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다, 기대하다 9

by 킥더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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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계산되는 일은 계속 됐다.
하루는 사촌동생이 갑자기 찾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다. 못 본지가 거의 이 년도 더 된 듯 하고 그 동안 연락한 적도 없다. 나이가 시우보다 한 살 어린 이종사촌이고 이름은 이현수이다. 현수와는 어릴 때부터 쭉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심지어 같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 다른 사촌들 보다 더 친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 이후로는 학교도 다르고 서로 바빠지면서 자연스레 자주 못 보게 됐다. 거기다가 집안 어른들이 연로해 짐에 따라서 전 보다 친척 간 왕래가 줄어들면서 더더욱 만날 기회도 줄었다. 현수는 대기업 계열 식품 회사를 꽤 오래 다니다가 몇 년 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다. 치즈를 가공하고 생산하는 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얼핏 들었다. 근처 지나다 형 생각이 났다며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전화했다고 한다. 시우는 마침 수업이 없었고 급하게 마무리 할 일만 끝내면 되는 상황이라 현수에게 근처의 괜찮은 카페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던 일을 서둘러 마치고 현수가 기다리는 카페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카페 문을 여니 구석 자리 한편에 앉아 있는 현수가 보였다.
"현수야. 오랜만이네." 시우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게. 형 진짜 반갑다."
시우와 현수는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해서 주문했다. 시우는 카페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넸다.
"형 내가 살게." 시우의 카드를 막으면서 현수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네가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사야지."
"아니야. 교수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형은 그냥 돈 아껴. 내가 살게." 현수가 매우 다정하고 살가운 태도로 말했다
커피 두 잔에 교수 월급이 얼마나 되냐, 돈을 아껴라, 하는 말이 시우에게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 말을 굳이 왜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사업이 잘 돼서 허세를 부리나 싶었지만, 허세 부리는 뉘앙스는 아닐뿐더러 원래 허세를 부리거나 하는 그런 성격도 전혀 아니다.
시우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입으로 불어가면서 조심스럽게 마신다. 현수는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시고 너무 진해서인지 시럽을 조금 넣었다.
“시럽 넣을 거면 아예 다른 거 시키지 그랬어? 달달한 걸로.”
“아니야. 아메리카노에 시럽 넣어서 마시는 거 좋아해.” 현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잘 돼?”
“사업은.. 처음에는 부침이 많았는데 지금은 자리잡아 가고 있는 중이야.”
“오, 자리잡아 간다니 너무 다행이다. 주위에 보니까 사업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닌 것 같더라고. 시작한지 얼마 안됐는데 너 진짜 대단하다.“
사업을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는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들어보니까 사업이 쉽지 않다는 게 더 확 와 닿는다. 그런데 불안하고 그런 건 없어?” 시우가 물었다.
“당연히 불안하지. 사업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안 돼도 불안, 잘 돼도 불안하다고. 지금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야. 위험과 기회는 늘 붙어있는 거니까 큰 기회를 잡으려면 그만큼 위험 부담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 같아.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게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맞아.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
성인이 되고 난 다음에 자주 못 봐서 그런지 현수가 어릴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현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멋쩍게 의자 옆에 놓여있던 쇼핑백을 시우에게 건넸다. “형, 이거 별거 아닌데 형 주려고 산 선물이야.”
“선물?” 현수를 쳐다보며 왠 선물인지 눈빛으로 물었다.
“얼마 전 형 생일이었잖아. 여기 학교 근처에 작은 백화점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가서 셔츠 하나 샀어. 맘에 들지 모르겠네.”
“그래 생일도 기억해주고 고마워. 나는 네 생일 때 챙겨 주는 것도 없는데 말이지. 미안하네.”
이 주 전이 시우의 생일이었다. 대학 때는 생일이면 서로 아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는 했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포장을 열어 보니 푸른색 셔츠가 반듯하게 접혀있다. 상자에서 꺼내 펼쳐 보았다. 디자인이며, 색상이며 모두 마음에 든다. 수트에 받쳐 입기에도 좋고 캐주얼에도 잘 어울릴 법한 스타일이다.
“고마워. 너무 마음에 든다. 정말로 잘 입을 것 같아.”
“고맙긴 별거 아니야. 나중에 입어보고 사이즈가 안 맞거나 맘에 안 들면 얼마든지 교환해.”
현수에게 생일선물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기쁜 마음 보다 사실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찾아 와서 뜬금없이 생일선물을 주다니.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학교 근처를 지나는 일이 있었고, 그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촌형이 생각났고, 마침 이 주 전이 사촌형 생일이라는 것이 떠올랐고, 마침 바로 근처에 백화점이 있었고, 굳이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촌형의 생일 선물을 이 주 후 백화점에서 샀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럴 수는 없다. 왜 갑자기 찾아와서 선물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때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현수의 과거와 미래가 계산 됐다.
