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그날의 사고만 아니었더라도..
그날의 사고만 아니었더라도 과거와 미래가 계산되는 능력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해 분노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나와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며, 아마 지금 손을 잡고 함께 예술의 전당을 걷고 있을 것이다. 지나와 헤어지고 나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굳이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삶이 죽음보다 더 나은 가치라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닌 듯 하다.
시우는 한가람 미술관 앞을 지나간다. 프란시스 베이컨 전시를 홍보하는 커다란 현수막이 건물 전면에 걸려있다. 현수막에는 형상이 완전히 문드러져서 살과 피와 뼈가 뒤엉켜있는 듯한 인간의 모습이 프린트되어 있다. 시우는 정면으로 서서 현수막의 그림을 본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본다. 그러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현수막 아래는 어떤 여자가 홀로 벤치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시우는 그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시우와 그녀 사이의 간격이 점점 줄어든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다가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시우의 자동차 사고 일 년 전 강변북로 같은 구간에서 한강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도 남준우 박사에게 뇌수술을 받았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갑자기 그때 두 사람 주위로 돌풍이 불었다. 그녀의 긴 머리와 품이 큰 카디건이 심하게 날린다. 그녀는 마치 황량한 사막 가운데 홀로 모래바람을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어느 무협영화의 검객처럼 보인다. 시우는 몇 발 자국 더 다가갔다.
“저기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스마트폰을 보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우를 본다. “네?”
그녀는 고개를 들자마자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우를 빤히 쳐다본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시우는 눈을 마주친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계속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시우가 그녀를 바로 알아 봤듯이 그녀도 시우를 바로 알아본 것이다. 어떤 기운이 그녀에게서 느껴진다. 아주 강력한 기운이다. 그녀의 계산 능력은 시우의 그것 보다 훨씬 뛰어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저기요!”
“네?”
“혹시, 그거 알아요?”
“뭐.. 뭐요?”
“과거는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어도 미래 계산은 정확하지 않다는 거요.”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무슨 말이에요? 미래 계산도 정확했었는데요.”
“미래 계산 결과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과정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원인은 맞지 않더라고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럼요. 당연히 사실이죠. 제가 주시우 교수님께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녀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시우에게 묻는다. “혹시 본인의 미래가 계산된 적이 있었나요? 아마 없을 걸요.”
“맞아요. 한 번도 없었어요.”
“자신의 삶도 계산 못하면서 누가 누구의 삶을 계산한다는 거에요. 미래 계산은 안 맞는 거에요.” 옅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강한 신뢰가 간다. “아, 네.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바꾸세요.”
“생각을 바꾸라고요?” 시우가 물었다.
“네.” 그녀가 소매를 걷어 손목을 보여준다. 여러 번 칼로 그은 상처가 보인다. “이런 생각을 말하는 거에요.”
“아.. 네..”
“미래는 불확정적이라고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죠. 우리 뇌에서 계산됐던 미래는 일종의 환각일지도 몰라요.”
“환각이라고요?”
“사람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 자신의 뇌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세상을 현실로 인식하기도 하거든요. 미래 계산은 그런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환각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환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요.”
시우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됐다.
“조금 전에 생각을 바꾸라고 했는데요. 그럼 제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시우가 물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에게 다가갔다. “살다 보면 기적적인 아름다운 순간이 찾아올 때가 아주 가끔 있잖아요. 생각해보세요. 교수님에게도 있었을 거에요.”
“그렇죠. 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죠.”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걸로 충분할까요?”
“욕망은 언제나 신기루처럼 다다를 때 즈음 저 멀리 달아나버리죠. 그래서 우리는 자위를 통해서 판타지를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현실에서는 절대 채워지지 않죠. 가까이 가봤기에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착각을 하게 되는 거에요.”
그녀는 모호한 말을 남긴 채 부는 바람을 가르며 저 멀리 가버렸다.
닐스와 베르너에게 저녁을 챙겨줘야 한다는 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서둘러 집으로 간다. 아파트 입구를 들어설 즈음 주머니 안에 있는 스마트폰의 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윤희이다. 오랜만이다.
“여보세요?”
윤희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아! 교수님, 드디어 통화가 연결 됐네요. 안녕하세요?”
“그러게 몇 번 전화한 건 알고 있었는데 내가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어. 미안해. 그나저나 서교수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이에요. 거의 일 년만인 걸요.”
“벌써 그렇게 됐나?”
“복직이 얼마 남지 안으셨잖아요. 복직 준비는 잘 하시고 계신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겸사겸사 연락 드렸어요.”
그렇다 학교로 돌아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복직 준비는 이제부터 해야지. 서교수는 어떻게 지내?”
“저야 당연히 잘 지내고 있죠. 그런데 교수님! 내일 뭐하세요?”
“내일?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 내일뿐만 아니라 모레도 글피도 그 다음 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아무런 계획이 없다.
“그럼 저랑 영화 보실래요?”
윤희의 제안이 너무 뜬금없다고 시우는 생각했다. “무슨 영화?”
“옛날 영화인데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데 최근에 재개봉 했지 뭐에요. 너무 신나요. 하하.” 밝게 웃으며 윤희가 말했다.
“<중경삼림>이 재개봉 했어? 예전에 엄청 재미있게 봤었는데.”
“물론 OTT로도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관에서 꼭 보고 싶어서요. 극장에서는 못 봤거든요. 오래 전부터 큰 화면으로 볼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재개봉을 했어요. 그럼 가시는 걸로 알고 제가 예매할게요. 영화관이랑 상영시간은 톡으로 알려드릴게요. 그럼 내일 봬요.”
“그래. 내일 봐.”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다. 시우는 스마트폰에서 <중경삼림>의 삽입곡 <몽중인>을 찾아서 플레이 했다. 무선 이어폰으로 왕페이가 부른 <몽중인>이 흐른다. 가만히 서서 감상한다. <몽중인>을 듣고 있으니 <중경삼림>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착각이 든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형상이 희미하게 부서져 흩어진다. 공간은 구체적이고 시간은 단절된 이미지를 이어 붙인 점프컷처럼 모호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삶은 그 불투명한 시간을 견디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노래가 끝났다.
시우는 내일을 기대하며 집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