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초여름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어느 날, 시우와 윤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캠퍼스를 산책하고 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다. 주위에 많은 나무들은 점점 더 초록색으로 짙어지고 있다. 햇살은 교정을 거니는 사람들의 하얀 살갗 마저 초록색으로 물들일 것마냥 따사롭다. 이렇게 윤희와 함께 걸으니 왠지 마음이 설렌다. 처음이다. 왜일까? 아마 날이 너무 좋아서 그럴 것이다. 아니면 요즘 지나와 좋지 않아서 일시적으로 드는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이 설렘은 진짜가 아니다. 뇌가 만들어 내는 착각에 불과하다. 시우는 설레는 감정을 부인한다. 걷고 또 걷는다. 윤희도 그만 들어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해가 점점 넘어가기 시작한다. 해가 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한참을 걷다 시우와 윤희는 어느 작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자꾸 자꾸 어두워지고 주위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해는 완전히 졌다. 그 사이 내려앉은 어둠은 이 장소를 마치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압축시켜 놓은 듯하다. 달빛, 별빛, 가로등 불빛은 어둠 사이사이로 적당히 섞여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잔디 사이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 간간히 부는 바람 소리는 두 사람 주위로 작은 물결이 되어 흘러 다닌다. 어둠 속으로 떠다니는 조용한 빛과 희미한 소리는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좀더 밀착시킨다. 평온한 밤이다. 지나의 우려가 맞았던 것일까? 윤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언젠가부터 삶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교수님, 요새 무슨 일 있으세요?” 윤희가 물었다.
시우가 윤희를 보며 되묻는다. “왜? 나한테 무슨 일 있어 보여?”
“지금은 표정이 밝으신데요. 요 며칠 동안 근심이 가득해 보였어요.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고요.”
“그랬구나. 당연히 근심이 있지. 세상에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얼굴에 티가 많이 났나 봐?”
“조금 났어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시우는 어떻게 말을 할지 잠시 고민한다. 미래 계산을 하면서부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게. 음.. 그게 말이지.”
“저한테 얘기하기 곤란하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제가 괜한 걸 물었나 봐요.” 윤희는 미안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니고. 다름 아니라 요새 연구가 잘 안 돼서 많이 힘들어서 그래.” 연구실적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교수님께서 연구실적 때문에 힘드시다고요? 에이! 말도 안돼요. 농담이죠?”
“농담 아니야. 정말이야. 최근 3년 정도 제대로 된 논문을 하나도 못 쓰고 있어.”
“에이. 교수님, 정말 왜 그러세요? 이미 이른 나이에 훌륭한 논문 많이 쓰셨잖아요. 저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요. 그리고 정교수도 엄청 빠르게 됐고요. 저도 그렇고 다들 교수님을 많이 부러워한다고요.”
“그렇기는 한데. 요새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연구에 전혀 집중이 안돼.”
“진짜 너무하세요. 어떻게 매년 쉬지 않고 좋은 논문을 쓸 수가 있어요? 그건 불가능하죠. 인류 역사상 최고 학자인 아인슈타인도 그러지 못했다고요.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업적은 대부분 젊었을 때 나왔던 걸로 알고 있어요. 기적의 해라고 불리는 1905년 한 해에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상대성이론 같은 논문을 썼고 그때가 스물 여섯 살인가, 스물 일곱 살인가 그랬을 걸요. 진짜 대단한 것이 이걸 스위스 특허청에서 특허 심사관으로 일하면서 썼다고 하더라고요. 십 년 뒤 1915년에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고요. 그리고 불확정성 원리는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아인슈타인도 틀릴 때가 있잖아요. 교수님 욕심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 하하.”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윤희가 말했다.
“하하. 아인슈타인은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아. 어쨌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고 힘들어 한다는 말이지?”
“당연하죠. 교수님이 연구실적 때문에 고민이라면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슨 소리야? 서교수는 정말 잘 하고 있는 거지.”
