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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는 퇴근하려고 교수실에서 막 나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여 날이 차츰 어두워지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한 쪽 구석에 다투고 있는 학생 두 명이 보인다. 두 사람은 커플처럼 보이며 여자가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모양새다. 그런데 두 명 모두 낯이 익다. 가만히 보니 두 사람 모두 시우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다. 남자는 예전에도 시우의 수업을 들었었다. 학점을 A에서 A+로 올려달라고 억지를 부리던 바로 그 학생이다. 첫 수업에서 그 학생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다시는 자신의 수업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그 학생의 황당한 행동을 봤기에 둘이 싸우는 이유가 뭘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때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고 그들의 과거와 미래가 계산 됐다.
남자는 이번 학기 시우의 수업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여자친구를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수강한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같은 과 후배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남자는 여자가 아닌 여자가 가진 배경을 사랑한다. 여자의 아버지는 연 매출 천 억 이상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집이 부자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된 후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처음에는 감정이 은근히 스며들게 하도록 하는 그리고 나중에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전략을 의도적으로 세웠다. 수업을 오고 갈 때 일부러 동선이 겹치도록 하여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었다. 가벼운 인사만으로 스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여자의 관심사를 미리 파악하고 대화 중에 그것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거기다 남자는 타고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 생각을 가진 선배가 재미있기까지 하니 여자는 그에게 호감이 생겼다. 선배랑 자주 마주치는 게 신기했다. 남자는 여자가 일부러 자신을 만나려고 저 선배가 이 길을 지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또 그것이 자신의 착각으로 여기게도 했다. 계획된 시점이 되자 남자는 대놓고 여자를 기다렸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다가가 매우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결국 둘은 사귀게 됐다. 남자의 적극적인 태도는 자신을 영원히 사랑해 줄 것만 같았다. 연애 초기에 여자는 자신을 왜 좋아하는지 남자에게 물어 보고는 했다.
“오빠! 오빠는 내가 왜 좋아?”
“당연히 예뻐서 좋아하는 거지.”
“정말? 진짜야?”
“응.” 남자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어떻게 외모만 보고 좋아할 수 있어. 다른 이유는 없어?”
“다른 이유 뭐?”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듯이 남자는 물었다.
“왜 있잖아, 그런 거. 착해서 좋다 던지, 도도해서 좋다 던지, 다정다감 해서 좋다 던지. 그런 성격을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면 취미 같은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 좋아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대개는 다 그렇지 않나? 어떻게 외모만 보고 좋아할 수가 있어.”
“나는 내 마음도 잘 몰라. 태어나자마자 이십 년 넘게 함께 산 내 자신의 마음도 모른다고. 하물며 다른 사람의 성격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야. 다시 말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예뻐서야. 수업 왔다 갔다 하면서 우연히 부딪쳤을 때 너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홀렸었다고. 그런데 만나보니까 마음까지 예쁜 거 있지.”
여자는 예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처럼 달콤한 말은 없었기에 남자에게 더욱더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지금 싸우는 이유는 남자가 자꾸 다른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봐서이다.
“왜 자꾸 지나가는 여자 쳐다보는 거야?”
남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몇 번을 봤는데 그래.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니라고.”
“내가 보고 있는 쪽으로 마침 그 여자가 지나 간 거뿐이라고. 눈을 감고 다닐 수는 없잖아.
“오빠 바람둥이야? 내가 그 동안 속고 만났던 거였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말도 안돼. 오빠 몰라서 그래? 그리고 멋진 남자가 지나갈 때 너도 자연스럽게 눈동자가 따라가던데. 하지만 오빠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 안 해. 그건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야. 지나가는 멋진 남자 쳐다볼 수도 있는 거지. 솔직히 나도 본 적은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오빠한테는 정말 너뿐이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는 그런 적 없어.”
