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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alogi Sep 28. 2024

얼어 죽은 로망;커피와 카펫

로망에는 힘이 듭니다


내돈 내산

어떤 나라에서는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죄수들에게도 주어지는 것. 그리고 이사가 확정되자마자 다가오는 나의 생일 선물로 스스로 찜해놓기까지 한 물건의 이름은 바로 커피머신이다


고시원 개인 냉장고에서 얼음을 얼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했던 나였기에. 내가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일종의 허상이자 로망이었다. 그러니 이사 비용으로 모아둔 일부분을 기꺼이 이 커피 머신을 사는데 할애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거나 힘든 결정은 전혀 아니었다.


늘 상상하고 꿈꿨다.

느긋한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 원두를 갈고 서툴게 커피를 내리는 나를. 작지만 소중한 내 집에서 조용히 잰 발걸음을 옮기며 집들이를 하듯 여기저기서 기웃거리는 원두 향을 맡는 내 모습을.


이렇게 고대하던 선물이 또 있었을까. 박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커피머신을 보며 나는 어쩐지 코끝이 조금 매콤해지기까지 했었다.


얼죽아 손드세요.

로망리스트에서 하나를 이루고 난 나의 주말들은 순조롭고 아름답다 못해 눈물이 날 것처럼 반짝거렸다. 매번 원두를 갈아야 하는 수고로움도. 커피를 내리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청소 타임도. 물들어버린 행주를 세탁하는 번거로움도.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을 서투르게 겨우 해내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내 미숙함 마저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고작 이 커피머신 하나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행복해질 수가 있구나.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띤 채로.


살인의 추억 아님. 사건현장 더더욱 아님

그리고 한창 스스로가 자아낸 단꿈에 젖어 있을 때. 참사가 일어났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늦잠은 내 손을 이끌어 댔고. 나는 덕분에 제대로 커피 추출구를 잠그지 못했다(라고 쓰고 몰랐다고 읽는다). 늦잠의 손길에 못 이긴 척 소파에 몸을 눕히자마자. 커피머신은 매정하게 내 로망을 뱉어냈다.


온전히 잠기지 않은 커피 추출구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아가버렸다. 동시에 마그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만 같은 온도의 원두커피와 물의 혼합물(?)은 가차 없이 내 하얀 카펫 위로 쏟아져 내렸다.


기왕 꾸미는 거. 이것도 로망이지. 라며 하얀 카펫을 고집스럽게 바닥에 깔았던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올라. 나는 한여름의 냉방비 고지서를 본 것 마냥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내 종아리 위로 떨어져 내린 용암의 뜨거움은 이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포, 혹은 스릴러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참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야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머리 숙여 사과할 타이밍이 되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소리 지르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커피 닦다가 저혈당 온 썰 푼다.

어떤 정신으로 이 참사를 수습했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난다 해도 스스로 지운 것에 가깝겠지.


이처럼 로망이란 건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핑크빛만은 아니다. 그 첫 번째 로망이 두 배로 박살 나는 것을 지켜보면서.(하얀 카펫+검은 원두의 습격) 앞으로의 로망이 깨질까 봐 걱정하기보다 나는 그래. 이게 맞지. 라며 깔깔거리고 웃을 수 있었다.(미친 거 아님)


나는 여전히 박살 난 꿈빛 구름들을 품에 안은 채 살겠지. 그러나 그것들이 바래지고 폭신함이 사라졌을 즈음엔 또 다른 구름을 자아내며 다시 한번 내게 맞는 구름을 띄울 노력을 할 것이다. 나의 실수들에서 아주 조금씩 내 설계도를 고쳐나간 뒤에. 원래 로망이란 게 한 번쯤은 얼어 죽어봐야 새로워질 수 있나 보다. 카펫은 못 돌리겠지만 말이다.



[이 글의 TMI]

아직 커피자국이 마르지 않았을 때, 탄산수를 부으면 커피 자국이 잘 지워짐. 다행히 집에 방황하던(?) 탄산수 두 병이 있어서 겨우 수습했음. 마르고 난 지금은 확실히 “거의” 다 지워졌지만 아직 미세한 얼룩이 남아 있음. 체력이 허락하는 때에  조만간 다시 한번 청소를 시도해 보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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