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지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방문을 조심스럽게 여니 지나가 스탠드 등을 켜놓고 침대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늦었는데 안 자고 책 보고 있는 거야?” 시우가 물었다.
“많이 늦었네. 서교수랑 같이 있다가 온 거야?”
“응.”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우는 아니라고 대답할 걸 그랬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구나. 서교수랑 있었구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네.” 지나의 목소리에는 한 줌의 감정도 섞여있지 않았다. 마치 각 층을 안내하는 엘리베이터의 녹음된 소리만큼 건조하게 들렸다.
“여러 번 말했잖아. 서교수랑은 그냥 동료일 뿐이라고. 요즘 쓰고 있는 논문에 대해서 서교수 견해를 듣느라 늦어졌어.”
“단 둘이 있었던 거야?”
“조교도 같이 있었어.”
“이 늦은 시간까지 조교가 학교에 있었다고? 당장 급한 일도 없는데 말이지?”
“조교는 같이 있다가 조금 일찍 들어갔고 서교수랑 둘이 더 얘기하다 왔어. 중요한 논문이라서 얘기가 좀 길어졌어. 자기도 잘 알잖아. 내가 요즘 연구실적 안 좋아서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거. 이해해 줘.”
지나는 말없이 체념한 표정으로 시우를 본다.
“이번 논문만 마무리 되면 우리 여행 갈까? 저번처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어디가 좋을지 각자 알아보자.” 시우가 말했다.
“그때처럼 여행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시우는 지나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늦어서 미안해. 아무튼 서교수랑은 진짜 아니야. 그 사실은 알고 있잖아. 그렇지?”
지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럼. 지나야, 앞으로 서교수랑 가깝게 지내지 않을 게. 정말 최소한의 필요한 얘기만 하고 일절 교류하지 않을 게. 그러니까 기분 풀어.”
“우리 끝내자.”
“끝내자니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이혼하자는 말이야.” 지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없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이혼이라니. 우리가 이혼을 왜 해? 서교수랑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 학교를 옮기는 건 어떨까? 아마 내가 옮긴다고 하면 많은 대학에서 서로 오라고 할 거야.”
“서교수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 알아.”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사랑이 없는 것 같아서.”
“뭐? 그게 무슨 말..” 시우는 말을 하다 말았다.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아닌 것 같아.”
사랑이 없는 것 같다는 말에 시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미 상호랑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건가? 미래 계산이 잘못 됐나?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아직은 그런 관계가 아닌 게 확실한데.” 시우가 생각했다.
시우는 지나의 과거와 미래를 계산해 보려 애써 봤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다는 말을 예전에 한번 들어봤다. 어떤 연인이었던가 아니면 부부였으리라. 한 쪽에서 사랑하지 않으니 헤어지자고 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서 그랬는지 그때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사랑이 없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사랑은 없다. 그 말의 당사자가 되어보니 펄떡펄떡 뛰고 있는 심장을 밖으로 꺼내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쥐어짜낸 것 같은 잔혹한 말임을 알게 됐다. 결국 시우와 지나는 헤어졌다.
헤어진 후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시우는 학교를 휴직했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 지낸다. 스스로 고립되어 한없이 차가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다. 아무런 목표도, 생산도, 성취도, 욕망도, 야망도 없다. 어떤 원죄를 짊어진 채 희미한 랜턴 하나에 의지해 깊이를 알 수 없는 갱도를 헤매는 기분이다. 언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떠난 사람을 잊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하고도 교류가 없으니 과거와 미래가 계산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