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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주중에는 부모님 집에서 보내고 주말은 항상 시우 집에서 잠을 잔다. 금요일 퇴근하고부터 월요일 출근할 때까지 시우와 함께 보내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주말에 같이 있자고 한적은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주말에 한 두 번 시우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 한 두 번이 세 네 번이 됐고, 세 네 번이 대 여섯 번이 되면서 언젠가부터 주말에는 아예 함께 지내게 됐다. 그러다 보니 지나가 주중과 주말로 나눠 두 집을 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는 것을 부모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다른 약속이 있는 주말에도 약속이 끝나면 부모님 집으로 가지 않고 시우 집으로 가는 것을 당연시 한다. 약속 장소가 부모님 집과 훨씬 가깝더라도 말이다.
어느 토요일 오전. 시우와 지나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지나가 평소 가보고 싶어했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시우가 늦게 일어나는 탓에 예정된 시간보다 삼십 분 정도 늦게 출발하게 됐다. 출발이 늦어져서 지나는 화가 많이 났다. 차를 타고 백화점에 가는 동안 시우에게 계속 짜증을 낸다. 여러 차례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지나의 기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점심에 가기로 한 식당이 워낙 유명한 곳이라 늦게 가면 많이 기다려야 하는 것이 지나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십 분, 이십 분 차이로도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쇼핑을 조금 서둘러서 마쳐도 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식당에서 조금 기다리면 되지 않나? 설사 많이 기다린다고 한들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쩌겠는가, 그냥 오래 기다렸다 맛있게 먹는 수 밖에. 둘이 사귀기 시작하고 시우 탓으로 계획이 잘못 되거나 약속이 늦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시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면서도 속으로는 삼십 분 늦게 출발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싶다. 요즘 들어 지나는 별거 아닌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짜증 내는 상황이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벗어 날 때가 많은 최근이다. 그런 모습이 시우를 혼란스럽게 한다.
주말이어서 백화점에 사람들이 많다. 명품 매장 입구는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다. 다들 멋지게 꾸민 모습이다. 그들을 보니 시우는 급하게 나오느라 너무 대충 입고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운동화 하나로 시우는 쇼핑을 끝냈고 지나를 따라 백화점 구석구석을 다닌다. 지나가 옷을 입어 볼 때마다 기계적으로 적절한 칭찬을 던진다.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하고 지루함도 달랠 겸 지나가 요즘 왜 예민할까 생각해 본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시우의 집 위층에 사는 부부에게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는 아들 둘이 있다. 그 나이 대 남자 아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조용하게 노는 편이라고 시우는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이다 보니 당연히 뛰어다닐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 정도는 이웃 간 허용 가능한 범위 내의 소음이라고 시우는 생각한다. 어느 늦은 토요일 밤에 천장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 이 분 정도 되었을까, 아주 잠시였다. 아이들이 잠깐 뛰다가 부모에게 주의를 받고 멈춘 게 아닌가 싶었다. 거실 소파에서 책을 읽던 지나는 그 잠깐의 소리에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늦은 밤에 예의가 없네, 애들도 문제지만 부모가 더 문제라면서 바로 윗집에 찾아갈 기세였다. 시우가 진정시키며 말리니 지나는 더 크게 화를 냈다. 아무 소리 안 하니까 저렇게 해도 되는 줄 아는 거라며 시우에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런 지나의 모습을 보고 시우는 윗집에 가서 주의를 주고 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다. 하지만 그만한 일로 윗집에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그냥 아파트 계단에서 오 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한 동안 아이들이 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이들이 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뛸 때 집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건 알 길이 없다. 지나는 그거 보라며 제대로 주의를 주니까 아이들이 조용해지지 않느냐고 했다. 그 전에는 아이들이 그 날보다 더 뛰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던 지나였다.
