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킥더드림 Sep 21. 2024

연모지정 5

카페에 온지 두 시간이 다되어 가고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연지는 1층에 내려가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1층에서 컵과 접시를 반납하면서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는 여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와 남자가 같이 카페를 운영한지 3년 정도 되었고 1년 전에 결혼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집은 서울이라고 했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정호는 짐작하고 있었다. 왜 목포에 내려와서 카페를 개업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정호는 궁금했지만 초면에 그런 것까지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연지는 아인슈페너를 먹으러 서울에서 왔고 자신이 먹어본 아인슈페너 중에 가장 맛있었다고 했다. 그 말에 여자는 처음에는 놀란 눈빛을 보였고 이내 기쁨이 가득 배어 있는 표정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커피를 내리던 남자도 그 말을 듣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쿠키 두 개를 선물로 주었다. 연지는 처음에 괜찮다며 사양하다가 못이기는 척하면서 받았다.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여자와 남자가 동시에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앵무새들이 그들을 따라서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하고 또박또박 말한다. 따라 하는 앵무새의 말이 재미있어 두 사람은 마주보고 피식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진짜 너무 좋았어. 다음에 와서는 하루 자고 가자.” 차에 시동을 걸면서 연지가 말했고 차는 경쾌한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한다.

정호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좋지. 다음에 오면 맛있는 것도 먹고 케이블카도 타보자. 여기 케이블카 한 번쯤 타 볼만해. 산도 넘어가고, 바다도 건너 가는데 마치 인간의 마음 같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도 하고 단단한 땅 위를 지나갔다, 깊은 물 위를 지나갔다가 하는 게 말이야.”

“너무 타고 싶다. 다음에 꼭 같이 타자.”

자동차는 목포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린다. 가는 길에 한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연지는 별 생각 없이 운전을 한다.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좋다. 머릿속은 비워지고 마음은 편안하다. 근심, 걱정을 남겨두고 지구 반대편의 에메랄드색 바다가 펼쳐진 휴양지에 와있는 기분이다. 눈 앞에 이국적인 풍경이 있지 않음에도 마음은 그러하다. 고속도로에 진입한지 두 시간 정도 흘렀을 때 문득 이렇게 평온한 상태가 언제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이 평온함이 사라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반면 정호의 머릿속은 연지의 기린 환각으로 가득 차 있다. 분명히 기린이 나타나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어렸을 때 트라우마로 남을만한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불행한 가족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을까? 왕따였을까? 오히려 누군가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무의식에 어떤 죄책감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린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맥락 없이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튀어나온다. 아무리 뇌를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면서 생각해 보아도 작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다.

날이 서서히 기울고 있다. 아직은 고속도로에 차가 그리 많지 않다. 금요일이니 수도권에 가까워질수록 교통량이 많아질 것이다. 연지는 이렇게 말없이 계속 가면 평온함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배 안 고파?” 창 밖을 바라보는 정호에게 그녀가 물었다.

“슬슬 배가 고픈데.”

“행담도 휴게소에서 저녁 먹자. 그런데 혹시 고민 있어? 창밖을 보는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여.”

“고민 있는 건 아니고 작품 생각하고 있었어. 무언가 새롭고 기발한 착상이 떠오르지 않아서 표정이 그랬나 보다. 그런데 담배 피우고 싶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아직은 생각이 안 나. 우리 목포로 내려가면서 서로가 모르는 사실을 하나씩 얘기했던 거 너무 재미있지 않았어?”

“응, 재밌었어. 일부러 주저앉았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했어. 그리고 내가 연지 휴대폰을 몰래 본 걸 얘기해서 그건 아직 좀 신경이 쓰여.”

“나는 재미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연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상대를 더 잘 이해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목포로 갈 때 서로 상대가 모르는 사실을 하나씩 털어놓는 것은 일종의 게임이나 놀이와 같았다. 즐거운 놀이에 불편하거나 언짢은 감정이 끼어들 공간은 없다. 자신이 모르는 사실이 또 어떤 것이 있는지 연지는 알고 싶었다. 이 놀이가 평온함 뒤에 붙어있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잠재워 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졌다. 차는 희미한 전조등에 의지해 시커먼 어둠 속을 달리고 있고, 실내는 계기판과 전장에서 나오는 옅은 빛이 전부다. 연지는 그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어둠이 내려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계속 둘이 있었지만 차 안이 어둠으로 채워지니 더욱 둘만의 공간이 된 것 같고 어둠이 자신과 그를 단단하게 묶어 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어둠이 왠지 서로 모르는 사실을 털어놓는 놀이를 조금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든 것 같다.

“심심한데 이번에도 서로 모르고 있는 사실 하나씩 말하는 거 어때?” 연지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하자고?”

“응, 한 번 더 하자. 아까 너무 재밌었단 말이야. 모르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더 친밀해진 느낌도 들었어.”

“나는 당장 떠오르는 건 없어서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생각해 봐.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럼, 내가 먼저 말할 게.” 연지는 말을 하다가 말고 멈칫멈칫한다. “사실.. 사실은 말이야. 우리 사귀는 거 엄마가 반대하고 있어.”

“그렇구나. 이번에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네. 내 직업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반대하시는 건가?”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기분 나쁜 건 아니지?” 

“기분이 왜 나빠?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 딸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어머니 마음은 당연한 거지.”

연지는 이 얘기를 하면 그가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걱정하거나 아니면 기분이 언짢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아 했고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는 기미가 전혀 없다. 그의 얼굴을 봤다. 희미한 빛이 비치는 그의 얼굴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말은 진짜처럼 보인다. 기분이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기분이 좋거나 흐뭇할 때 나오는 그런 미소는 아니었다. 기분이 이상하고 씁쓸할 때 나오는 그런 미소였다. 어두워서 정호는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이해를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가 당황하거나 걱정을 했다면 엄마의 반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으로 인해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아 할 수 있냐고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하다. 연지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느새 행담도 휴게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 모두 배가 많이 고프다. 비빔밥, 제육볶음, 우동을 시켜서 나눠 먹는다. 

“내가 모르는 사실 생각났어?” 연지는 우동면을 소리 나지 않게 먹으면서 물었다.

“아니. 생각해 봤는데 잘 떠오르지가 않네.”

“사소한 거라도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을 거야. 잘 생각 해봐.”

“그러게 있기는 있을 텐데 말이지. 생각해 볼 게.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떠오르겠지. 어머니가 우리 사이 반대하는 건 몰랐던 사실이기는 한데, 일부러 주저앉은 것만큼 놀랍지는 않았어.” 정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전 04화 연모지정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