“고맙습니다. 교수님께 칭찬 받으니 기분 좋은데요. 그런데 혹시 그거 아세요? 아인슈타인이 엄청 바람둥이였대요.”
“정말? 아인슈타인이?”
“네 그렇다고 해요. 의외지 않아요?”
“그러니까 의외인데. 아인슈타인 굉장히 인간적이다. 그런 천재가 말이지.”
윤희가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교수님, 그건 아니죠. 인간적이라뇨. 보통 사람 같았으면 부도덕하다고 했을 텐데. 너무하세요. 학자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해요.”
“하하. 그러게 말이야. 아인슈타인이니까 왠지 인간적으로 느껴지네.” 시우도 같이 웃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인데요. 요즘 연구가 잘 안되고 힘들어 하시는 건 이교수님이 발표한 논문이 교수님이 연구하고 있던 주제랑 매우 유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비슷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도 아이디어를 가로챘을 것으로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고 봐요. 하지만 그 일은 그냥 잊어버리세요. 교수님이 훨씬 더 훌륭하고 우리나라 최고 수학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제가 교수님처럼 일찍 정교수가 됐으면 연구 열심히 안하고 대충대충 즐기면서 살았을 것 같은데요.”
“좋은 얘기해줘서 고마워. 많은 위로가 되네.”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에요.”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시우가 입을 연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서교수는 연애하고 있어?”
뜻밖에 질문이었다. “연애요?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어요.”
“의외인데. 서교수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말이지.”
“제가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서교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걸. 연애나 결혼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요. 당연히 있지. 왜 없겠어요. 결혼은 모르겠고 연애는 무지 하고 싶어요. 도통 인연을 못 만나네요. 저는 언제나 열려 있는데 말이죠.”
“결혼 생각은 전혀 없는 거야?”
“전혀 까지는 아니고요. 언제가 하겠죠. 결혼은 천천히 하고 싶어요. 결혼을 빨리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마 엄마 때문인 것 같아요.”
“어머니 때문에?”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 까? 밤이 깊어지는 만큼 두 사람의 이야기도 갈수록 깊어진다.
“어렸을 때 저희 부모님은 함께 병원을 하셨어요.”
“아, 정말? 아버지, 어머니께서 두 분 다 의사시구나. 처음 알았네.”
윤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아요. 제가 여섯 살 때 있었던 일인데요. 부모님 병원은 평일 중 하루는 오전 진료만 했어요. 바로 그 오전 진료만 있는 날 오후에 아빠가 저녁을 하겠다고 장을 보러 가려고 했어요. 그날 엄마는 조금 피곤하다고 아빠한테 미안하다며 혼자 장 보고 오라고 했고요. 아빠는 본인이 알아서 다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푹 쉬고 있으라고 했죠.”
“아버지가 자상하시네.”
“맞아요. 자상한 편이기도 했고 두 분 다 일을 하셨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아빠가 집을 막 나서는데 언니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 왔어요. 언니는 아빠한테 자신도 마트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언니가 있구나. 형제가 언니하고 서교수하고 이렇게 둘?”
“네. 언니랑 저랑 둘이에요. 언니는 저보다 여섯 살 위에요. 당시 오학년이었어요. 아버지는 언니가 같아 가자고 하니까 당연히 좋다고 했죠. 언니도 신나 했어요. 책가방을 방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아빠를 따라 나서려는 순간 엄마가 언니를 마트에 못 가게 붙잡았어요.”
“왜?”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냥 숙제부터 하라는 거였어요. 저희 엄마가 좀 공부에 극성이었거든요. 언니는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썼는데 엄마한테 혼만 났어요. 아빠도 엄마 말 들으라고 했고요. 그래서 아빠 혼자 마트에 갔죠.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빠가 마트에 간지 삼십 분 정도.. 아니 한 시간 정도일지도 몰라요. 밖에서 정말 너무너무 큰 이상한 굉음 같은 게 들렸어요. 태어나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봤어요. 마치 거대한 산이 무너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가 폭파되는 소리도 같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그 소리가 귓가에 생생해요. 우리 가족은 그 소리에 놀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밖으로 뛰어 나갔어요.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거에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앞이 보이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시우가 물었다.
