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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Jan 11. 2021

하루 400통 전화받는 나의 직업은?

퇴사자의 변명

 난, 업무가 바쁜 시기에는 하루에 400통 전후의 전화를 받았다. 일 년 중 두 달 정도는 하루에 저 정도 전화를 받고, 한 네 달 정도는 하루 100~200통 정도? 평범한 달에는 하루 50~100통 정도의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400통. 


 그냥 들으면 '뭐 그게 그렇게 많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전화 400통을 하면 대부분 사람의 멘탈은 쿠쿠다스가 된다.


 생각하는 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고, 두통도 굉장히 심하다. 목이 아프고, 배도 고프다.


 내가 이렇게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내 직업이 전화받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령 상담센터나 콜센터 같은. 하지만, 내가 저렇게 400통의 전화를 받고 있던 시기, 나는 한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근무시간 동안 전화를 받은 다음에 얼마큼 초과근무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 같은 경우 진짜 업무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퇴근시간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초과근무 수당은 없다.)


 저렇게 근무시간 내내 전화를 받으며 요구 사항들을 처리해주다 보면 더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들은 근무시간 외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근무시간 동안은 온갖 전화와 요구들 때문에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서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었고, 물을 마시고 싶어도 물을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까 물을 마시지 않기도 했다.


 저렇게 전화를 받고, 일을 하다 보면 밤 11~12시가 되고, 심하면 더 늦기도 했고, 주말 내내 일했던 적도 많다. 내가 가장 전화를 많이 받았을 때, 나는 학생들의 학사 업무를 지원해주고 있었다.


 이걸 들으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도대체 누가 학교 다니면서 학교에다가 전화를 걸어? 나도 대학 다녀봤는데, 난 학교에 전화 한 적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대학을 다녀봤지만, 뭔가를 문의하기 위해 학교에 전화했던 적은 딱히 없었다. 나는 휴학도 한 적이 없고, 복학도 한 적이 없고, 재수강을 한 적도 없고, 수강신청이 제대로 되지 않아도 그냥 스스로 대안을 찾고, 나 스스로 수강편람이나 학사 안내를 읽으며 졸업 요건을 챙겼다. 그래서 난 나 같은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정말 똘똘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냥 똘똘한 게 아니라 상위 0.1% 정도는 되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받는 전화들이 대강 어떤 느낌인지 몇 개 공유해보려고 한다. 내용은 굉장히 복잡해서 굉장히 단순하게 정리하였으니, 대충 느낌만 받아가기를!


#1. 제 학점을 책임지세요.


 "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저기요. 하...일단 통화 녹음 할게요. 제가 지금 학점이 좀 낮거든요?"


 전화를 건 학생은 다짜고짜 녹음 예고부터 시작했다.


 "(하.. 말투 보니까 긴 싸움이 되겠네...) 네."

 "학점이 3.0도 안돼서 취업이 어렵거든요? 근데 이 부분은 학교도 좀 책임 있는 거 아시죠?"

 "(솔직히 겁나 어이없지만 차분하게) 어떤 부분 말씀이시죠?"

 "제가 잘하는 과목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학점이 높았겠죠. 근데 그게 아니니까 지금 제 학점이 낮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잘하는 과목들도 개설하셔야죠. 그리고 제가 제 돈 내고 다니는 건데, 그냥 원하는 대로 재수강할 수 있게 하면 안 되나요?"


 "재수강 과목에 제한이 있는 건, 평가 때문에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또 사전에 다 안내가 되어 있는 부분이니까 학생분께서 계획하셔서 횟수 제한에 맞게 재수강해주시고, 과목 개설 같은 경우는 담당 교수, 시설, 학과 등 고려할 부분이 많아서 지금 당장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뭐 고민도 없이 안된다고 하고,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왜 이렇게 무책임하게 일하세요? 그럼 언제까지 보고해주실 수 있는데요?"


 이렇게 똑같은 얘기를 30분 이상 나누고, 전화를 끊는다. 그럼 학생은 상위 기관에 민원을 넣는다. 제목은 '수업 개설 거부에 대한 해명 요청?' 이런 느낌으로.

