니에요. 그냥 뭐..."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근데, 나도 젊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대충 알겠어. 근데, 내가 인생 선배로서 말하면, 이만한 직장 없어. 근데, 이제 몇 살이니?"

 "저요?”

 "이제 나이 꽤 먹었지? 나이 먹고, 솔직히 어디 다른데 취업할 수 있어? 뭐 특별히 잘하는 거 있어? 아니잖아. 그럼 여기에서 적응하고 지내야지. 어디 밖에 나가서 이 정도 돈 받고 대우받으면서 지낼 수 있겠어?"

 "네..."

 "진짜 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후배로 아끼니까 다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처음 입사했을 때야, 젊고 스펙 같은 것도 다 준비되어 있었을 거 아니야. 근데 지금 그거 다 다시 할 수 있어? 지금 어디 나가서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어. 여기에서 열심히 하는 게 최선이야. 그러니까 더 적극적으로 해야지. 응?"


 내가 하는 업무의 반의 반 정도를 소화하면서 나보다 몇 천만 원이나 돈을 더 받는 사람에게 왜 저런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하긴 했지만, 저 사람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나에게 저런 조언을 퍼부었다.


 이제 내 나이가 많아서 그 어디에서도 날 받아주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속해있는 이 조직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밖에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도 없다고.


 한 동안 난 그 말을 믿었다. 저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조직의 불합리함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무기력하기도 하고, 이 곳에 익숙해지길 기다리기도 했다. 아무리 많은 업무가 주어져도 수당도 없이 수백 시간을 초과 근무하고, 주말에 출근하면서 일했다.


 하지만 난 결국 그곳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퇴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퇴사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말한 것과 다르게, 이 정도 되는 직장도 많고, 아직 나를 찾는 곳도 많다는 것을. 밖에 나가서도 얼마든지 그 정도 대우받으면서 일할 곳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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