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다, 기대하다 11

by 킥더드림

11
지나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 딱히 관계가 소원해질 만한 뚜렷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관계가 하와이 여행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느낌이다. 미래 계산 이후로 시우는 신경이 예민해지고 삶은 무기력해 졌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지나 입장에서는 시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지나도 요즘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다. 이래저래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어쩌면 그 균열의 시작은 윤희에게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지나는 여전히 윤희가 신경 쓰인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우도 지나의 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애써 모른척한다. 그렇다고 동료 교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나의 노파심으로만 치부해 버리고 만다.

어느 날, 시우는 퇴근하고 집으로 바로 왔다. 퇴근 길에 지나로부터 오늘 많이 늦을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무도 없어서일까 오늘따라 집이 유난히 휑뎅그렁하다. 이때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닐스와 베르너가 눈앞에 느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멀찌감치 떨어져 야옹 하는 소리로 현관으로 막 들어선 시우에게 인사를 건넨다. 표정 없는 닐스와 베르너의 인사는 언제나 무심해 보인다.
손을 흔들며 시우도 반갑게 인사한다. “닐스, 베르너 안녕! 오늘 무척 힘든 하루였거든. 그래도 너희들이 이렇게 반겨주니까 너무 좋다. 피로가 확 날아가네. 그나저나 별일 없었지? 사이 좋게 잘 지내고 있었어?”
시우의 물음에 닐스와 베르너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둘은 사이가 좋은 편이다. 손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소파에 털썩 앉았다. 무거운 한숨을 내뱉는다. 닐스가 소파 등받이 위를 지나가면서 꼬리로 시우를 살짝 건드린다. 닐스의 가벼운 스킨십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은 지친 심신에 작은 위로가 된다. 베르너는 멀찍이 떨어져서 시우를 쳐다보고 있다. 베르너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베르너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시우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저녁거리를 배달시켰고 닐스와 베르너에게는 사료를 주었다. 셋이 오붓하게 앉아서 저녁을 함께 먹는다.
“너희는 밥 먹을 때 말이 너무 없어.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얘들아,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닐스와 베르너는 대답이 없고 사료만 먹고 있다.
“둘이 낮에 나 몰래 싸운 거 아니지? 그래서 말 안 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안 싸운 거 맞지. 너희 둘이 그럴 리가 없어.”
“지금 먹는 사료는 입맛에 잘 맞나 봐? 잘 먹네.”
시우는 대답 없는 닐스와 베르너와 계속 대화를 하면서 저녁을 먹었다.

