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요?”
기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군대 있을 때 고참한테 그리고 사회 초년생 때 상사한테도 느꼈습니다. 살인마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인간은 동일한 DNA 구조를 가지고 있고 똑같은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어째서 그들은 실행하고 나는 왜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장 환경의 차이, 타고난 기질의 차이. 그런 차이로 실행하고, 하지 않는 것이 갈린 다면 그것마저 운이 아닐까요? 성장 환경이나 타고난 기질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대부분의 살인자들은 성장 과정에서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어디선가 보았습니다.”
형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성장 환경과 관련이 있다고 저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사이코패스 기질을 타고난 사람도 어릴 때부터 사랑받는 환경에서 자라면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운에 의해서 삶이 좌지우지되는 거네요.”
“맞습니다. 그런데 살의를 느껴본 적이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제가 사이코패스라는 말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그렇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운은 좋지만, 삶이 재미없다고 하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공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재미있는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괜찮으면 다음 주 이 시간에 또 만날래요?”
형서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좋아요. 저도 오늘 재미있었어요. 다음 주에 또 봐요. 우리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신기하네요. 저도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방금했습니다.”
기우와 형서는 카페에서 나왔고 여의도역에서 9호선을 탔다. 형서는 1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 노량진역에서 내렸고 기우는 사평역까지 계속 타고 간다. 사람이 없는 한가한 지하철 한쪽 구석에 서서 윤희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확인만 하고 답장을 바로 보내지 않는다. 대신 형서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다.
『덕분에 오늘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주에 봐요~』
그리고 윤희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본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네. 사무실이 너무 허전해.
앞으로 아무 계획 없다는 거 사실이 아니지?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 쥐야 하는 거 아니야?
내일 같이 저녁 먹을 수 있어?
얼마 전에 진짜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거든^^ 오랜만에 같이 맛있는 거 먹자♥』
기우는 덜컹거리는 전철에 몸을 맡기고 한 10분 정도 메시지를 보기만 한다. 답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다. 긴 생각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듯한 표정으로 답장을 쓴다. 꽤 길게 썼다. 다 쓰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칫하고 누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한 5분 정도 자신이 쓴 메시지를 본다. 썼던 메시지를 다 지우고 다시 썼다. 이번에는 내용을 줄여 훨씬 간결하게 썼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윤희에게서 답장이 왔다. 기우는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전철 출입문 모퉁이에 몸을 기댄 채 음악을 듣는다. 평소 즐겨 듣던 음악인데 다른 때보다 더 흥겹게 와 닿는다. 고속터미널역에서 많은 사람이 내려서 열차 안에 몇 명이 남아있지 않다. 좌석이 군데군데 비어 있지만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리기도 하고 전철의 덜컹거리는 리듬을 계속 느끼고 싶다. 듣고 있는 음악과 덜컹거리는 리듬이 교묘하게 잘 맞아떨어진다.
형서에게서 답장이 왔다. 『저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게 엄청 오랜 만이에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제 삶이 재미있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기우는 사평역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