“말 그대로 앞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먼지 가루 같은 것이 사방에 가득 차있어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바로 옆에 있는 엄마와 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죠.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 전체가 먼지 가루 같은 걸로 뒤덮였어요. 그때는 뭐지? 전쟁이 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너무 무서웠어요. 엄마랑 언니 손을 잡고 바로 집으로 들어갔어요. TV를 켰는데 전쟁 났다는 뉴스 같은 건 없었어요. 두려운 마음으로 집에 있었어요. 한 십 분, 십오 분 정도 지났을 거에요. 창문으로 밖을 보니 서서히 먼지가 사라지고 앞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다시 우리는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갔죠. 밖에 나와 보니 희뿌연 먼지 사이로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백화점이 사라지고 없는 게 보였어요. 백화점 건물이 두 동이었는데 그 중 한 동이 폭삭 무너진 거에요. 아버지가 간 마트는 바로 무너진 건물 지하에 있었고요. 그날 아빠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났어요.” 윤희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삼풍백화점 사고 때.” 시우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이 말했다.
“맞아요. 삼풍백화점. 백화점이 무너지기 직전에 아빠가 거길 갔던 거에요. 남은 우리 셋은 엄청난 슬픔에 빠졌죠. 정말 그 슬픔에서 빠져 나오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특히 언니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언니가 왜 죄책감에?”
“언니는 자신이 숙제 끝나면 같이 마트에 가자고 아빠를 붙잡았어야 했다고 자책을 했어요. 엄마가 언니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죠.”
“그랬구나. 언니 잘못은 아닌데. 언니는 어떻게 지내?”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요. 언니는 결혼을 일찍 했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랬던 게 뭔 줄 아세요?”
“글쎄. 뭔데?”
“형부가 아빠랑 너무 닮았다는 거에요. 얼굴 생김새가 아주 똑같은 건 아닌데, 직업도 의사고 이미지나 분위기가 아빠랑 너무 비슷했어요. 형부를 처음 본 날 정말 까무러치게 놀랐어요. 형부를 보자마자 엄마랑 저랑 똑같이 느끼고 서로 마주보고 눈빛으로 바로 그 느낌을 주고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아픔을 이겨내고 잘 살고 있다니 다행이네.”
“제가 결혼하면 엄마가 혼자 남게 되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서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각자가 그날 사고의 트라우마를 마음 속 어딘가에 꾹꾹 눌러 놓고 있을 테니까요.”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주위에 결혼한 친구 몇몇을 봐도 결혼을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친구들 결혼 생활이 어떻길래 그러지?”
“중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은 스물 여덟 살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첫 연애 상대였어요.”
“일찍 만나서 꽤 오래 연애를 했나 보네. 요즘에는 그런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니에요. 스물 여덟 살에 만나서 스물 여덟 살에 결혼 한 거에요.”
“그럼 스물 여덟 살 때까지 연애를 한 번도 안 했다고? 그것도 흔한 경우는 아닌데. 이런 말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스타일이야?”
“아니요. 오히려 그 반대에요. 예쁘고, 착하고, 똑똑해요.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어요.”
“인기도 많은데 왜? 대학 가서도 연애를 한 번도 안 했다는 거잖아.” 시우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대학 다니는 동안 연애를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죠. 그 친구 어머니가 연애를 반대했어요. 공부 열심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만 하라고, 그러면 어머니께서 결혼할 좋은 남자 알아 봐 주신다고 연애는 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대요.”
“아무리 그렇다고 요즘 같은 시대에 어머니 말을 듣고 연애를 안 하는 사람이 있어?”