사업은 최근 거래처가 많아지고 매출이 늘고는 있다. 그렇다고 현수가 말한 것처럼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하기에는 아직 어렵다. 그 동안의 적자가 많이 쌓여있고 법인, 개인 대출을 다 끌어다가 사업에다 투입해 자금 상황이 원활하지 못하다. 몇 달 전 한 식품 회사로부터 치즈 납품 제안을 받았다. 거래 규모가 상당히 크고 매달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건이라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회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샘플 테스트를 어렵게 통과했고 최종 계약만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워낙 공급 규모가 크다 보니 초기에 생산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당장 거래 규모를 맞춰 생산자재를 살 돈이 회사에 없다. 더 이상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다 세금과 보험료도 밀려 정부 지원 기금 같은 것에 지원할 자격 요건조차 안 된다. 오늘 시우를 만나러 온 목적은 돈을 빌리기 위해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일주일 후에 빌려달라고 시우에게 연락할 것이다.
현수의 과거와 미래가 계산되고 시우는 깜짝 놀랐다. 돈을 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시우는 현수에게 크게 실망했고 화도 났다. 처음부터 이런 선물 따위 하지 않고 솔직히 말했으면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같이 논의 했을 수도 있다. 선물은 순수하지 못하고 기만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시우는 지금 심정을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썼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얘기다가 헤어졌다.
정확히 일주일 후 현수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형 얼굴을 봤더니 너무 좋았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때 못다한 사업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한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납품하는 샌드위치에 들어갈 치즈를 대량으로 주문 받았다고 한다. 샘플 테스트가 매우 까다로운데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통과했고 납품이 확정돼 계약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차질 없이 생산해서 납품만하면 매월 오 억 이상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건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대출금도 갚아나가고, 그 동안 밀린 세금도 납부할 뿐만 아니라 회사를 매우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자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수는 지금 당장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치즈 원물 살 돈이 부족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 억 원을 빌려줄 수 있냐고 시우에게 물었다.
‘과거, 미래 계산 그대로다.’ 시우는 생각했다.
육 개월 단위로 이십오 프로씩 이 년 동안 분할로 갚고 이자는 연 사 퍼센트로 쳐주겠다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시우는 더 화가 났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그러자 확실한 계약 건이니 돈이 없다면 오천 만원이라도 아니면 대출을 받아서 빌려줄 수 있겠냐고 현수가 물었다. 정말 확실한 계약 건이기 때문에 이렇게 무리하게 부탁하는 거라면서 현수는 미안하다고 했다. 대출받아서 돈을 빌려달라니 이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나. 어이가 없다. 다시는 현수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과는 절대 돈 거래를 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며 다시 한 번 거절했다. 전화기 너머로 실망 섞인 무거운 한숨이 들렸다. 현수는 많이 미안하고 형한테 이런 말 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얘기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현수와 있었던 일에 대해 지나에게 말했다.
“일 억은 너무 많기는 하다. 그래도 사촌동생인데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빌려주지 그래.” 지나가 말했다.
“친할수록 돈 거래 하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사이만 더 멀어진다니까. 주위에 보면 제때 갚는 사람도 못 봤고, 빌려준 사람만 애가 타고 마음고생 한다니까.”
“그렇긴 한데. 그 거래 건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조금이라도 도와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걸 확인 하는 것도 쉽지 않고 어쨌든 돈 빌려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말이지. 교수 월급 운운하면서 커피값 몇 천원 아끼라고 하고 갑자기 생일선물을 주면서 일주일 후에 일 억 빌려달라고 하는 게 너무 웃기지 않아? 다 돈 빌리려는 목적으로 그런 거잖아. 양아치같이 말이야. 생각할수록 짜증나고 열 받아.” 시우가 말했다.
“돈 안 빌려주면 그만이지 너무 그러지마. 현수씨랑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면서, 사촌들 중에 제일 친하다고 했잖아. 자주는 못 봤지만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 같던데.”
“친할수록 더 그러면 안되지. 원래 착한 애인데 사업하면서 변했나 봐. 능력이 안되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지. 멍청한 새끼.”
지나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사업이 어렵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그리고 자기 요즘 별거 아닌 거에 잘 흥분하고 화내는 거 알아? 사촌동생한테 돈 때인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마. 스트레스 받으면 자기만 손해잖아. 예전에는 누구한테나 이해심이 많았었는데. 도대체 그런 모습은 어디간 거야? 남도 아니고 사촌동생인데 형한테 그럴 수도 있지. 본인은 돈 빌려달라고 말하는 게 어디 쉬웠겠어?”
“이해할 걸 이해해야지. 너무 웃기잖아. 오랜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짓을 보면 말이야.”
지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본다.
현수는 다른 친척 두 명에게 돈을 빌렸고 일 년 후에 전부 갚았다고 한다. 그것까지 계산되지는 않았다. 돈을 갚고 갚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을 빌리기 위해 생각해주는 척하고 뜬금없이 선물을 하는 그런 가면 쓴 태도가 문제다. 그런 모습에 시우는 기분이 나빴다. 언젠가 친척 모임에서 현수를 만났을 때 지금은 사업이 잘 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당시 그런 부탁을 해서 미안했다며 시우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시우는 못 도와줘서 미안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시우에게 섭섭한 마음 같은 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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