쇼핑을 마치고 지나가 가고 싶어하는 식당에 왔다. 강북 어딘가에서 아주 유명한 한식당이고 얼마 전에 청담동에 분점을 열었다. 시우는 처음 들어본 식당이다. 이십 분 정도 기다린 후 좌석을 안내 받았다. 걱정했던 것 보다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 다행이다. 지나를 보니 기다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눈치다. 오히려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돼 보였다. 지나가 이미 인터넷으로 검색해 놓은 인기 메뉴로 이것저것 시켰다. 둘이 먹기에는 조금 많은 듯한 양의 음식이 나왔다. 먹어보니 하나같이 다 맛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으로 맛있다고 지나에게 말했다. 지나는 먹는 동안 계속 너무너무 맛있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시우는 지나의 맛에 대한 표현이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의 표정은 인위적으로 보였다. 음식은 분명 다 맛있었고 충분히 유명해질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시우가 느끼기에 지나의 과장된 표현만큼은 아닌 것 같고 오래 기다리면서까지 꼭 먹어야 할 정도도 아니다 싶었다. 지나는 다른 음식을 더 시키자고 했고 시우는 배가 불러서 다 먹을 수 없을 거라며 말렸다. 그래도 꼭 시켜야겠다고 지나는 고집을 부렸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맛이라도 봐야 한다는 식이었다. 시우는 어렵게 오긴 뭐가 어렵게 왔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냥 백화점에서 차를 타고 오 분 정도 걸려서 왔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메뉴 두 개를 더 시켰다. 배가 부르다면서도 지나는 잘 먹는다. 추가로 나온 음식을 남김 없이 다 먹었다. 지나는 평소 맛있는 음식을 적당량 즐기는 걸 좋아하지 절대로 과식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렇게 많이 먹는 건 처음 본다. 시우는 이런 지나의 이런 모습에 매우 놀랐고, 단순히 배가 고프거나 더 먹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석 달 전에는 지나가 친한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툰 적이 있었다. 책 한 권을 샀는데 친구가 읽고 싶다고 해서 지나가 읽기 전에 빌려준 모양이다. 그런데 친구가 바빠서 그랬는지 책을 다 읽지 못해 제때 돌려주지 못했다. 주기로 한 날보다 한 달이 지나도록 돌려주지 않자 그 친구와 전화로 싸웠다. 아직까지 화해도, 연락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다. 결국 같은 책을 다시 샀다. 그 당시 시우는 흔하게 있는 친구 간에 다툼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소한 일로 너무 크게 다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는 책을 사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인다고 말할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친구와 연락을 끊을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생각할 수록 지나는 확실히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시우와 지나 사이도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다. 서로 못 느끼는 사이에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소원해 졌다. 지난 몇 달 지나가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이때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회전한다. 지나의 과거가 계산됐다.
강변북로 추락 사고로 큰 수술을 받은 후 치료와 재활을 거쳐 회복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예후가 좋았더라도 수술과 치료 과정은 생사를 오가는 사투와 다름 없었다. 의사의 긍정적인 견해에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견뎌야 했다. 그때 지나는 변함없이 시우와 함께 했다. 시우가 입원해 있는 동안 퇴근하고 병원을 찾는 날이 많았고 퇴원 후 통원 치료 받는 날은 휴가를 내고 병원에 함께 가기도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곁에서 시우의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사고 초반에 온 몸이 다치고 뇌 수술까지 한 시우가 불구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불구가 되는 모습이 자꾸 상상이 됐고 그 상상은 지나의 머릿속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될 경우 지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시우를 만난 이후 꾸준히 다른 남자들로부터 유혹이 있어 왔다. 지나에게 호감을 갖은 사람 중에는 매일 보는 직장 동기도 있다. 하지만 지나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가끔 시우에게 주위에 그런 남자가 있다는 것을 언뜻 내비친 적이 있지만 시우는 지나를 믿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심해 보이는 시우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우가 병원에 있는 동안 지나는 그런 유혹에 흔들렸다. 흔들릴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나는 사람이 있더라도, 결혼을 했더라도 누구든 이성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다. 그런 감정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라고, 결혼한 사이가 아니어서 흔들릴 수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죄책감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흔들리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도덕적 강박이 머릿속에서 지나를 괴롭혔다. 