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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렸을 적 친구인 정태우가 학교로 찾아 왔다. 태우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다. 대학도 같은 스카이 대학에 진학했으며 시우는 수학과 태우는 경영학과를 다녔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성향이 많이 다른 편이었다. 시우는 차분한 성격에 몇몇 친구들하고만 친했던 반면, 태우는 활달하고 여러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그 당시 태우 집은 엄청나게 부자였다. 태우 아버지는 의류사업을 크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집이 잘 사는 친구들은 티가 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친구 집이 얼마나 부유한지는 알 수가 없다. 학생들이 그런 거에 큰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저 저 친구 집은 잘 사나 보다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부러워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당시 모든 친구들이 태우 집은 특별히 잘 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태우가 유독 자랑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태우는 방학만 되면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지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면 방학 동안 있었던 LA, 샌프란시스코, 뉴욕 같은 도시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는 했다.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친구는 있었겠지만, 방학 마다 그 기간 내내 미국에서 지내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태우 아버지는 미국 프로 스포츠 매니아여서 MLB나 NBA 경기를 관람하러 미국에 가고는 했다. 고등학교 일학년 아니면 이학년 때였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MLB 월드시리즈를 보러 갔다고 태우가 친구들에게 자랑한 적이 있었다. 자신도 가고 싶지만 학기 중이고 공부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고 많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서 아버지가 직접 찍은 뉴욕 양키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월드시리즈 경기의 사진을 학교로 가지고 와서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다이아몬드백스에는 한국인 선수가 뛰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MLB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거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이 컸던 경기였다. 많은 친구들이 사진을 돌려보며 부러워했고, 시우도 멋진 양키스 스타디움과 TV에서나 보던 유명 MLB 선수들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마냥 신기했다. 미국 사람들조차 티켓을 구하기 어렵다는 MLB 월드시리즈를 보러 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매년 한 두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다는 건 더 놀라웠다. 시우 부모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우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녔고 어머니는 공무원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경쟁이 치열한 정글 같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다. 어머니의 가장 큰 바램 중 하나는 아버지가 최대한 직장을 오래 다니는 것이었다. 성실하고 검소한 부모님 덕분에 시우도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렇다고 방학 때마다 미국에서 지낸다거나 아버지가 스포츠를 관람하러 해외로 간다거나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태우는 그 외에도 많은 걸 자랑했다. 그런데 그런 자랑을 친구들이 듣기 전혀 거슬리지 않게 대화 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재주가 태우한테는 있었다. 간혹 재수없게 바라보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시우가 아는 한 대부분 태우를 좋아했다. 시우와 태우 둘 다 중고등학교 내내 전교 최상위권에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서로 다른 점이 많았음에도 공부를 잘 하는 연결점이 있어서인지 꽤 친했다. 태우는 대학교 이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고 제대할 때 즈음에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할 정도로 경제상황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졌다. 태우는 대학을 다니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만 했다.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거기서 버는 돈으로는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어느 날부터 태우는 호스트바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거기서 계속 일했고 돈도 꽤 많이 벌었던 것으로 안다. 호감 가는 인상에 훤칠하게 큰 키는 남의 시선을 끌 정도로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바닥에서는 나름 경쟁력이 있었을 거다. 태우는 호스트바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주위 친구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도 말이다. 오히려 큰 돈을 벌 수 있다며 시우에게 같이 일하자고 권하기까지 했다. 시우는 자신은 못할 것 같다고 거절했다. 태우와 같은 상황이었어도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선택은 못했을 것이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는 자신만의 성적 판타지가 숨겨져 있고 현실의 욕망과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말을 태우가 한적이 있었다. 호스트바에서 일하면서 얻은 깨달음이라면서.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태우로부터 들었을 때 당시 대학생이었던 시우에게는 마치 다른 세상 얘기처럼 들렸다. 한번은 거기서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 보았다. 태우는 힘들기도 하지만 재미있을 때도 있고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좋다면서 만족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상황에 빠르게 적응한 태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태우는 그 일을 바로 그만뒀고 증권회사에 취업했다. 직장을 몇 번 옮긴 후 지금은 외국계 투자은행에 다닌다.