선잠을 자고 있던 시우는 지나의 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었다.
“많이 늦었네. 늦게까지 일하느라 수고 했어.”
“내가 깨운 거야?” 작은 스탠드 등을 켜면서 지나가 말했다.
희미한 불빛이 방안을 은은하게 비춘다.
“괜찮아. 잠이 깊이 들지 않아서 깬 거야. 요새 잘 못 자잖아. 일은 잘 마무리하고 왔어?”
“머리 아픈 일이 산적해 있어. 내일도 늦을지 몰라.” 지나의 목소리가 많이 피곤하게 들린다.
“그렇구나. 그럼 얼른 씻고 자.”
시우는 다시 잠을 청하려 몸을 돌려 스탠드 등을 등졌다. 지나는 침대에 누운 시우의 뒷모습을 잠시 빤히 쳐다본다.
“상호도 야근해서 사무실에 같이 있었어.”
“뭐라고?” 잠이 다시 막 들려는 찰나여서 지나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
지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한다. “상호도 야근해서 사무실에 같이 있었다고. 내가 운전하기 피곤하다고 하니까 차 두고 가라고 하더라고. 상호가 집에까지 바래다 주고 갔어.”
“그랬구나. 상호씨 고맙네. 언제 밥이라도 한번 사줘. 내일은 내가 회사에 데려다 줄게.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 시우는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는 눈을 감고 말하는 시우의 모습을 잠시 넋 놓고 쳐다본다. 지나와 상호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입사 동기이다. 많은 동기들 중에 둘이 가장 친하다. 두 사람은 중고등학교 시절 압구정동에 살았다. 하지만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없어서 그때는 서로 알지 못했다. 신입사원 교육 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사람이 처음 알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서로 아는 지인들이 많았다. 그 지인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그런 계기로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고 위로를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하지만 지나는 상호를 친한 동기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시우가 윤희 이야기를 하듯이 지나는 결혼 전부터 가끔 상호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그때 시우는 상호가 지나에게 이성으로써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나는 상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나는 샤워를 하고 나와서 잠든 시우를 흔들어 깨운다. “자기야, 일어나 봐.” 바로 깨지 않자 계속 시우를 흔든다. “얼른 일어나봐.”
“어? 왜? 무슨 일 있어?” 자다가 깜짝 놀란 시우가 물었다.
“우리 얘기 좀 해.”
“얘기? 무슨 얘기? 밤에 꼭 해야 하는 거야? 피곤할 텐데 얼른 자. 내일 출근하면서 얘기하자. 나 이제 막 잠들었는데.”
지나가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야. 지금 해야겠어.”
지나의 말에 시우가 일어나 앉는다. “무슨 일 있어?”
“내가 상호랑 늦게까지 같이 야근하고 나를 집에다 바래다 줬는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상호씨랑 무슨 일 있었어?” 시우는 잠이 덜 깨 지나가 물어보는 의도를 알아 채지 못한다.
“그게 아니고. 정신 좀 차려봐. 나랑 상호랑 친하게 지내는 게 아무렇지도 않냐고? 기분 나쁘지 않아? 질투 같은 거 안 느껴? 상호랑 둘이 저녁 먹는 경우도 종종 있고 오늘은 사무실에 둘만 남아 있었단 말이야.”
그제서야 시우는 지나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둘이 같이 시간 보내려고 일부러 야근 한 것도 아닐 테고. 상호씨랑은 친구나 다름 없는 사이고 그리고 같은 회사에 다니니까 함께 저녁 먹을 수도 있는 거지. 왜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우의 말에 지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상호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몰라?”
“지나야, 그건 옛날 얘기잖아. 지금은 결혼했으니까 상호씨가 자기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걸 아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상호씨가 자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자기는 상호씨를 남자로 생각한 적 없잖아. 혹시 있었어?”
“아니. 없었어.”
“거봐. 그런데 내가 왜 질투를 해야 해? 나는 자기를 믿어. 그리고 같은 회사에 다니니까 매일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그걸 내가 늘, 매번, 언제나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럼 자기가 학교에서 서윤희 교수랑 가깝게 지내는 게 늘 신경 쓰이는 나는 뭐냐고? 나도 자기한테 때로는 질투도 받고 싶고 가끔은 구속도 당하고 싶은 마음이 있단 말이야.” 지나가 화를 내며 말했다.
"뭐라고? 자기랑 상호씨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나는 자기를 믿는 다니까? 전적으로 믿고 있다고. 질투? 구속?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정말 소통이 안되네. 어떻게 모든 걸 머리로만 이해할 수가 있어? 질투를 느끼는 감정. 구속하고 싶은 욕망. 이런 마음의 요동이 어쩌면 진짜 낭만일지도 몰라. 적당한 긴장감을 위해서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고. 우리가 잃어버린 게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진짜 쿨해도 너무 쿨해."
지나의 말에 시우는 당황했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자기도 신경 쓰지마. 서교수는 그냥 후배고 동료 교수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해. 부부가 서로 믿으면서 살아야지. 제발 우리 편하게 살자.” 시우는 짜증내듯 말했다.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논리적 사고나 합리적 판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쌓인 감정을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삼십 분 정도 다투다 서로 등지고 침대에 누웠다. 시우는 지나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질투 받고 싶고 구속 당하고 싶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질투를 했으면 싫어했을 거고 구속하려 들었으면 못 견뎌 했을 것이 뻔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언가 좀 이상하다.
‘혹시. 무슨 일이?’ 시우는 혹시 지나와 상호 사이에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때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회전되고 과거와 미래가 계산 됐다.
상호는 신입사원 교육 때 지나에게 첫눈에 반했다. 지나와 친해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았던 터라 서로 알고 있는 지인과 함께 자리를 마련하면서 지나와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런 덕에 단순하게 입사 동기 보다는 동네 친구 같은 관계가 됐다. 지나는 상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느꼈다. 상호가 지나를 좋아하는 것은 지나와 가까운 회사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나는 상호가 전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 상호는 자신의 마음을 지나에게 고백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는 굳이 좋은 친구인 상호와 거리를 둘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 마음을 모른 척 하기만 하면 됐다. 지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지나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지나를 향한 상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짝사랑 하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결혼한 자신을 아직 잊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상호가 고백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용기가 없거나 처음 만났을 당시 지나에게 남자친구가 있어서가 아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대학에 막 입학한 두 살 위 누나가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누나의 죽음은 상호의 가족에게 너무나 큰 충격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누나가 떠나고 상호는 하루하루를 슬픔과 아픔 속에서 살았다. 부모님이 아파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는 것도 고통이었다. 슬픔이 너무 깊어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대학교 이 학년 때 여자친구를 만나고 나서야 그 슬픔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자친구를 통해 슬픔을 잊고 하루하루가 즐거워 졌다. 오랜만에 찾아온 즐거움이었다. 한 없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기도 하고 이 느낌이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붙어있었다. 그 불안은 현실이 됐다. 대학교 사 학년 때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떠나갔다. 상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누나의 죽음과 버금가는 아픔이었다. 그 이후로 누군가를 잃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게 됐다. 상호에게는 이루어 지지 않는 사랑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최선의 사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상호는 상대가 남자 친구가 있어도,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도 사랑하는 마음을 거둘 이유가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서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는 다르다. 짝사랑하는 시간이 오래되면서 갈수록 마음이 복잡해지고 지쳐간다. 정서적으로만 사랑하기에는 한계에 다다랐다. 육신과 육신이 뒤섞여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 욕망이 오래 잠들었다 서서히 깨어난다. 미래의 어느 날 상호는 이제는 지나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스스로를 정리한다. 그럴 즈음 지나가 먼저 다가온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오랜 시간 갇혀있던 새까만 동굴 속을 빠져 나와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혜로운 빛을 온몸으로 받는 느낌이다. 마음을 접기로 했지만 그 유혹에 흔들리고 만다. 상호는 거부할 수 없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상호에게 지나가 먼저 다가갈 것이다.
시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말도 안 된다. 지나가.. 지나가.. 미래에 바람을 피우다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믿고 싶지 않지만 계산은 틀린 적이 없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따져 물을 수도 없지 않은가. 시우는 그날 밤 한 숨도 못 잤다. 그 다음 날 밤도 그리고 그 다음 날 밤도 또 다음 날 밤도, 계속해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질투를 하면 미래가 달라질까? 구속을 하면 미래가 달라질까? 모르겠다. 미래에 이미 일어날 일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 계산이 될 때마다 시우의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이전 11화계산하다, 기대하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