“그러게 말이에요. 썸은 타 본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사귄 적은 한 번도 없고요. 스물 여덟 살에 어머니가 알아봐 준 남자와 만난 지 오 개월 만에 결혼했어요. 남편은 외국계 은행에 다는 사람이고요. 남편 집안은 강남에 건물도 몇 개 가지고 있는 꽤 부자라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결혼을 결정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어요. 결혼하기 전날 그 친구랑 꽤 오랜 시간 전화를 했었는데 저한테 계속 물었어요. ‘나, 결혼 잘 하는 거 맞겠지? 회사까지 그만뒀는데 잘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렇게 서둘러서 결혼해도 상관없을까?’ 몇 번을 반복해서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저도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요. 대답보다는 질문을 했어요. 남편이 될 사람을 사랑하는지를. 그 친구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사랑은 아닌 것 같다고 했어요. 어쨌든 둘은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고 나서 신혼 때부터 남편과 시댁에 대해 불만이 많았어요. 저를 만날 때마다 불평, 불만을 늘어 놨죠.”
“어떤 불평, 불만이었는데?”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요. 그 당시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평생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다 같이 사는 건데 그 정도 문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친구는 뭔가 굉장히 불안해 보였어요. 그리고 신혼 때부터 남편과 섹스는 배란기 때만 한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는데 배란기 때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일찍 퇴근했대요. 친구가 거기에는 어떠한 갈망이나 쾌락은 없고 그냥 의무적으로 아이를 갖기 위해서 한다고 했어요.”
“배란기 때만 관계를 갖는다니 왠지 짠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좀 그렇죠? 그리고 친구는 만약 자기가 이혼하게 되면 남편 집안의 재산을 몽땅 뺏을 거라는 말을 자주했어요.”
“사이가 안 좋아서 이혼하려고 했던 거야?”
“아니요. 전혀 아니었어요. 저는 친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아무리 남편이 잘못해서 이혼한다고 쳐도 그 집안의 재산을 몽땅 뺏을 거라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친구도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도 그 얘기를 자주 했어요. 원래 배려심도 많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하는 친구라서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죠.”
“그러게 말이 안 되는 얘기인데. 무언가 막연한 불안함 같은 게 있었나 보네. 그러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다분히 감정적으로 말이지. 어쨌거나 임신은 했어?”
“결혼한지 이 년 정도 지나서 인공수정으로 쌍둥이를 임신했어요.
“자연 임신이 안됐구나.”
“톡 프로필과 SNS에 아이들 사진으로 도배가 돼있어요. 제 기억으로는 톡 프로필 사진에만 아이들 사진을 한 오백 장 가까이 올려 놓았을 거에요.”
“모르긴 몰라도 친구가 아이들한테 애정을 굉장히 많이 쏟을 것 같기는 하네. 지금은 남편이랑 잘 지내나?”
“요즘은 남편이랑 시댁 욕을 안 하는 거 보면 잘 살고 있는 거 같아요.”
“다행이네. 아이 낳고 나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많이 찾았나 보네. 이 친구 때문에 결혼을 천천히 해야겠다는 생각..”
윤희는 시우의 말을 가로챈다. “또 다른 친구의 경우도 있어요.” 시우는 말 없이 윤희를 쳐다봤고 윤희는 말을 이어간다. “이 친구는 방금 전에 말한 친구와 달리 대학 때 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 오랫동안 했어요. 졸업하고 각자 취업을 하고도 계속 만났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 언젠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지금 말하는 친구는 언제적 친구야?”
“이 친구도 중고등학교 친구에요. 조금 전에 말했던 친구랑 해서 셋이 친해요. 어쨌거나 그런데 이 친구가 직장에서 이상형의 남자를 만났지 뭐에요. 그 남자를 보고 혼자 좋아하면서 속앓이를 했어요.”
“어떤 남자였길래 그랬나?”
“잘생기고, 훤칠하고, 스펙 좋고. 소위 말하는 다 갖춘 남자였던 거 같더라고요. 친구가 그 남자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진짜 잘 생겼어요. 아무튼 제 친구는 그렇게 속앓이를 하다가 그 남자에게 사적으로 연락을 하고 만나면서 호감을 표했어요.”