스스로 생각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시우가 빠르게 회복하면서부터 이상하게 주위의 유혹도 사라졌다. 어쩌면 유혹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시우는 평생 함께하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흔하지 않은 사람이다. 좋은 환경에서 바르게 자랐고, 좋은 학벌에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교수이고, 그만하면 외모도 크게 빠지는데 없이 준수한 편이다. 강남에 자기 집도 한 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우와 지나는 다른 점이 많다. 관심사도 많이 다르고 함께 할 취미도 별로 없다. 시우와의 섹스는 즐겁긴 하지만 아주 쾌락적이지는 않다. 사고 이후에는 관계를 갖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 들었다. 하지만 지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시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시우와의 관계에 권태로움을 느낀다. 시우가 아플 때 옆에 있던 시간이 지치게 만들었을까, 만난 지 오래 돼서 너무 익숙해진 걸까,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다름 때문일까, 아님 좋아하는 마음이 식은 것일까. 이유를 모르겠다. 사소한 일에 예민해지고 쉽게 화가 난다. 알면서도 감정 조절이 안 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우울함이 지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가장 슬픈 건 삶에 어떤 기대감도 없다는 것이다.
사고를 당해 치료받는 동안 다른 남자들의 유혹에 지나가 흔들렸다니. 시우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는 금새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면 화를 낼 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흔들렸지만 지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입장 바꿔서 보면 연인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유혹에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고, 유혹에 넘어가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세상에는 많은 유혹이 있고 그 유혹을 완전히 피해가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매력적인 지나에게 그런 유혹이 따르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선택은 철저히 지나의 몫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그것은 지나의 자유이다. 시우는 자신을 선택한 지나가 고마웠다. 권태로움을 탈피하기 위해 적절한 긴장감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을 갔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백화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만간 지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야다겠고 시우는 생각했다.
둘 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 중에서 고민하다가 하와이에 가기로 했다. 시우는 석사, 박사를 하는 동안 미국의 여러 지역을 가봤지만 하와이는 이번이 처음이다. 멋진 해변, 야자수 나무, 훌라 춤, 노래 알로하 오에, 하와이안 의상 정도 떠오르는 것이 하와이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영화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를 보고 언젠가 하와이에 가보면 좋겠다고 스치듯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여행지를 결정하고 나서 시우와 지나 두 사람 모두에게 하와이에는 권태로움을 치유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지나와 시우는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렌터카를 타고 호텔로 왔다. 호텔은 와이키키 해변에 바로 붙어있고 27층에 전망 좋은 룸으로 사전에 예약했다. 두 사람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거운 짐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창가로 직행했다. 베란다 없이 큰 유리로만 되어있는 창이다. 밖으로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과 먼 바다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고개를 숙이니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서핑 하는, 요트를 몰아 물살을 가르는, 모래사장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개미 만하게 보인다. 지나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빨리 밖으로 나가자는 눈빛을 시우에게 보낸다. 서둘러 씻고 짐을 풀고 옷을 갈아 입은 후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 근처 거리와 해변을 무작정 돌아다닌다. 지나는 하는 것 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난다. 살짝만 뛰어도 저 높은 하늘 끝에 닿을 것 같은 기분이다. 같은 미국이지만 시우가 살았던 뉴저지와 이곳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있었던 서울하고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한 마디로 시우에게 하와이의 첫인상은 낯섦이다. 