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다, 기대하다 5

by 킥더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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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계산되는 일은 계속 일어났다.
중학교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는 거였고 시우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졌던 친구였다. 얼굴을 보자 마자 누군지 한 번에 알아 보았다. 그 친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어렸을 적 일이고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없기에 서로 반갑게 인사했고 여러 친구들 속에 섞여 자연스럽게 몇 마디 대화도 나누었다. 처음에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친구가 시우에게 시비를 걸어서 다투게 되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해서 일어나면서 사이가 완전히 멀어졌다. 시우는 그때 친구가 왜 그랬는지 궁금해졌고 오래 전 과거가 계산됐다. 시우는 하교 후 자주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놀고는 했다. 그 친구도 시우의 집에 자주 왔었다. 어머니가 퇴근하고 집에 올 때까지 노는 날이면 어머니는 늘 간식거리나 저녁을 친구들에게 챙겨 주었다. 시우는 친구에게 너희 집에도 놀러 가자고 말했다.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기억에는 전혀 없다. 시우는 여러 번 말했다. 그 당시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웠던 친구는 시우의 새 아파트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자신의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너희 집에도 놀러 가자는 시우의 말이 너무 싫었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시우의 요구가 짜증난 친구는 별거 아닌 걸 빌미로 다툼을 벌였다. 그래서 둘 사이는 멀어졌고 그 이후로 시우는 그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됐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충격적이다. 악의 없이 무심코 한 말이 친구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시우는 마음 속으로 친구에게 깊이 사과했다.

학기가 끝나가는 어느 날,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한 명이 약속도 없이 시우를 불쑥 찾아왔다. 그 학생은 기말고사 점수가 잘못 됐다며 점수를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시우는 조교에게 답안지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잘못된 게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채점에 오류는 없었고 문제가 없음을 분명히 설명해 줬다. 학생은 받아들이지 않고 점수를 더 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나름대로 논리를 폈다. 시우가 듣기에 학생의 논리는 가당치도 않았다. 다시 딱 잘라 문제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 학생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기말고사 점수가 조금만 높아지면 학점을 A에서 A+로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번에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수업에서 A+를 받은 친한 후배와 합의 하에 자신의 학점과 그 후배의 학점을 바꾸면 안되겠냐고 묻는 것이다. 시우는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미 후배와는 얘기가 다 끝난 상태이고 교수님만 허락해 주시면 된다는 거다. 시우는 지금 자신과 학교를 모독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거라며 크게 화를 냈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학점을 오히려 깎겠다고 소리쳤다. 교수가 화를 낼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학생은 많이 당황해 했다. 몹시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교수실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시우는 학생이 돌아간 뒤에도 쉽사리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A도 충분히 잘 했는데 굳이 저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A+를 받으려는지 이해가 안됐다. 그 순간 학생의 과거가 계산됐다. 학생은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위로 누나 한 명이 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매우 바빠서 어릴 때 누나와 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자식에게 아주 엄격한 사람들이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크고 칭찬에는 매우 인색했다. 학생은 부모님께 더 잘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으면서 자랐다. 누나는 어릴 때부터 어느 정도 부모님 기대에 부응도 하고 인정도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학생은 그러지 못했다. 칭찬은커녕 작은 실수로 혼나기 일쑤였다. 의대에 다니는 누나에 비해 수학과인 학생은 집에서 못난이 취급을 받는다. 엄격한 부모님과 특출한 누나 밑에서 기댈 공간도, 숨 쉴 여유마저 없다. 성장하는 동안 인정욕구만 강해졌다. 시우는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학생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크게 화를 내서 학생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우는 학생의 답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사소한 오류 몇 개를 제외하면 매우 훌륭한 답이고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창의적인 면만 따져보면 A+ 받은 학생들의 답보다 높이 살만한 부분도 있다. 학생에게 화만 내고 비록 아쉽게 A+를 못 받았지만 창의적이고 훌륭하게 문제를 잘 풀었다고 칭찬하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이처럼 과거가 계산되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잘 아는 사람, 오래 알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럴 경우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즉흥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오해와 불신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우는 과거 계산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이 그러한 이유를 알게 됐고 누군가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헤아리게 됐다. 그러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어떠한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과거 계산은 현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혔고, 그 이해와 공감은 미움, 시기, 분노 같은 적대적 감정을 마음에서 밀쳐낸다. 이상하리만큼 평온하다. 오랜 수행 끝에 복잡하게 얽히고 얽힌 세상을 선명하게 꿰뚫는 이치를 깨달은 현자의 마음이 이런 걸까?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과거 계산은 원할 때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시우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맑은 하늘에 번개 치듯 머릿속에서 벌어진다. 일부러 할 수도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다. 그리고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그 것은 바로 미래를 계산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보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더 평온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분명 도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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