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당신을 사랑했지만 올바른 교육 방법까지는 몰랐어요. 다른 많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요. 로라 씨, 나도 불행했던 시절을 겪어봐서 알아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거예요. 하지만 어떤 일이 닥쳐도 자신을 격려하고 아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가두지 마세요. 날개를 펴요."
- 호아킴 데 포사다, <바보 빅터>, 183p.
"아버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셔. 언제나 너와 가까워지고 싶고 대화를 하고 싶은데 독설이 먼저 튀어나와 버리지. 그렇지만 널 누구보다 사랑하신단다. 예전에 네가 책을 쓴다고 했을 때 기억나니? 그때 아버지가 너한테는 모질게 말했지만, 사실 주변 사람들에게 딸이 작가가 될 거라고 얼마나 자랑했는지 몰라."
- 호아킴 데 포사다, <바보 빅터>, 179p.
나에겐 가슴 먹먹해지는 그 이름 '아버지 또는 아빠'이다. 우리 아버지도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신다. 여전히 지금까지도 독설이 먼저 튀어나오고, 툭툭 뱉는 그 어색한 한 마디들이 아빠와 나의 거리를 0.1mm씩 멀어지게 하고, 마음의 온도도 덩달아 떨어뜨린다. 어언 35년째 말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아무거나 잘 먹었고, 할머니와 같이 살아서 나물반찬도, 된장도 청국장도 잘 먹는 소위 잡식성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었다. 1920년대 전기불을 쓰고, 집에 일꾼이 10명이 넘는, 형제는 10명으로 유복하게 자라던 10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였다. 전쟁 때 피폭을 맞고, 땅과 재산을 빼앗긴 충격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100일이 되던 날 돌아가셨고, 남은 재산들도 큰 아버지의 실수로 집안을 다 말아먹었으며, 아버지는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일찍 군복무를 마치고 바로 사업을 시작하셨다.
집안을 잘 일으켜 세운 아버지는, 오빠와 내가 밥을 남기는 게 싫으셨고, 먹기 싫다고 하면 밥그릇을 바로 빼앗고 다 치워버리셨다. 그러고는 하루 이틀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호통을 치셨다. 그런 모습을 보니 밥을 안 먹을 수도, 남길 수도, 투정을 할 수도 없었다. 어렸을 땐 아빠가 굉장히 무서웠고 항상 인상을 쓰고 있어 말을 걸 수 조차 없었다.
내가 한 6살 되었으려나, 가족 외식을 하다 반찬이 떨어져서 아버지는 나에게 더 달라고 크게 말하라고 하셨다. 손님이 많은 식당에서 '저기요' 하기도 그렇고, '이모!'라고 하기엔 우리 이모가 아닌데.. 어린 나이에 부끄럽기도 했고 뭐라고 해야 할지 쭈뼛거리고 있던 찰나에 아버지는 독설을 날리셨다. "너 바보야? 말도 못 해?" 아버지가 목소리도 좀 커야지.... 그 말에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한마디만 하면 말 대꾸 한다고, 뭔 말이 많냐고 '예, 아니요'라고만 해!라고 하셔서 어릴 땐 내 의견을 한번 내 비친 적이 없었다. 의견을 내도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호통을 치시니 답답해서 눈물만 나왔다. 그런데 엎친데 덮쳤다. 눈물을 흘리면 더 혼나기 일쑤였다. 정말 집이 지옥 같았다.
나에 대한 아빠의 화살은 내 마음속 깊이 박혔고, 이따금씩 그 화살이 엄마에게로 괜히 돌아가기도 했다.
학창 시절엔 집에 있는 시간보다 친구들이랑 있는 시간이 아무리 길다지만, 집에서는 딱 3마디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상에 둘러앉아하는 말 '잘 먹겠습니다', 학교가며 하는 말 '다녀오겠습니다', 집에 돌아올 때 하는 말 '다녀왔습니다'. 이게 다였다.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내 의견이나 생각을 그리고 내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얼마 전,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근데 우리가 우리 얘기 다 하는데 너는 왜 니 얘기를 한 번도 안 해?" 그래도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듣는 게 더 좋아" 사실 들어주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같이 지내온, 전공도 같은 동종업계의 27년 이상 연락하며 모임 하며 만나는 친구들인데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고, 전공을 해서 그랬는지 회복탄력성도 끝내준다.
대학에 진학하고 교육학을 전공하고, 공부하다 보니, 아빠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나 상담에 관심이 갔다. 무엇보다 듣는 것을 잘하기에, 듣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에, 장점이 되었다. 그리고는 사회정서학습과 마음치유에 관심을 갖게 되며 나 스스로 치유하고 회복되고 있다.
이 잔잔한 마음과 행복들이 내 자녀와 학교에 있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흘러 들어가길 고대하며, 더욱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Be yourself!
하지만 노쇠해지는 아버지를 볼 때면, 포옹은 못 해줄지언정 손이라도 한번 잡아드리고 싶고, 따듯한 말도 해 드리고 싶은데,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 흔한 아빠 사랑해요도 해 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좁혀지지 않는 마음의 거리는 어찌하오리까.. 내일은 아버지께 전화 한 통이라도 드려야겠다. 어색하다. 여 전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