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친구 모임 하나가 있다. 이름 하야 '지맘사'. 이 모임은 '지 맘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나름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다. 뜻은 심오하나 우리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그냥 내 맘 가는 대로 끌리는 대로 자유롭게 살자는 것. 이런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한국도 아닌 미국 시골마을 오리건주 유진에서 만나 모임을 결성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나의 든든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우리 엄마, 윤여사의 교육 철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윤여사는 내게 '자유롭게 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 더 '당당하게 살라'라고 했다.
엄만 나를 가르친 대로 정직하고 당당하게 그녀의 인생을 살아왔다. 내게 대체 불가한 유일무이한 존재, 그런 윤여사는 자신의 외동딸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면서.
엄마의 교육 철학이 빛나던 순간이 몇 있는데 하나를 말해보자면 내가 20살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게 한 일이다. 윤여사는 여자도 운전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 잘하는데 남자들에겐 기본 자질처럼 되어버린 운전을 하지 못하면 차별받는다고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일이기도 했다. 언제나 당당한 윤여사는 21살 트럭으로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했고, 지금과는 달리 꽤 탈락자가 나왔던 시험을 한 번에 통과했다. 불행히도 외할아버지 친구가 이 모습을 지켜봤고 '너네 딸 운전 잘하더라'라고 전해주면서 사달이 났다고 했다. 보수적 이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외할아버지에게 윤여사는 집에 가서 호되게 혼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취득한 면허로 엄만 지금까지 아빠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아빠가 운전으로 은근 생색을 내면 엄만 "내가 면허 10년 빨리 땄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크크. 이런 엄마를 보고 자란 나 역시 실패란 아픔 없이 무사히 한 번에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또 하나 더 대표적인 일은 22살이었던 나를 혼자 뉴욕으로 여행 보낸 일이다. 그 흔한 사춘기도 없이 살던 나에게 잠깐 우울증이 찾아왔던 때다. 잘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편입을 준비하겠다는 핑계로 몇 달을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친구들과 연락하느라 붙잡고 살았던 휴대폰을 잃어버리고도 3일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살고 있었다. 윤여사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누구보다 내 걱정을 했을 윤여사는 내가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언 아닌 선언을 하자, 아빠에게 친구들 여럿과 함께 가는 여행이라 거짓말을 하면서 까지 내가 그곳에 갈 수 있게 지원했다.
윤여사의 생각대로 나는 딱 한번 혼자 펑펑 울었을 때 빼곤 씩씩하게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큰 세계를 본만큼 담뿍 철이 들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니, 꼭 철이 들어야 했다. 스스로 한 뼘 성장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건 겨울 칼바람에 코트를 몇 번이고 여며야 했던 브루클린 브리지에서였다. 밤 9시 눈부신 야경을 자랑하던 그 다리에서 나만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게 죄스러워서 그렇게 울었다. 엄마의 희생으로 내가 자유를 누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는 걸.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 하고 그럴 때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결코 남의 희생으로 누리는 자유는 떳떳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에 새겨 돌아왔다.
그렇게 당당한 자유를 향한 나의 탐험은 엄마를 향한 눈물로 시작됐다. 다시 목표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한 나는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여사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고, 더 열심히 놀았다. 그러던 중 나와 가치관이 딱 맞아떨어지는 지맘사를 만나게 됐다.
자유롭게 당당하게 사는 건 나에게 큰 임무다. 그게 윤여사의 교육 철학이고, 그녀가 내게 한 희생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직 엄마에게 많은 부분을 빚졌지만 나는 우리 윤여사의 딸답게, 지맘사의 모토를 지키며 오늘도 내 맘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 삶의 책임도 철저하게 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