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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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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 Nov 13. 2018

상사몽(相思夢)

相思相見只憑夢: 서로 그리워 만나는 곳 꿈속뿐인데...


아침에 핸드폰을 켰더니...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님 만나기를 염원하는 황진이 시 한 수 읽어보게!

相思夢(상사몽)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2018년 10월 8일 07:58 황진이 보고 싶어...

친구에게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별난 소식이 왔기에 밥 먹으며 바로 답장했어요.




황진이 시라? 좋구먼. 운치가 있어. 가을의 정서가 자네 가슴에 충만! 달콤한 과육이 꽉 들어찬 과실 같으니 그 몸 고이 사모님께 바치고 사랑받으시게.

모처럼 훌륭한 친구 덕분에 몰랐던 황진이 시 읽는데 줄마다 찬탄이 쏟아지네. 자네가 보고 싶어 인터넷 검색해 찾아본 그 총명하고 화사한 황진이가 환생했다면 지금 어디에 살까? 누군가 그런 분을 곁에 모시고 다면 인생이 늘 불꽃처럼 작열할 텐데... 황-진-이 본 사람 증언 좀 들어 보게.


우리 마-님이 시는 짓지 않았어도 이국 저 멀리 서로 떨어져 살던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내게 연애편지 690통을 써 보냈는데, 그중에는 육성을 담은 카세트도 열 개나 되고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티슈에 적셔 봉지에 꼭 싸서 보낸 것도 있지. 이제 그 편지들이 서간집에 첩첩이 끼워져 서가에서 숨 쉬고 있네만 어쩌다 가끔씩 들춰 보면 아련한 향기가 그윽이 퍼져 가슴 깊숙이 파고드네.


자네 친구 중에 다시 난 황진이와 한 동네 사는 사람 있다는 거 몰랐지?

황진이 얘기 나오니 일전에 자네에게 적어 보낸 추억 백과사전에 추가할 항목이 또 있네. 중학교 2학년 때 학식 깊으신 국어 선생님께서 황진이 보고 상사병 나 죽은 총각 이야기를 해 주셨지. 총각의 관을 실은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나던 중 상여꾼들의 발이 땅에 붙어 꼼짝을 못 하자, 그걸 본 황진이가 속옷을 벋어 상여에 걸치고서야 겨우 발이 떨어졌는데, 그 죽음에 가책을 받은 황진이는 세상의 많은 사내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스스로 화류계의 꽃이 되었다고 말이야.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도 황진이 이야기를 하셨어. 국어책에는 안 쓰여 있지만 벽계수가 말 타고 가다가 멀리서 황진이 보고 말에서 떨어져 재수 없게도 땅에 박힌 돌에 머리를 찧어 까무러쳤다는 일화! 이게 황진이 무덤에 찾아가 술 붓고 시 한 수 읊고 나서 그로 인해 파직당한 조선시대 고위 공무원 임제의 시('청초 우거진 골에...')를 해설하시며 하신 이야기였지.


그때를 생각하니 언뜻 황진이가 벽계수 들으라고 지은 시조가 생각나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가 어렵나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감이 어떠랴?

이게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와는 좀 다르지만 라틴어로 된 격언 '카르프 디엠(오늘을 거두라)'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지. 우리가 이제 인생의 가을, 어쩌면 벌써 늦가을에 접어들었으니 '얼른 햇빛을 누려야' 할 것이네. 추운 겨울로 들어가면 아주 긴 잠으로 이어지니까 말이야.

이 가을에 각자 사모님을 부활한 황진이로 모시고 살면서 마음속에서 서로 왕래하며, 님 찾아 나간 두 마음이 꿈 길에서 만나 하나 되는 정경을 그려보세.

... 一時同作路中逢!


- 2018년 10월 8일, 마님 곁에서 아침 먹으며...


추신: 자네가 영화나 드라마에 황진이 역으로 나온 여배우 얼굴 보고 싶어서 인터넷을 누리다가 찾아낸 사진은 빼고 시만 보낸 걸 탓하지 않네만, 근무 시간 중에 인터넷 가지고 놀다가 부하직원들한테 들켜서 그로 인해 임제처럼 고위직에서 파면당하는 일 없기 바라네.