남자는 바람 피울 마음이 전혀 없다. 적어도 결혼 전까지는. 남자는 여자친구와 결혼을 한 이후에 바람을 피우려고 한다. 결혼 전까지 여자친구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미래 계산에 따르면 남자는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을 한다. 삼 년 정도 지난 후 바라는 대로 지금 만나는 여자와 결혼한다. 남자는 계획대로 결혼한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바람을 피운다. 남자는 걸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을 하지만, 여자가 의심할 만한 일이 발생해 부부 관계에 큰 위기를 겪게 된다. 남자는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위기를 넘기고 그 이후로는 더 철저하게 조심한다. 남자는 회사를 다니면서 협력업체로부터 부정한 돈을 정기적으로 받는다. 관행 같은 것이기 때문에 걸리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에서 십 년을 일하고 장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임원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일에만 몰두하여 장인의 신임을 얻는다. 여자는 아버지 회사에 등기임원으로 이름만 걸쳐 놓고 실질적으로 일은 하지 않고 급여만 받는다. 시간이 흘러 장인은 은퇴를 하고 남자는 회사의 대표이사가 된다. 회사를 크게 성장시키기 위하여 일도 열심히 하지만, 횡령, 배임, 자회사 일감 몰아주는 방식으로 사적인 부를 축적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자는 살면서 마음 한 편이 늘 불안하지만, 자신의 방식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는 저 인간의 비열함에 화가 난다. 그리고 비열한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현실에도 화가 난다. 언젠가 마음이 다치고 상처나 아파할 저 여자를 생각하니 더 화가 난다. 저 커플에게 달려가 여자에게 지금 당장 헤어지라고 말하고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고 싶다. 화가 풀릴 때까지 패고 또 패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시우는 발걸음을 돌려 커플을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학점을 올려달라고 했을 때 과거가 계산된 결과를 보고 남자를 잠시나마 측은해했던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 주차장 가는 길에 뒤에서 누가 불러서 돌아보니 윤희이다. 퇴근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윤희가 환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집으로 가시는 거면 저 좀 태워주세요.”
“서교수, 퇴근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당연히 같이 타고 가야지.” 윤희의 환한 미소에 안 좋았던 기분이 금새 풀렸다.
시우가 운전하는 차는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다. 서강대교 부근을 지난다.
“오늘따라 야경이 더 예뻐 보이네요. 특히 저는 강변북로 이 구간의 한강 풍경을 좋아하거든요.” 윤희가 말했다.
“정말? 나도 그런데. 여기 진짜 예쁘지. 이 쪽으로 드라이브하면 왠지 기분이 좋아져.” 시우는 윤희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신기했다.
“맞아요. 기분 좋아져요. 그리고 오늘 따라 강물이 더 깊게 흐르는 것 같아요.”
“강물이 깊게 흐른다고?”
“네 깊다는 느낌이 들어요. 한강은 마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과도 같은 곳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한강을 보면 왠지 깊어 보여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일단 서울 자체가 한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잖아요. 사람들은 한강의 풍경을 보고 싶어하고, 한강이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어하고, 한강 공원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수백만 명이 매일 한강다리를 건너고 강변도로를 달리고, 한강물을 수돗물로 사용하고, 상류의 댐을 열면 한강 공원이 물에 잠기고, 비가 많이오면 한강이 범람하기도 하고, 삶이 힘들어 한강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한강은 서울을 반으로 가르기도 하고요. 의식은 하지 않지만 무언가 한강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한강은 깊은 무의식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듣고 보니 그러네.”
“교수님, 혹시 데이빗 린치가 연출한 영화 <블루 벨벳>이랑 <멀홀랜드 드라이브> 보셨어요?”
“그럼 봤지, 보기는 봤는데 워낙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블루 벨벳>에서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사는 아파트 이름이 Deep River에요.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나오미 왓츠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Deep River라는 곳에서 LA로 오거든요. 두 영화를 볼 때 Deep River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저는 한강이 딱 떠올랐어요.”
“아, 그랬구나.”
윤희의 말에 시우는 한강으로 추락한 사고가 떠올랐다. 그때 한강 깊이 들어갔었다. 그리고 마침 그 사고 구간을 막 지나왔다.
시우가 별 반응이 없자 멋쩍게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제가 너무 재미없는 얘기를 한 것 같네요.”
“아니야. 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보는 중이었어. Deep River, 전혀 기억이 안나. 어떻게 그런 디테일까지 기억하는 거야?”
윤희가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교수님, 학교에서 나오시다가 혹시 싸우고 있는 커플 보셨어?”
“응. 봤는데. 서교수도 봤구나.”
“거기서 싸우던 남자 학생이 예전에 제 수업을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어이없게도 학기 끝나고 자기 학점을 올려달라고 하지 뭐예요. 안 된다고 하니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면서 올려달라고 우기더라고요. 제가 화를 내면서 딱 잘라 절대 해줄 수 없다고 했어요. 생각할수록 황당한 거 있죠. 걔 진짜 이상한 애에요.”
시우가 아주 작게 탄성을 낸다. “아! 그랬구나. 그 학생 내 수업도 들었었거든. 그 때도 그랬어. 이상한 애 맞아. 지금도 내 수업 듣고 있어.”
“정말이요? 교수님 수업 때도 그랬구나.”
윤희를 바래다주는 길에 함께 이러 저런 얘기를 하고 나니 화난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학기가 끝났을 때 남자와 여자는 모두 A+를 받았다. 남자는 학점을 올려달라고 시우를 찾아 올 필요가 없었다.미래 계산이 되면서부터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많아졌다. 과거만 계산될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것만 같았다.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미래가 계산되고부터는 교수로서, 학자로서의 일도 잘 풀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논문을 쓴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은 어느새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미래가 계산되면서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