시우와 태우는 시우의 교수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시우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서로 만날 수가 없었고, 한국에 와서도 일하느라 바빠서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보는 게 전부였다. 오랜 만에 만나는 거여서 이런저런 할 얘기가 많다. 태우는 몇 달 후면 지금 다니는 투자은행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암을 진단하는 시약과 장비를 개발하는 바이오 사업을 준비 중에 있다고 했다. 엑소좀(exosome)에 대해서 아냐고 시우에게 물었다. 시우는 처음 들어봤다고 말했다. 그러자 태우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설명한다. 생체액에서 종양을 유발하는 엑소좀을 선택적으로 추출해 암을 진단하는 바이오 기술이 있다고 한다. 아직은 연구 중에 있기는 하나 거의 개발 완료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 진단 기술은 조기 검진이 가능하고, 진단 시간도 짧고, 검사 비용도 저렴하고, 오진율도 매우 낮고, 비침습적인 검사로 환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차세대 혁신적인 바이오 기술이라는 설명이다. 시우는 생명공학이나 생화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태우의 설명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얼핏 듣기로는 세상에 이보다 좋은 기술이 없는 것 같다. 인터넷으로 엑소좀을 검색해 보니 한국말로 진유전체라고 나온다. 최근 엑소좀이 바이오 업계에서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 것 같고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기 위해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잘은 몰라도 검색 결과로는 아이템을 잘 잡은 것처럼 보였다. 태우는 아직은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이 기술의 권위자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생명공학 교수가 참여할 거라고 했다. 그 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 상당수가 졸업하면 창업한 회사에 들어와 함께 일하게 될 거라고도 했다. 그 교수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협력 관계에 있는 미국 아비리그의 한 대학 연구소와도 기술협정을 맺을 예정이라고 한다. 시우는 어느 대학의 어떤 연구소인지 물었다. 아직은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중이라 학교와 연구소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이미 벤처캐피털로부터 상당히 큰 규모의 투자 유치를 했고 투자기관을 더 알아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우는 좋은 아이템 같으니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태우에게 지나치게 형식적인 말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다른 해줄 말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태우는 갑자기 시우에게 투자 권유를 했다. 이억 정도 투자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다. 시우가 생각하기에는 개인이 투자할 그런 수준의 사업이 아닌 듯 보여서 이미 큰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는데 왜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지 물었다. 태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벤처기업이 성공하게 되면 동업자나 대주주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자신의 우호지분을 조금이라도 미리 확보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에게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시우에게 지금 투자를 해야지 더 많은 지분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향후에 상장하게 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단다. 분명 크게 성공할 아이템이라고 태우는 확신하듯 말했다. 시우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결국 자신이 준비 중인 사업에 투자 명목으로 돈을 보탤 생각이 있냐고 묻는 거 아닌가? 결국 한 푼이라도 더 끌어 모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 마치 너 돈 벌게 해주려는 거야, 널 위해서 얘기하는 거야, 하는 이런 식의 태도가 매우 실망스럽다. 시우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떠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그냥 하지 않겠다고 했다. 시우의 거두절미한 모습에 태우는 많이 당황했다. 정말 아까운 기회라면서 다시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시우는 말을 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번에도 어떠한 이유도 대지 않았다. 태우는 실망한 기색으로 정말 돈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면서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시우는 교수실을 나가는 태우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자신에게까지 찾아와서 투자하라고 하는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이때 머릿속에서 회로가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고 태우의 과거가 계산됐다. 태우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고객의 돈을 유용하여 개인적으로 투자를 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한 삼십억 정도 되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대출도 받고 주변에서 돈도 빌리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메울 수 있는 손실 규모가 아니다. 여의치가 않자 태우는 투자를 유치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됐다. 그렇다고 태우가 말한 바이오 사업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조금 전에 말한 생명공학 박사와 함께 사업을 하자고 구체적으로 논의 중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우에게 말했던 것처럼 투자를 받고 창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단계는 전혀 아니다. 태우는 창업하게 되면 시우에게 진짜로 지분을 줄 생각이다. 그렇다 한들 태우의 투자 권유는 횡령한 돈을 급하게 메우기 위한 사기에 불과하다. 과거 계산을 통해 친한 친구가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다는 사실에 시우는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난다거나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다. 이런 상황이면 태우를 향한 분노가 생길 것도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 태우의 행동이 오히려 이해가 된다. 태우는 만날 때 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그때 살았던 넓고 좋은 집에 대한 얘기를 반복해서 했다. 언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집을 다시 사서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태우가 살던 곳은 웬만큼 높은 연봉을 받아서 살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집이 아니었다. 태우의 연봉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걸로는 과거에 누렸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태우는 과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 욕망이 고객의 돈에 손을 대는 부도덕한 선택을 하게했고 친구에게 사기까지 쳐야만 하는 상황으로 태우를 내몰고 말았다. 시우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좋은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과거를 계산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태우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미워하는 마음만 남았을 것이다.
몇 년 후 태우가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