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 ;크로마토그래피]에세이
이 글은 제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 [크로마토그래피]에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색깔로 표현해보자는 주제에 맞게 쓴 글입니다. 저는 미혼이라 미래의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 보았습니다.
아빠는 달변가였다.
늘 내게 좋은 말만 안겨 줬다. 어릴 땐 그런 아빠가 내 마음을 긁지 않는 것 같아 좋았지만. 크면서 아빠의 그런 태도는 단지 그 순간만을 피하기 위한 말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도 치명적으로 달콤하고 믿어 의심치 못하게 하는.
그랬다.
아빠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막상 상황에 다다르면 피하기 일쑤였다. 빚쟁이 앞에서도, 엄마 앞에서도. 하물며 딸이나 아들 앞에서도 아빠는 그런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제가 꼭 해결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앞세워 사람 좋고 당당한 미소를 띠는 사람 앞에 그 누구도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나 역시 가족의 구성원이기에 가족 모두 조금씩 힘든 것을 나눠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하기까지 했다. 또래에 비해 조금 더 어른스러운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마치 실제로도 어른이 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고 펴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영원히 상처받은 채로 어른인 척하고 있다는걸. 맞지도 않는 어른 옷을 입은 아이인 채로. 아무리 어깨를 펴 보아도. 아무리 가슴을 쭉 내밀어보아도. 내가 아이라는 것을, 이 옷은 내게 맞지 않는 옷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참고 1)
비겁하고 옹졸한 아빠 덕에 나는 조금씩 사람과 사랑을 감별하는 학습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큰 옷을 입은 어린아이는 내가 아빠에게서 채우지 못했던 것을 상대방에게서 채우려고 했다. 마치 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이 큰 옷을 바꿔줄 수 있거나. 혹은 큰 옷에 맞도록 내 팔다리를 자라게 해줄 거라는 생각으로.
덕분에 나는 아빠와 비슷한 남자를 만나는 실수를 여러 번 해야 했다. 노을이 예뻐 전화를 하면. 늘 석양이 보이는 아파트를 사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남자들이었다.(참고 2) 거짓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믿고 싶었던 그 달콤한 말 한마디를 들으면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아빠에게 학습된, 플라스틱에 불과한 일회용 행복이란 걸 알면서도.
플라스틱들은 쓸 때야 편했지만. 하나같이 헤어질 땐 아빠처럼 수습이 너무 힘든 뒷감당들을 내게 떠넘기곤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겁했고. 하나같이 옹졸했으며. 헤어짐이라는,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서는 극한의 상황에서 나온 모습은 변하지 않고 똑같았다. 마치 아빠가 내 앞에서 그렇게 등을 보이며 도망친 것처럼. 그들은 우리의 문제에서 당당하게 도망 치곤했다. 내가 그런 도망침에 동조했으니 이런 뒤탈 들은 고스란히 내 몫이라는 듯이.
이미 여러 명의 "작고 어린" 아빠들을 내 곁에서 떠나보낸 뒤에야,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내게 맞지 않음을. 나는 아직 어린아이임을 인정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빠라는 태풍의 영향권에서 멀어지려 사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서 내리는 비가 아닌 더 많은 비는, 그것도 내가 원치 않는 비를 맞으며 우울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나는 충분히 빗속에서 덜덜 떨었고 나머지 인생만큼은 그 태풍 때문에 눅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참고 3)
아빠의 습기를 내 몸과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후의 연애는 오히려 순탄했다. 익숙한 아빠의 모습을 좇는 것이 아닌, 오롯이 내가 바꾼 나의 모습과 닮은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참고 4) 점점 연애도 생활도.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내 마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큰 시행착오는 없었다.
내게는 아빠라는 나쁜 본보기를 비춰주는 큰 거울이 있었으니까.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이 바로 내 생물학적 아빠였다. 온갖 오답이 적힌 노트 같은 사람.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들여다본 사람만이 내가 늘 틀리고 약해지는 부분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사람.
좋을 때는 옆에 누가 있더라도 모든 사람이 조금은 너그러워진다는 것도. 그렇기에 그 어떤 사람이라 해도 기분 좋을 때 웃는 모습에 혹하지 않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 역시 기분이 좋을 땐 그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내면에 숨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도 뜰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겉모습에만 힘을 준 깡통들도 쉽게 걷어찰 수 있었고, 석양 웅앵 아파트 어쩌고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들이키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나답지 않은 결정을 하는 횟수를 점점 줄여나갔다. 연애도. 삶에서도.
오답노트이자 태풍에게서 배운 것 중 가장 큰 것이 있다면.
마라톤, 혹은 전쟁에 비유되는 인생에서 내가 넘어졌을 때 함께 울어줄 사람이 아닌. 우는 나를 달래고 피가 흐르는 무릎에 처치를 해준 뒤 다시 달릴 수 있게 해주는 사람과 함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참고 5)
내가 비참하고 힘들 때도. 나를 잡아끌어 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해주는 사람. 이 지저분하고 진절머리 나는 인생과 일상을 절대 피하지 않고 함께 맞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서로에게 기꺼이 등을 보일 수 있는 신뢰가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지. 내가 그랬듯이.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눈에 비친 석양이 예뻐 전화를 하면. 석양이 보이는 아파트 시세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으면 프러포즈 하겠다는 소리 말고. 단지 나와 같은 석양 색으로 마음이 물들고 있는 사람과 언젠가는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당신과 내 마음에 남은 석양빛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날까지. 당신 역시 현재 치르고 있는 전투에서 묵묵하게 살아남아주기를 바란다. 아무 탈 없이.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에게 허락될 노을은 아직도 많으니.(참고 6)
참고 1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그 힘든 일을 모두 겪어내면서, 그리고 심리 모임을 하면서 정말 많이 나아졌음.'나'는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이며 가진 것에 상관없이 존재만으로도 훌륭한 일을 해 내고 있는 존재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역시 그러함.
참고 2
내가 더 많이 벌었다. 그리고 내가 살 집은 내가 산다. 깝침 ㄴㄴ
참고 3
가족이랑 문제가 있을 땐 떨어져 있는 게 상책입니다. 돈이 많이 나가는 거보다 마음 편한 게 장땡임.
참고 4
그런데 왜 자꾸 다들 일을 관두라 그럴까.
참고 5
친구 관계도 똑같다고 생각함. 무조건적인 동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가장 필요한 건 그 친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친구가 뛰던 레이스로 별 탈 없이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아프다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음.
참고 6
그러기엔 결혼 생각이 너무 없음.
[이 글의 TMI]
1. 요새 운동 너무 행복하게 잘 하고 있어서 허리가 안 아픔. 대신 다리가 아픔. 통증 돌려 막기인가.
2. 복숭아 시도하기 겁남.냉장고가 터져나가려고 함.
3. 쿠키런 킹덤 너무 재밌네ㅠ
4. 실제로 이상형은 없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상형이 되는 마법.
5. 코파운더 중 한 분이 결혼하면 우정이랬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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