일전에 식탁에서 휴대폰으로 급히 적어 보낸 답장 다시 보니 덧붙일 게 좀 있네.


1. 상사몽


우선 황진이의 상사몽을 자의(字義)를 존중해 나름대로 직역했으니 자네가 전에 보낸 시문과 비교해 보게.

 

相思夢 - 사랑의 꿈 __ 작자: 황진이(黃眞伊)

相思相見只憑夢: 서로 그리워 만나는 곳 꿈속뿐인데
儂訪歡時歡訪儂: 정든 님 찾아가니 날 보러 나가셨네
願使遙遙他夜夢: 바라오니 어느 머나먼 밤 꿈을 부려
一時同作路中逢: 만나러 가는 길에 마주치게 해 주오
- 관련 한자 및 어구 해석-
只(다만 지): 오직 … 밖에 없다 憑(기댈 빙): 의지하다 儂(나 농): 당신, [옛시문]나 歡(기쁠 환): [옛말]사랑하는 남자 使(부릴 사): [… 에게]… 하게 하다 遥(멀 요): [시간, 거리]멀다 作(지을 작): [어떤 활동을]하다

一時同作路中逢을 인터넷에 보니 자네가 보낸 번역처럼 '동시에 출발하여' '오가는 길에서 만난다'는 걸로 해석된 게 많은데, 나는 '作'과 '路中逢'을 동사구로 해석해 '도중에 만나다'로 '一時同'은 '같은 시간에 함께'로 보고, 논리상 '만나다'는 '같은 시각에 함께'가 내포된 말이라 '一時同'과 합쳐 '마주치다'로 줄였네.


조선 중기에 기명(妓名)이 명월(明月)이었던 개성(開城)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黃眞伊)에 대해서는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고 그녀의 작품이 주로 연회석(宴會席)에서 지어져 기록에 남지 않은 게 많다네. 다행히 후세에 '청구영언' '가곡원류' '해동가요' 등 시가집에 기록되어 한시와 시조 몇 수가 전해온다 하는데, 자네가 보낸 '상사몽'은 어디에 수록된 건지? 혹시 알면 원전을 알려주게.


2. 카르프 디엠


카르프 디엠(Carpe diem)은 로마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ce, 기원전 65 - 기원전 8, 라틴어 명은 Quintus Horatius Flaccus)가 지은 시의 한 줄(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에서 따온 말이라네. 단어 carpe는 원래 소가 풀을 '뜯다', 꽃을 '따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carpere의 명령형이고 diem은 '날'을 의미하는 dies의 목적격이므로 carpe diem이 '오늘을 챙겨'란 뜻이 되지. 따라서 다음에 오는 말(quam minimum credula postero: 내일에 대한 믿음은 극히 줄이고)과 함께 '내일 일은 모르니까 오늘을 확실히 해'라는 뜻이야.


내가 전에 'Carpe diem'을 인용해 '얼른 햇빛을 즐기라'고 한 것은 '오늘을 챙기라'는 의미와 같네. 그렇다고 뭐 '내일은 해가 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미래의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오늘 취할 수 있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자'는 거지. 자네가 즐겨 듣던 존 레논의 대표곡 'Imagine'이란 노래 가사에도 나오잖아?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생각해봐(천당 지옥 걱정 없이)...


옛날에 마님이 나한테 690통의 연애편지를 써 보냈다고 했지? 믿을지 모르지만 그건 내가 보낸 750통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어. 그 편지들 중에는 당시 마님의 실연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내가 만화의 한 페이지를 본 따서 그려 보낸 것이 하나 있는데, 대만의 만화가 채지충(蔡志忠)의 선설(禪說)에 나오는 그 만화 속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일화가 주는 교훈도 'Carpe diem'이야.

