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시작된 코비드로 인해 여러 모로 불편을 겪은 한 해도 어느덧 저물어 가네요. 지난 문자 메시지에 누나가 ”과거에 너무 묶여 살았다”라고 적은 것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바로 답할 게 아니어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과거에 대하여 -
태어난 이후로 우리의 삶이란 시간 위를 걷는 것이에요.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그 지나온 자취는 대개 시간과 더불어 흘러가 기억에서 천천히 지워지지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머릿속을 떠돌며 앞 길을 밝히기도 하고 기억에 어둡게 새겨져 생활의 걸림돌도 되지요.
짐승보다 사고력이 뛰어난 인간은 과거에 비춰서 현재의 처신과 미래에 대한 대책을 세우며 살아가는데,미래의 이정표인'과거'에'묶여 살았다'는 것은"뒤만 돌아보며 왔다"는 말 같네요. 지나온 길보다는 앞으로 갈 길이 더 중요한데, 왜 그랬을까요?
우리를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좋은 길로만 가고 싶은 욕망” 때문이에요. “과거에 달리 어떻게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는 "이미 지나온 거친 길조차 곱게 포장하려는" 지나친 욕망에 연결돼 있어서, 아무리"후회 없이 살리라" 다짐해도욕망이 있는 한 다시 생겨나 “과거에 묶여 살게” 되지요.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후회의 근원인 부적절한 욕망을 버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선 무엇을 후회하고 그 배후의 욕망이 무엇인지부터 구체적으로 이해해야겠어요.
남의 경우도 알면 도움이 되겠죠? 제 경우를 보면 청소년기에 생활이 궁핍했고 부모 사이에 불화가 잤아서 불안했어요. 성년에 이르러서도 부모와 가족에 대한 부양 책임이 큰 짐이었습니다. 제가 좀 더 재량이 있었으면, 경제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해서 가족 모두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텐데, 높은 학력을 가지고도 돈 벌려는 노력을 안 했던 것에 마음 꽤나 아팠지요. 불쌍한 가족을 제 때 구제하지 못해 느낀 측은함이나 훌륭한 자식의 도리를 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서 과거의 일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그 아쉬움 또한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의 꿈은 저명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는데가치관이 없었던 시절에 부푼가슴에 떠오른 신기루였으니까, 이제는 그걸 애써 쫓지 않을뿐더러못 이룬 꿈에도 미련 두지 않아요. 일상생활에 흥미를 가지고 건강 지키며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으니까요.
누나는 어떨까? 제가 남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청소년기에 같은 생활환경 속에서 살았으므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늘 싸우는 부모 밑에서 자라서 심리적으로 아주 불안했고, 부부 싸움의 원인이 경제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을 거예요. 친구들과의 우정에도 돈이 끼어들 때가 많았지요.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진짜 우정이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누나가 고등학교 다닐 때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학교에 다니던 반 친구를 측은하게 여겨서 집에 데려온 적이 있고, 대학에 다닐 때는 교통비도 없으면서 커피 마시고 다들 내기 싫어하니까 남들 커피값도 먼저 내주었지요.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부족하면서도 늘 남보란 듯이 돈을 잘 쓰셨고 그것으로 칭찬을 받으셨지만, 그만큼 없는 불편도 많이 겪으셨고 그 여파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미쳤어요.
어머니만큼 속상하진 않았지만, 형의 술주정도 지겨웠지요. 그런 형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나가 대학 입학할 때 어려웠던 아버지 대신 형이 첫 학기 등록금을 내주었습니다. 형 자신도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 포기하고 군대에 갔던 걸 평생의 한으로 여겼는데, 그런 형한테 등록금을 받았으니 무겁게 빚진 느낌을 떨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대학 졸업 후에도 우리는 한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했고, 시집간 후에도 손 벌리는 부모를 도와줘야 했으니까, 자신의 경제적 능력 부족에 대해 자책하고 우울하게 사신 듯합니다. 빚도 갚고 떳떳하게 남도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물심양면으로... 하지만 모든 것을 정도에 맞게 하기가 어려웠으니 마음 아팠겠지요?
누나가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아쉬워서 찾아오신 아버지 잘 대접해 주시고 어머니 생활비 보조해 드리며 오랫동안 병 수발해 준 덕분에 저도 마음 부담 많이 덜고 살았어요.
“과거에 너무 묶여 살았다"기에 누나가 과거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살기 바라며 적은 소견이 누나의 심정과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한 가지 예상 문답으로 봐주세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우리의 과거 속에 후회할 일도 많지만 잘 정리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꾸며 보면 어떨까요? 우리에게 더욱 귀한 재산이 되게...
그래요, “후회스러운 과거도 내 귀한 재산이니까...”
하룻밤 더 자면 새해가 옵니다. 과거의 연력도 하나 더 늘고요. 누나의 인생 이야기에도 우아한 문장들이 더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