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에세이
이 글은 제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 Chromatography에서 쓴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오후 두 시에 커피숍에 간다는 것은.
좋은 자리는 이미 다 포기했다는 것과 같다. 물론 좋은 자리라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자리는 보통 없는 경우가 많다.
느지막이 갑자기 커피숍에 나가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조금은 원망스러울 만큼. 이미 커피숍 안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점한 자리에 앉아 그들의 세계로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바깥 날씨 덕에 눅진해진 선크림으로 뭉친 땀이 인중에 조금씩 맺히는 것을 느끼며. 평소라면 앉지 않았을 창가 자리로 겨우 내 몸을 구겨 넣으면서도 좋은 자리에 대한 아쉬움이 에어컨 바람과 함께 가득 밀려왔다.
다행인지 다른 자리와 비슷하게, 섭섭지 않을 만큼 나를 식혀주는 에어컨 바람 밑에서. 속절없이 뛰던 심장 박동도, 내가 차지하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 대한 대한 갈망과 짜증이 섞인 내 마음도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창가 자리는 좁고 의자는 불편했으며 내가 원하던 머릿속의 계획은 조금 부서졌지만.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어디겠냐며 한숨을 내 인생만큼이나 가늘고 거칠게 몰아내고 나자. 그제서야 창밖의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뜨거운 여름의 향을 가득 담은 바람 덕에 나무의 잎들은 제멋대로 바람을 타고 출렁이고 있었다. 한참이고 그 어떤 규칙성도 없는 바람 파도에 빼앗긴 눈은 이제 나무의 흩날리는 머리칼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로 옮겨갔다.
웃는 모습 보다 찬란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
이제 갓 어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어깨 가득 실었지만, 아직까지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만큼은 버리지 못한 대학생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
희망과 포부로 자신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을 그 부드럽고 연한 초록빛의 봄 새싹 같은 인생들을 눈으로 훑고 있자니 그제서야 내 나이가 어느덧 서른을 넘어서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봄꽃이 시기할 만큼 아름다운 것을 말하라면. 나는 바로 그 봄꽃과 함께 기꺼이 꽃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새싹을 꼽을 것이다. 너무 얇고 여려 이미 그 시기를 지나 여름처럼 짙고 두꺼운 잎을 가진 내가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바스러질 것만 같이 연한 그것. 약하고 또 약하지만 앞으로의 남은 나날 동안 자신의 연약함을 채워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봄의 새싹. 그리고 그들 같이 구만리 같기만 할 인생.
갖고 온 책의 활자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걸음과 웃음 덕에, 나는 더위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얼굴과 마음에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은 지금 어디쯤일까.
아마도 내가 커피숍에 온 시간인 오후 두 시 같을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된 것들로 가득하고. 해버리고 싶은 것들은 다 해버려 이제 내 한 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두리번거리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만 같은 이 시기. 먼저 해버린 것들로 가득 찬 자리에 무언가를 다시 끼워 넣으려면. 그 자리가 제풀에 지켜 몸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시기. 한껏 여리기만 하던 새싹이 이젠 제법 두꺼운 여름 이파리로. 새파랗고도 제법 깊이를 갖춘 초록 잎으로 스스로를 꾸미기 시작하는 지금.
다 늦었다 생각하기엔 아직도 해는 쨍쨍 남아있고. 좋은 시절 따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엔 나의 이파리는 너무도 푸르며. 여리기만 해 속절없이 바람과 비에 울기만 해야 하는 봄의 새싹 시절은 코웃음 치며 그랬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남은 계절과 지나간 날들의 후회와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한 나의 마지막 초록을 마음껏 뽐내는 시기. 여름의 초록처럼 눈이 시린 시기.
어쩌면 스스로 모든 것이 늦었다고 어느새 단정 지으며 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를 위한 주인공 자리는 이제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도 했을지도 모르고. 이제는 슬슬 모든 것에서 소외될 일만 남았다며 내가 내 힘으로 차지한 좋은 자리조차 양보하려는 태도를 나도 모르게 취했을 수도 있겠지.
어느 자리에, 언제 앉든 내가 있는 곳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최선이며 최고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나는 스스로의 역할을 자잘한 것으로 바꾸려고 한 것만 같아 조금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변두리라고 생각했던 이 창가 자리마저. 막상 앉아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모험과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직 내게도 남은 팔만 리 같은 날들을 헐값 처분하려 했던 스스로가 참 바보 같아지는 오후 두 시다.
그리고, 인생의 석양이 오면 어떠한가. 밤이 오면 그것은 또 어떤가. 남은 인생에 비가 내리고 변덕으로 가득하더라도. 지금의 내 인생 마냥 짙은 초록처럼 쨍한 것이 그때 나를 다시 찾아올 텐데 말이다.
#크로마토그래피 #글쓰기 #감정고백 #심리 #색채심리 #위아크
[이 글의 TMI]
1. 아침에 오래간만에 늦게 일어났다.
2. 그리고 빨래하는 것을 까먹을 뻔했지.
3. 슈퍼 가는데 비닐봉지에 구멍 뚫어서 뒤집어쓰고 갈 뻔했다.
4. 김밥집이 나를 거부한다. 갈 때 마다 문 닫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