 


#2. 우리 애가~


 대학생이면, 성인이다. 솔직히 불만이나 문의에 대해서는 스스로 전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신기한 건 학생의 엄마, 아빠에게 전화가 많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 많이. 사실, 엄마, 아빠까지만 가면 다행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 형, 누나, 언니, 심지어 학생의 남자친구가 전화를 하기도 한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같은 경우, 전화를 시작하면, '우리 강아지가'라는 말을 실제로 내뱉기도 하고, 학사 제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조건 해달라고 떼를 쓰면서 전화를 절대 끊지 않는다. 학교로 찾아오기도 한다. 학생의 오빠, 형, 남자친구가 전화를 걸면 여자인 나에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근데 신기하게도, 이런 악성 민원 전화를 남자 직원에게 넘겨주면 얼마 안 있어 전화를 끊는다.)


#3. 무적의 막 학기


 대학에서 막 학기 학생은 무적이다. 모든 학사 제도를 무시했더라도, "제가 막 학기라서...", "이거 아니면 졸업이 안돼서..."라는 말을 꺼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아니, 무조건 해결할 수 있도록 내가 어떤 개고생을 하더라도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가능하면 규정대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지만 학교에서(그러니까 내 입장에선, 직장에서) 가능하면 졸업을 시키는 것으로 정책을 잡고 있기 때문에, 막 학기인 학생들은 수강신청을 까먹거나, 등록금을 안 내거나 온갖 실수를 다 해도, 그 실수를 직원들이 붙어서 다 해결해야 한다. 그 학생들 때문에 똑같은 행정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뒤집고 온갖 비효율이 발생한다.


 이런 학생이 학기에 한 두 명 나올까 말까 하다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학생은 학기 당 수십 명이다.


#4. 그냥 한 번 만나시죠


 학생과 직원이 통화를 하다 보면, 정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많다. 물론 나쁜 직원도 있겠지만, 내가 학생이었을 때로 빙의해서 생각을 해봐도 학생이 잘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복학 신청 기간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 복학 신청을 하지 못한 학생이 있었다. 근데 웃긴 건, 그 학기에 꼭 복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거로운 행정 절차를 감안하고서라도 일을 해결해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기간에 전화 문의를 해왔다.


 그래서, 도저히 안 된다고 안내를 하다 서로 언성이 높아졌는데, 그 학생이 직원에게 한 말.

 “그냥 만나서 한 판 하시죠. 선생 학생 이 딴 거 다 빼고. 그냥 한 판 하시죠." 


#5. 온 동네에 소문난 호구 학교


 요즘 학생들은 전화를 하다가 불만이 생겼다거나, 아니면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서 뭔가 해결한 경험이 있으면 그걸 에브리타임이라는 앱에 올리는 것 같았다. 


 에브리타임이라는 앱에서 '000(내 이름으로 추정됨) X나 짜증남. 다 안된대 ㅅㅂ. 나한테는 안된다고 하면서 점심 잘 처먹더라.', '우리 학교는 안 된다고 징징거리고 화내면 다 해줌. 그 직원한테 다시 전화해서 더 화내 보면 해결될 듯 ㅇㅇ.' 같은 글을 본 적이 있다.


 근데 안타깝게도, 이런 글을 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저 M대 학생인데요."

 "아, 저희 학생이 아니라 M대 시라고요? 네 말씀해주세요."

 "제가 지금 막 학기인데, M대 졸업이 안될 것 같아서, 그 대학교에 교류학생 가서 전필 하나 들으려고 하거든요?"

 "아. 근데 지금 M대랑 저희 대학 교류 신청 기간이 이미 끝났어요. 그리고, M대 전필을 저희 학교 와서 들을 수가 없을 텐데요."

 "아, 끝난 거 알긴 아는데요. 그냥 해주시면 안 돼요?"

 "네, 어려울 것 같습니다. M대에서 전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하시거나, 아직 교류 신청 기간 남아있는 타대학에 전화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 M대에서 방법이 없다잖아요. 그리고 다른 대학 다 교류 끝났어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씨X...이 학교는 해달라고 하면 다 해준다고 써져있던데, 왜 안 해줘요?"


 심지어 다른 학교 학생들도 이 학교에 전화를 해서 저런 말을 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저러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학교에 전화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불만을 품은 경우가 많았다. 저런 식의 분노가 대부분인 전화 400통을 받고, 또 그 사이에 쌓이는 메일도 하루에 수십, 수백 통. 쌓여있는 업무.


 모든 것에 환멸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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