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에는 힘이 듭니다.
수임료로 전 재산 받아본 적 있습니까.
영화 [재심]의 한 장면이다.(물론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비록 차비도 안 될 만큼의 적은 액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우(강하늘)의 억울한 마음만큼이나 구겨지고 남루한 지폐 몇 장은 결국 준영(정우)의 마음을 돌린다. 두 사람의 진심과 전재산(!)이 이끄는 결말 앞에서 나는 그 좋아하는 식사도 잠시 멈춘 채 눈물을 찍어냈었다. 유니콘 같은 존재인 인류애가 아직 남아 있음을 알리며 가뭄에 콩 나듯 메마른 마음에 물을 주는 것. 또한 이런 일이 언젠가는 내게도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품게 하는 것. 이런 점들이 아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의 나는. 인류애로 인해 마음이 적셔지는 쪽이 아닌, 이미 작년 가뭄 즈음에 말라 바스러진 죽은 콩에 가까웠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해야 하는 내겐 방 한 칸 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영화처럼 나도 전재산을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17:1로 싸웠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17에 속하는 사람이지 절대 1이 될 수 없음을. 내 체온으로 겨우 데워놓은 부동산의 가죽 소파에 앉아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돈으로?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공인중개사의 표정이 한동안 전두엽에 박혀서. 내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에 마치 인장처럼 박혀 아른거리곤 했다.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서울 생활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은 나를 그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눌러댔다. 병원 진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second opinion을 위해 다른 병원에 찾는다지만. 내겐 그마저도 사치였다. 그 어떤 부동산에서도 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곳은 없었으니까.
고스란히 내 마음에 박힌 냉정한 시선들은 하나하나 빼낼 때마다 내 손끝과 마음에 다시 한번 상처를 남겼다. 덕분에 나는 내 앞에서 신성한 음식이 식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던 식욕이 자취를 감추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제야 입꼬리를 겨우 한 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참 차가운 덮밥이었다.
전재산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상실감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직장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정말로 서울에서는 눈뜨고 코 베이겠구나.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한순간에 쓸모 없어진 나의 전재산은 다시 예금으로 돌아갔지만. 어째서인지 인출하기 전의 그 뿌듯함은 단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돈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고시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내겐 선택지도, 시간도. 그리고 돈마저도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묶여버린 내 금전 덕에(?) 실제로 고시원 한 달 입주 비용은 그때 당시 나에겐 전재산이 되어 있었다. 누가 영화 같은 기적이 일어나라 그랬지 이런 상황이 똑같이 일어나랬나.라는 생각에 또 한 번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고시원 총무에게 돈을 건네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영화 속, 그리고 실화 속 사람들은 참 용감했다는 것. 내 모든 것을 받아 든 총무는 이것이 내 전재산인걸 알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어떤 말을 할까. 하는 생각.
트렁크 두 개 남짓이 겨우 들어간 고시원은. 내게 인생에서 처음으로 전재산을 바친 그 무언가가 되었다. 좁고, 낮았으며, 답답한 것이. 딱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고시원에 입주한 날 먹은 김밥은 참 차가웠다. 그리고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