 

- 만화 내용 - 1. 누가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 2. 절벽으로 도망쳐 덩굴을 붙잡고 올라 가는데, 3. 쥐들이 나타나 덩굴을 뜯어먹어, 4.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도중, 5. 산딸기를 발견하고, 6. 그걸 따서 맛을 즐겼다.
교훈: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이 순간을 아끼며 운명에 순응하는 게 복이야.


3. 행복한 꿈


자네가 보내 준 황진이의 시 한 수 덕분에 공부도 좀 했고, 내가 옛날에 마님에게 보낸 채지충 만화 그림 찾느라고 우리가 주고받았던 1500 통의 편지들도 다시 들춰 보았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내가 아주 젊었을 적에 절에서 탑돌이 하다가 만난 이국의 여인이 한국을 떠난 후에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써 보내는 것 밖에는 그리움을 달랠 길이 없었어. 휴대폰과 메일 등 전자 매체를 통해 감정을 즉각 전달할 수 있는 요즘에는 우표 붙여 수기 편지 보내는 연인들이 별로 없지?


어찌 보면 내가 옛사람이었을 때 지금 같이 간편한 통신 기기가 없었던 게 다행이었어.


보낸 편지가 언제 닿을까? 오늘은 편지함에 무엇이 들었을까?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해도 국제전화는 비싸서 자주 못 하고 밤늦도록 편지 쓰고 나서 자다가 어느 날 운 좋아 꿈에서 님 만나면 날 새고 며칠 지나도록 그 꿈이 머릿속에서 환상을 그렸던 그때! 상사몽(相思夢)만큼 행복한 꿈이 없었네.


이제 또 밤이 깊었으니...


- 2018년 10월 18일, 기다리다 잠드신 님 꿈길에 달려가 뵈옵기를...

꿈을 사진 찍을 수 있었더라면...

배경 사진은 프랑스 북동부의 호수 Lac-du-Der에서 이른 아침에 찍은 건데 그땐 안개 때문에 노루가 가까이 와 있는 걸 못 봤어. 꿈을 사진처럼 찍어 둘 수 있었다면 옛날 밤 꿈에 어두워 분간하지 못했던 님의 그림자를 아침마다 볼 수 있었을 텐데...


4. 기다림


옛날에 내가 님 그리던 마음을 잘 묘사한 노래 하나 들려 줄까? 제목이 '님이 오시는지'인데 황진이의 상사몽이랑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느낌을 주네.

님이 오시는지 - 김규환 작곡/박문호 작사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달빛 먼 길 님이 오시는가
갈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췰까/흐르는 물소리 님의 노래인가
내 맘은 외로워 한없이 떠돌고/새벽이 오려는 지 바람만 차오네

백합화 꿈꾸는 들녘을 지나/달빛 먼 길 내 님이 오시는가
풀물에 배인 치마 끌고 오는 소리/꽃향기 헤치고 님이 오시는가
내 맘은 떨리어 끝없이 헤매고/새벽이 오려는지 바람이 이네
바람이 이네


내가 한국에 살 때는 이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우연히 테너 김세일이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부터 여러 성악가들이 부른 노래들을 들으며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네.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른 '님이 오시는지'를 따라 부르기도 했는데, 악보를 구할 기회가 생겨서 노래불러 녹음하고 사진 합성해서 동영상으로 만들었으니 감상하시게.


아래 동영상(3분 52초)을 무작정 누르면 야한 소리가 나니까 꼭 이어폰을 끼고 혼자 보게.

길이 3분 52초,  유튜브에서는 검색이 안 되도록 조정했어요.

노랫말에 '들녘을 지나'를 '들녀클 지나'로 발음하는 게 옳다지만... 아직 젊은가?

국립국어원에서는 '부엌', '새벽녘'은 대체로 나이가 많을수록 [부어케], [새병녀클]과 같이 표준 발음으로 발음하는 비율이 높은 반면, '햇빛을'[핻삐츨], '꽃을'[꼬츨], '닻으로'[다츠로], '낯은'[나츤] 등은 나이가 어릴수록 표준 발음으로 발음하는 비율이 높았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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