“남자친구랑은 헤어지지 않은 채?”
“네. 남자친구랑은 잘 만나고 있으면서요. 그러다가 그 남자와 썸을 타기 시작했어요.”
“썸을 타면서도 남자친구랑 관계는 계속 유지했고?” 시우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다시 묻는다. “그럼 그 남자는 썸 타고 있는 서교수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건가?”
“아니요. 알고 있었어요.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회사에서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길 수는 없어나 보더라고요. 썸을 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 제 친구가 그 남자에게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친구는 그 남자가 확신만 주면 언제든지 남자친구를 언제든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죠. 하지만 그 남자는 친구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어요. 연애와 썸 중간 정도의 애매한 관계로 이 년 가까이 만났어요.”
“남자친구도 계속 만나면서?”
“네.”
“대단하다. 이 년이나.”
“그 남자와의 관계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친구를 떠날 수가 없었겠죠. 남자친구도 괜찮은 사람이 거든요. 둘 중에 하나는 잡고 싶었겠죠.”
“그럼 오랫동안 양다리를 걸친 건데. 남자친구에게 한 번도 안 걸렸었대?”
“걸린 적은 없었나 보더라고요. 아마 남자친구는 제 친구가 그러리라고 상상도 못 했던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알던 저조차 내가 알던 친구가 맞나 싶었거든요. 그렇게 이 년 가까이 만나다가 그 남자는 회사의 다른 여자와 사귀기 시작했어요. 그 남자와 제 친구와의 관계는 당연히 그 시점에 바로 끝났고요. 관계를 끝내면서 그 남자가 그랬대요.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랑 헤어지지 않은 거 다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널 신뢰할 수가 없었다고. 제 친구는 거기에다 대고 네가 확신을 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얘기했다나 봐요. 그런 얘기를 주고받아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남자에게는 진짜 여자친구가 생겼고 둘의 관계는 이미 예견돼 있었는데요. 친구는 그 남자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 만큼 많이 상처를 받았어요.”
“당연히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렇게까지 했겠지.” 시우가 머뭇거리며 묻는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잤겠지?”
“당연하죠. 정기적으로 자겠죠.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관계가 유지가 됐겠어요. 그 남자는 그것 때문에 만났을 텐데요. 친구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그 남자한테 친구는 섹스 파트너 이상은 아니었겠죠.”
“맞아. 그랬을 거야. 이번에도 씁쓸한 생각이 드네.”
“그 남자가 떠나가고 나서 친구는 한동안 많이, 아주 많이 힘들어 했죠. 심지어 어떤 일이 있었던 줄 아세요?"
"글쎄. 어떤 일이?"
"사내 체육대회 때 그 남자가 책상에 벗어 놓은 재킷을 어수선한 틈을 타서 몰래 가지고 온 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재킷은 왜?"
"그 남자의 뭐라도 소유하고 싶었나 보죠.
"이해가 안되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헤어지고 나서 그 재킷을 입고 자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남자의 체취를 느끼면서.”
시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
“정말 많이 사랑했던 거 같아요. 헤어진 후에 그런 행동까지 하는 걸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우가 말한다. “그건 그 남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욕망한 거 아닌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랑. 욕망. 무슨 차이가 있죠?"
"음.. 그렇게 물어 보니까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뭐..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사랑만큼 모호한 개념도 없으니까 말이야."
"양다리를 걸친 탓에 부도덕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봐요."
"그래. 서교수 말이 맞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혼신을 다해서 사랑한 것일 수도 있겠네."
질투 받고 싶고 구속 당하고 싶다는 지나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윤희와 얘기를 하다 보니 지나의 그 말이 어느 정도 수능이 간다.
“질투. 구속. 어쩌면 이런 게 진짜 낭만일지도 모른다. 너무 쿨하다.” 시우는 무의식적으로 윤희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소리로 지나가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요?” 윤희가 물었다.
