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는 퇴근하고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왔다. 현관문 옆에 커다란 소포가 있다. 오늘 오기로 예정된 택배가 없는데 이게 무엇인지 어리둥절하다. 크고, 넓고, 납작한 것이 TV처럼 보인다. 그런데 박스 겉면에 전자제품 회사명과 제품 브랜드가 없는 걸 보니 TV는 아닌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사이즈의 TV를 설치도 하지 않고 문 앞에 두고 갈 리가 없다. 잘못 배달된 택배라고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박스를 살펴보다가 벽 쪽 상자 뒷면에서 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지에게
우리가 함께한 예술적인 시간을 기억하며..
정호가
정호가 보낸 그림이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낑낑거리며 집안으로 그림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정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고 이번에도 심장이 쿵쾅, 쿵쾅거린다. 신호가 가는 동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받아라. 받아라.”하고 작은 소리로 외쳤다. 네 다섯 번 정도 울리니 정호가 전화를 받는다.
“오랜만이네. 그림 받았어?” 정호가 말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그림 받았어. 그런데 아직 포장은 풀지 않았어. 어떻게 지내?”
“요즘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 너는 어떻게 지내?”
“나는 예전하고..” 그녀는 말을 하다가 멈칫한다. “요즘 회사가 바빠서 집, 회사, 집, 회사만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고 있어. 저기.. 우리 한번 보자.”
“나 여자친구 있어. 너도 만나는 사람 있다고 들었어. 효민이 말로는 결혼할 거라고 하던데. 그럼 만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지 않나? 그리고 나..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 헤어질 거야. 한 번 보자.”
그는 잠시 말이 없다. “음.. 안 만나는 게 좋겠어. 나는 헤어지지 않을 거거든.”
“난 우리가 무언가 특별했던 것 같아. 네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이는 뭐였던 것 같아?”
“우리 사이? 우리 사이는.. 우리는 예술이었어. 통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만 끊을 게.” 연지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연지는 잠시 벽을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서있다가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소파로 툭 던졌다. “우리가 예술이었다고? 씨발, 뭐라고 하는 거야.”
연지는 밖으로 나가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왔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서재에서 사무용 커터 칼을 가지고 왔다. 커터 칼로 아주 조심스럽게 그림의 포장을 뜯는다. 그림이 워낙 크기도 하고 꼼꼼하고 단단하게 포장이 돼있어서 다 뜯어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포장을 완전히 해체하고 난 다음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점까지 뒤로 갔고 커터 칼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림을 보자 마자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감상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계속 보고 있으니 양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다시 눈물 한 방울이 흐른다. 소매로 다시 눈물을 훔친다.잠시 후 등뒤에서 “또각또각,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들린다. 연지는 깜짝 놀랐다. 계속 뒤에서 “또각또각,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난다.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키가 가슴 높이 정도 되는 기린이 크고 예쁜 눈을 순진하게 껌뻑껌뻑하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이게 얼마만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2년도 더 됐다. 연지는 기린을 보자 온갖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고, 기린은 주위를 또각또각, 또각또각 돌아다닌다. 여기서 스스로 빠져나와야 한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