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은 더욱 그녀의 기분을 더 밑으로 끄집어 내렸다. “아.. 그.. 그렇구나.”
새끼 손톱만한 작은 야채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그릇을 싹 다 비웠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그녀는 화장실에 들러서 손을 씻고 나왔다. 그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그녀가 아직 생각나지 않았냐고 물었고 생각 중이라고 대답했다. 연지가 말한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어머니가 그와 만나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고, 목포에 가면서 했던 얘기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던 도중 현기증이 난 건 진짜지만, 자리에 주저앉은 건 일부러 그랬다고 했다. 효민에게 초대장을 주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연지와 만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효민이 자신을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하지 않았다면 초대장을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연지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효민과의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연지가 모르는 사실 하나가 떠올랐고, 차는 서초IC로 진입해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그녀가 또 한 번 묻는다.
“아직 생각 안 났어? 벌써 서초동에 왔다고. 방배동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두 개 얘기했는데, 네가 하나 더 얘기해줘야지. 안 그러면 재미없단 말이야.” 그녀가 보채듯이 말했다.
“하하. 생각났어.”
“와! 드디어 생각났구나. 얼른 말해줘.”
모르는 사실이 생각났다는 말에 밑으로 끌어내려갔던 연지의 기분이 순간 들뜬 상태로 바뀌었다.
“내가 효민이와 인터뷰하고 초대장을 줘서 전시회에 같이 오게 됐잖아.”
그를 보며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계기판의 희미한 빛을 받아 궁금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사실, 나 효민이하고 인터뷰했을 때, 그때 말이야. 효민이에게 호감을 느꼈어.”
궁금증으로 반짝이던 눈빛의 생기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실눈으로 그를 보며 반문한다. “효.. 효민이에게 호감을 느꼈었다고?” 그녀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다.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 탓에 그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점에 호감을 느낀 거야?”
“효민이가 인터뷰를 위해서 사전에 내 작품에 대해서 공부를 엄청 많이 해서 놀랬어. 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감상과 분석이 녹아 있는 수준 높은 질문을 계속해서 크게 감동받았어. 작품의 의미, 작가의 의도, 감상자의 시선, 기술적인 부분, 작품에 쓰인 재료, 작품 간의 연계성. 이런 질의응답이 계속 오가다 보니 원래는 한 시간 예정이었던 인터뷰를 무려 네 시간이나 했어. 그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이 여자 뭐지, 하고 호기심이 생겼어. 자기 일에 열정적이고 지적인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호감을 느꼈던 것 같아.”
“외모에 끌린 건 아니고? 효민이 학교 다닐 때부터 인기 많았어.”
“외모도 매력적이지. 외모도 한 몫을 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때는 의식적으로 외모에 끌렸던 건 아닌 것 같아.”
“그럼 아까 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그날 효민이가 쓰러졌으면 내가 아닌 효민이랑 사귀고 있겠네? 목포도 나랑 가지 않고 효민이랑 갔다 왔을 것이고.”
그는 코에서 바람이 새는 웃음 소리를 내며 말한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건 일어나지도 않은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인 걸. 효민이가 쓰러졌을 리도 없고 쓰러진 건 연지였고 지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게 중요하지.”
연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기분 나빴다. 그 웃음소리는 자신을 별거 아닌 것에 신경 쓰는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살면서 이성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마음이 끌리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설사 연인이나 배우자가 있는 상황이라도 말이다. 연지 또한 정호를 만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간 적이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그러한 생각이나 상상조차 스스로 억누른다면, 그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거다. 그건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은 상상으로 그쳐야 한다는 압박이 있고, 누군가에게 끌린 적이 있다고 연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순리로 여겨진다. 그는 연지에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한 건 그녀가 제안한 게임 때문이었다. 심지어 효민에게 호감을 느낀 건 그녀를 알기 전의 일이다. 이 모든 걸 감안하고도 연지는 기분이 나쁘다. 다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여자친구가 들으면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래도 효민과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또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닐까? 혹시 나 몰래 둘이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엄마가 반대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또한 은근히 거슬린 상황에다가 효민이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난다. 화를 내면 꼴만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계속 심장이 쿵쾅, 쿵쾅거리고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정호는 효민이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연지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효민이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바로 연지에게 끌렸고, 그 사실은 오히려 연지가 더 매력적이라는 방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민이에게는 표현조차 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거리낄 게 없다.
방배동 함지박 사거리를 지나기 직전이다. 직진 신호가 꺼지면서 노란 불이 들어왔다가 빨간 불로 바뀌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연지는 미처 노란 불로 바뀌는 걸 못 봤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사거리 안으로 진입했다. 정호가 신호가 바뀌었다며 멈추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차는 사거리 안에 들어갔고 그녀는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밟고 속도를 줄였다. 이때 사거리 왼쪽 방면에서 출발한 차가 연지의 차 트렁크 옆을 받는 사고가 났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냥 달렸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차가 받치는 순간 연지는 왼쪽 유리에 “쿵”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이 사고로 연지는 가벼운 뇌진탕을 진단받았고, 정호는 목이 결리는 정도이고 다른 부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