“어? 아.. 아니야. 잠시 딴 생각이 났어. 그럼 원래 남자친구와는 어떻게 됐어? 왠지 남자친구와도 결국에는 헤어졌을 것 같은데.”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난지 일 년 정도인가 후에 남자친구랑 결혼했어요.”
“아, 정말? 예상 밖인데.”
“네. 뭔가 좀 이상하죠?”
“그러게. 이상하다.”
“원래 세상은 이상한 것 같아요. 이 친구도 신기하게 결혼해서 아주 잘 살고 있어요.
“진짜? 그래도 잘 산다니 다행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네.”
“이 친구들을 보면서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두 친구가 결혼까지 하는 상황이 워낙 일반적이지 않아서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것도 같아.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니까 더 그렇겠지.”
”물론 잘 살고는 있지만 말이에요. 잘 살지만, 잘사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고. 잘 살지만, 이렇게 잘 사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어요. 저도 언젠가 하게 되겠죠.”
“맞아. 좋은 사람 만나게 될 거야.”
“교수님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교수님의 결혼 생활은 어떤지 궁금해요. 사모님에 대해서 얘기하시는 걸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사모님이랑 잘 지내시는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뜻밖의 질문이다. 시우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음..” 뜸을 들인다.
윤희는 말하기를 망설이는 시우의 표정을 읽었다. “제가 불편한 질문을 한 거면 얘기 안 하셔도 돼요.”
“불편한 질문은 전혀 아니야. 결혼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
“마음의 정리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궁금한 눈초리로 시우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요새 사이가 좀 안 좋아졌어.” 말을 하다 잠시 멈추었다. “사이가 안 좋다는 말 보다는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한 거 같아. 특별한 문제가 있다거나 크게 싸웠다거나 하지는 않았거든.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두 분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잖아요? 권태기 같은 거 아니에요. 부부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글쎄. 권태기라.” 시우는 잠시 생각을 한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작은 생각의 차이가 있기는 해. 내가 볼 때는 별것도 아닌데.”
“생각의 차이요?”
“응. 사실은 말이야. 서교수와 가깝게 지내는 걸 와이프가 좀 걱정하고 있어.”
“정말이요? 사모님이 저를 알고 있나 봐요?”
“그럼 알지. 내가 서교수 얘기 가끔 하거든. 서교수와는 친한 동료이고 학문적 교류를 하는 거일 뿐이라고 말했었거든. 와이프도 서교수와 내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신경이 쓰이나 보더라고. 나는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겠지 하고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하고 있고.”
“그렇구나. 어찌됐든 저 때문에 두 분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은 거네요?”
“그건 절대 아니야. 누가 됐든 이성이랑 가깝게 지냈으면 신경 쓰였겠지. 와이프도 회사에 친한 남자 동료가 있거든. 심지어 그 동료는 와이프를 좋아했었어. 그래도 나는 전혀 신경을 안 썼거든. 그런데 내가 그 동료를 신경 안 쓰는 것도 서운해 하더라고. 얼마 전에 이 문제로 좀 다퉜어. 아니 그런데 자기도 남자 동료랑 친하게 지내면서 내가 서교수랑 가깝게 지낸 걸 이해 못 주고 말이야. 또 그 남자 동료랑 가깝게 지내는 걸 내가 질투하기를 바라고. 이런 게 전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오늘 서교수랑 얘기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떤 얘기때문에요?”
“친구들 이야기 들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의 마음은 오묘한 구석이 있구나.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해.”
“그건 맞아요. 저는 삼십 년을 넘게 살았어도 아직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 나인가 싶을 때가 많아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뻔한 것 같기도 하다가 어떨 때는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 같기도 하거든요.”
“그건 그래. 사람의 마음이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해. 모순적인데도 많고.”
“전적으로 동의해요. 제 자신을 봐도 엄청 모순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서교수가? 서교수는 그다지 모순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저요 완전 모순 덩어리에요. 제가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지 말씀 드리면요. 저는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박테리아부터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가요.”
“어떤 면에서 평등하다는 거지?” 시우가 물었다.