이 곳과 서울의 위도 차이로 햇빛이 떨어지는 각도가 달라서 일까? 따갑게 내려 쬐는 햇살부터 낯설게 느껴진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파스텔블루 빛 바다도, 끝이 어딘지 모를 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도, 저 멀리 수평선에 닿은 뭉게구름도,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 모양의 삐쩍 마른 야자수도, 낙원으로 날려 줄 것만 같은 훈훈한 바람도, 다양한 모습과 얼굴 속에 담긴 여유로운 표정도, 멀리서도 눈에 띄는 커다란 트로피칼 패턴도, 새빨간 헤어스타일을 뽐내며 하늘을 나는 홍관조도. 일일이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모두 낯설다. 지금 여기서 가장 낯선 것은 지나의 모습이다. 인천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부터 지나의 표정은 마치 입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며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 같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어 보인다. 이번 여행을 위해 지나는 하와이안 드레스를 샀다. 다른 색, 다른 패턴, 다른 스타일로 총 세 벌을 샀다. 저녁을 먹으러 갈 때마다 지나는 하와이안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하와이안 드레스를 입을 때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드레스를 입고 해변을 거니는 지나의 모습은 시우에게 낯섦 그 자체였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모습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킴 노박이 연기한 주디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 녹색 원피스를 입고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유령처럼 다니는 주디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시우는 대학교 일 학년 때 우연히 <현기증>을 봤다. 심한 노출이나 야한 장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디라는 인물은 시우에게 매우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주디가 입은 녹색 옷이 만들어 내는 가슴 모양이 성적인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 주디에게 느낀 그 관능적 매력이 하와이안 드레스를 입은 지나의 모습으로 재현된 듯하다. 지나와 시우는 노을 지는 해변을 걷고 있다. 바람이 분다. 그러자 품이 큰 드레스는 지나의 몸에 바짝 밀착됐다. 밀착된 얇은 옷감은 지나의 봉긋한 가슴과 굴곡진 몸매를 모양 그대로 내보여 준다. 마치 주디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그보다도 더 관능적이다. 지나는 평소 세련되게 옷을 잘 입는 편이지만 노출이 있는 옷을 즐겨 입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모습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 동안 지나와 사귀면서 많은 밤을 함께 보냈지만, 손만 잡고 걸어가는 이 순간이 그 어떠한 밤보다 시우에게는 훨씬 더 육체적이다. 지나의 몸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하늘한 천이 빚어내는 그녀의 몸은 어느 때보다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나와 시우는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섹스를 했다. 첫 날부터 서로를 매우 격렬하게 원했고 떠나는 날까지 그 격정은 계속 됐다. 두 번째 밤 시우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도착적인 상상이 떠올랐다. 호텔 방밖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상상을 문득 하게 됐다. 시우는 호텔 방의 창가로 지나를 이끌었고 창 밖으로 해변가를 거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섹스를 즐겼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낯설어 보이는 지나와 함께한 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극적이다. 첫 번째는 불을 끄고, 두 번째는 희미한 조명을 켜고, 세 번째는 좀 더 조명을 밝히고, 네 번째는 더 더 밝히고. 밤의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이 27층 높이 방이 더 잘 보이도록, 갈수록 과감해졌다. 섹스 도중 창가로 이끄는 시우의 행동은 지나에게는 가히 돌발적이었다. 왠지 싫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 한 자극이고 자신도 모르는 몸 안에 숨겨 진 감각을 깨우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나도 저 아래 개미만한 사람들이 파격적이고 과감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 흥분됐다. 강렬한 자극이 휘몰아치는 뜨거운 하루하루였다.
하와이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 지나와 시우는 바다 위에 뜬 밝은 달을 보며 해변에 앉아있다. 시우는 지나에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계획된 프러포즈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이벤트도 없었고 반지, 꽃 같은 선물도 준비가 안됐다. 지나는 여행 내내 보여준 커다란 미소와 함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하와이에는 권태로움을 치유하는 힘이 확실히 있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낯섦일 것이다. 그 낯선 세계로 인도해 준 것은 과거가 계산되는 능력이라고 시우는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