“생명의 가치가 평등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박테리아 목숨보다 제 목숨이 더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나 박테리아나 그냥 자연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일 뿐이죠.”
“서교수가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것 같긴 한데. 아주 아주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적으로 아주 고등한 외계인이 지구를 바라볼 때라던지 말이야. 그렇긴 해도 뭘 그렇게까지.”
윤희가 말을 계속 이어간다. “더 많은 세포조직으로 이루어졌다고, 더 많은 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물학적 구조가 더 복잡하다고, 더 다양한 생화학 반응을 한다고, 더 오래 산다고, 유전적으로 인간과 더 가깝다고, 인간과 더 친밀하다고, 인간과 함께 생활한다고, 더 고도화 된 문명을 이루었다고. 그 어떤 것도 생명의 가치나 존엄의 우열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고 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은요. 이렇게 생각은 하지만 이런 저의 신념을 지키지 않는다는 거에요. 끊임 없이 배반하고 또 배반하면서 살고 있어요.”
“어떻게 배반한다는 거야?”
“세균성 감염 질환에 걸리면 항생제를 먹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모기를 죽이기도 하고요.”
“그거야. 평등해도 어쩔 수 없지.”
“제가 자다가 모기를 죽일 때를 예로 들면요. 모기 탓에 한참 잠을 못 들다가 죽이기로 결심하고 방의 불을 켜요. 그러면 보통 모기는 어디로 숨었는지 쉽게 눈에 안 띄잖아요.”
“맞아. 꼭 그러더라고.”
“그러다 못 찾고 불 끄고 다시 누우면 잠시 있다 귓가에서 앵앵거려서 이번에는 꼭 죽이고 말겠다고 다시 불을 켜게 되죠. 그때부터는 평등이고 뭐고 없이 모기를 찾아서 죽이려는데 혈안이 돼서 미친 듯이 눈에서 레이저 쏴대요. 그러다가 모기를 발견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벽에 앉은 모기를 때려 죽이죠. 그럼 모기의 몸은 완전히 터져서 납작한 형태로 벽에 달라붙게 되고 벽은 모기가 빨아 먹은 저의 붉은 피로 얼룩지게 돼요. 그런 다음 물티슈로 모기의 사체와 피 얼룩을 닦아내요. 그런 다음 불을 끄고 다시 자려고 누우면 그때부터 어떤 희열 같은 게 몰려와요. 어렵게 모기를 잡아 피 터지게 죽이는 순간의 쾌감이 막 떠올라요. 그러다 잠시 후 쾌감과 희열을 느낀 제 자신이 싫어져요.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다고 겉으로만 생각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러요. 이상화된 가짜 나를 만들어서 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여요. 모기를 죽일 때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쾌감을 느끼니 말이에요. 제가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건 위선이죠. 그러다가 그런 생각해도 해요. 모기를 죽일 때 죄책감을 느끼라고 사회로부터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왜 동물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과거와 현재가 많이 다르잖아요. 동물권 같은 거요. 개인 단위에서 보다 시대가, 사회가 규정지어 개인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걸 수도 있잖아요.”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동물 학대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과거와 완전히 다르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이 시대가, 내가 속한 사회가 만들어 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무섭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모기에 대해서 이중잣대로 대하는 것처럼 혹시 나도 모르게 인간에게도 그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한적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걱정 또한 인간과 모기를 평등하게 보지 않고 차별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정말 웃긴 건 뭔 줄 아세요?
“뭔데?”
“그럼에도 지금 저는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에요. 이 얼마나 모순적이에요. 저는 정말로 모순적인 사람이라고요.”
“하하. 들어보니 논리로만 따지면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한데. 모기 죽이는 거를 이렇게까지. 그런 논리라면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 먹는 것도 좀 그런 거잖아. 그렇다고 호랑이한테 너 왜 그러냐고 할 수도 없고 말이지.”
“호랑이는 자신이 사슴이랑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것도 그러네. 호랑이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지. 하하. 맞아 사람은 모순덩어리야. 그건 엄연한 사실인 것 같아.
인간은 모순적이고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를 때가 많다. 조금 전 윤희와 산책을 하면서 느꼈던 설렘은 도대체 혹시 진짜였던 건 아닐까?
대화가 멈추었다. 침묵이 흐르니 풀벌레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밤이 깊어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어느새 사라졌다.
윤희가 침묵을 깬다. “교수님, 제가 오늘 말이 너무 많았죠? 저 혼자 계속 얘기한 것 같아요.”
“아니야. 오늘 해준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듣게 되더라고.”
윤희가 주저하면서 말한다. “저 교수님 좋아해요.”
“뭐라고?” 시우는 윤희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깜짝 놀랐다.
“저 교수님 좋아한다고요.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시우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흐른다. 침묵은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시우와 윤희의 몸이 서서히 가까워 진다. 질량이 있는 두 물체가 서로 끌어 당기 듯 상대에게 끌려간다. 끌림은 누군가의 의지라기 보다 일종의 자연법칙처럼 보인다. 휘어진 공간 안으로 미끄러지듯 둘 사이의 간격이 좁혀진다. 얼굴이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정도로 가까워 졌고 닿으려는 순간 동시에 멈칫한다. 그대로 얼어 붙었다. 시간이 멈춘 걸까? 아무런 미동도 없다. 뜨거운 날숨만이 서로의 코끝을 데운다. 멈추어선 상태로 그 숨결이 전하는 온도를 가만히 음미한다. 끈적한 향의 와인이라도 섞어놓았을까, 음미하다, 음미하다, 음미하다 못해 숨결에 취해버렸다. 묘한 긴장감이 주위를 감싸고, 야릇한 전율이 전신에 흐르고, 심장은 갈비뼈를 빠르게 두드리고, 온몸에 솜털이 쭈뼛쭈뼛 거리고, 홍조는 살갗 밖으로 옅게 스며 나오고, 거칠어지는 호흡을 상대에게 들킬까 차분히 누른다. 정지 화면 마냥 계속 멈추어있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촉촉함과 달콤함이 퍼져나간다. 자연스럽게 엉키고 엉켜간다. 뜨겁고 뜨겁게 섞이고 섞인다. 달라붙은 입술은 마치 강력이 작용하여 단단하게 한 덩어리로 결속된 입자와 같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전자의 요동 같이 뇌에서 벌어지는 엑스터시의 향연. 입맞춤만으로 가능하다는 게 놀랍다. 어떻게 이보다 짜릿할 수 있단 말인가? 하와이에서 보냈던 자극적이면서도 도착적이었던 그 긴 밤조차 지금의 짧은 순간 보다 육체적이지 않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의 틈새 사이사이로 달빛, 별빛, 불빛만이 남아 입맞춤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 온전히 둘만의 멈춰버린 시간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입맞춤은 천천히 멈춰져 간다. 두 사람은 아쉬움에 쉽사리 끝내지 못하고 가벼운 키스를 짧게 짧게 반복해서 주고 받는다. 점도 높은 끈끈한 치즈를 어렵사리 끊어내듯 시간을 두고 입맞춤을 느릿하게 끝냈다. 주위는 아쉬운 마음을 품은 훈훈한 공기로 가득하다. 피부에 오른 열을 식히고 가쁜 호흡을 가다듬는다. 까만 밤 속 생생한 로맨스는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뇌는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이러면 안 된다. 미래에 지나가 바람을 피울지언정 나는 이래서는 안 된다.’
“나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내 마음을 모르고 있었나 봐.” 시우가 말했다.
“아!” 윤희는 작은 탄성을 냈다. “그렇다니 기뻐요.”
“그런데 우리 이러면 안돼.”
“알고 있어요.” 윤희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 가느다란 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우리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으면 해요.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지는 말아요.”
묘한 뉘앙스가 담긴 윤희의 말에 시우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윤희도 그 침묵의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시우는 윤희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강변북로에서 바라본 한강은 유난히 깊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