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2021년 5월 26일- 미지, 선아
퇴근 후 미지와 선아는 광화문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토마토 바질 샐러드, 고르곤 졸라 피자, 크림 파스타, 맥주를 시켰다. 레스토랑에는 빈자리가 없다.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한참 기다릴 뻔 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 하는 사람들의 복장으로 보아, 대부분 이 근처에서 일을 하는 직장인들 같다. 손님의 80% 정도는 여자이고, 다들 즐거워 보인다. 선아는 옆 테이블에 근사하게 차려 입은 커플에게 눈길이 간다. 마주앉은 커플은 손을 잡고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다.
‘잘 어울리네. 무슨 얘기를 하길래 저렇게 재미있을까? 나에게 저런 날은 다시는 오지 않겠지.’ 옆에 있는 커플을 보고 있으니 왠지 씁쓸하다.
“선아야, 머리 했네, 염색도 하고? 밝은 색이 너무 잘 어울린다. 완전 예뻐.” 주문을 마치고 미지는 바뀐 선아의 헤어스타일을 칭찬한다.
옆 테이블을 몰래 보고 있던 선아는 미지에게로 신경을 돌린다. “어?.. 아.. 고마워. 진짜 괜찮아? 주말에 과감하게 한번 바꿔봤어. 너무 짧고 밝은 건 아닌지 좀 걱정했는데..”
“아냐, 너랑 너무 잘 어울리고, 훨씬 더 세련돼 보여. 얼굴이 워낙 예쁘니까 과감한 스타일도 고급스러워 보이네. 진작에 이런 스타일로 해보지 그랬어. 다음 번에는 조금 더 과감하게 바꿔봐도 될 것 같은데, 너라면 충분히 소화할 것 같아. 내 눈이 정확한 건 알고 있지?”
“그럼 알고 있지. 하하하” 미지가 계속 칭찬을 하니 선아는 기분이 좋다.
“차 가지고 왔어?” 선아가 물었다.
“아니, 술 마시려고, 차는 두고 왔지.”
“잘했네.”
주문한 맥주와 샐러드가 나왔다. 둘은 맥주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씩 마셨다.
“그나저나 나랑 얘기할게 뭐야?” 선아는 궁금한 눈빛으로 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 그게” 미지는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으음.. 선아야, 전화로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던 얘기는 조금 이따가 할게. 그 얘기하기 전에 나 요새 좀 힘든 일이 있어.”
“힘든 일? 네가 힘든 일이 뭐가 있어. 야야,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애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선아가 목소리 톤을 높여서 말했다.
“너 또 돈 얘기하려는 거지? 야, 돈 있으면 좋긴 하지.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야.”
“뭐..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현금이 네가 가진 백분의 일만 있어도 좋을 거 같아.”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솔직히 돈이 많으면 좋긴 하지. 많은 부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까. 뭐 그런 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 사실 돈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많잖아? 나는 그건 아니라고 봐. 돈을 쫓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하고, 나는 그러고 싶지는 않아.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어쨌든 선아 네 말대로 돈 많으면 좋은 점이 엄청 많다는 걸 인정 안 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또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분명 아니야. 어려운 문제지. 뭐.. 어찌됐든 나야 특별히 운이 좋았던 경우고, 사실 너도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남편이랑 너랑 둘이서 벌고 연봉도 꽤 높잖아.”
“야야, 그래 봐야 우리는 월급쟁이지. 너랑은 많이 다르지. 버는 거 다 쓰고 살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엄청 많아. 어쨌든 그건 그렇고 힘든 일은 뭐야?” 선아가 물었다.
“나 지금 별거 중이야.” 미지가 선아를 쳐다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별거 중이라고?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남편이랑 별거하고 있다는 거야?” 선아가 크게 놀란다.
“응 맞아. 그럼 내가 누구랑 별거하겠냐? 말이 별거지 사실 결혼관계가 끝난 거나 다름없어.”
“어쩌다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라, 나 너무 놀랬어. 너 인스타 보면 남편이랑 연예인들이랑 찍은 사진은 계속 올라 오던데..”
“아직 일은 같이 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 일은 계속 해야 하잖아. 그나저나 너 인스타 계정 왜 닫았어?” 미지가 테이블 위에 있는 선아의 핸드폰을 본다. “너 핸드폰도 바꿨네? 그거 산지 얼마 안됐잖아.”
“아, 핸드폰은 잃어버렸어. 인스타는.. 음.. 인스타는 그러니까 그냥 귀찮더라고 사진 찍고 올리고 하는 게. 그래서 당분간 안 하려고. 그런데 왜 별거 중이야?”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가 나왔다. 미지와 선아는 남은 맥주 잔을 비우고 한 잔씩 더 시켰다. 선아는 피자 한 조각을 한입 베어 물었고, 미지는 파스타를 포크로 말아서 입 안에 넣었다.
“그게.. 별거 하는 이유가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
“진짜? 그랬구나. 너희 남편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별거 한지는 얼마나 됐어?”
“6개월 넘었어.”
“한 번 정도 실수로 그랬을 수도 있잖아. 이혼한 게 아니라 단순 별거 중이면 다시 관계가 회복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 한 번 실수가 아니야. 지금 바람 피운 상대랑 계속 만나는 것 같아. 그리고 나도 용서가 안되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리고 애도 없는데 억지로 결혼 관계를 끌고 갈 이유가 없잖아. 이혼은 못 하고 있는 거야. 10년동안 같이 회사대표를 맡아야만 해서 겉으로만 부부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구나. 힘들겠다. 네가 이런 일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네. 네 남편 정말 자상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줘 야할지 모르겠다.”
미지는 남편이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은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아도 자신의 남편도 바람을 피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지고 있고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미지도 남편이 자신의 남편처럼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선아에게는 오히려 위로가 된다. 선아는 그나마 자신의 남편은 가정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미지 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나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네가 제일 부러워.” 미지가 말했다.
“내가?” 미지로부터 자신이 부럽다는 말을 들으니 선아는 너무 의아하다.
“좋은 남편이랑 예쁜 애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 너무 잘 살고 있잖아. 학교 다닐 때도 너네 집에 놀러 가면 정말 부러웠었거든. 어머니께서 너한테 지극 정성이셨잖아. 그리고 우리가 가면 딸 친구 왔다고 진짜 잘해주셨고. 자상하게 대해주시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 우리 엄마는 아픈 동생을 돌보느라 나한테는 관심을 많이 쓸 수 없었으니까.”
“자유분방한 네가 모범생인 나를 부러워할 줄은 몰랐네. 그런데 미지야, 너 말대로 우리 엄마가 오빠랑 나한테 지극정성이었고 잘 해준 거 맞는데,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도 엄청 많이 받았어.” 선아는 파스타를 먹으면서, 말을 계속 이어간다. “지극정성이 과해지면 지나친 극성으로 변하거든. 누구나 보상심리가 있잖아. 본인이 공을 들인 만큼, 자식이 잘 따라와주길 바라는 거지. 우리 엄마는 자식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았어. 초등학교 때부터 지나치게 극성이어서, 놀지도 못하고 학원을 너무 많이 다녔고 그리고 공부하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어. 나나 오빠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어. 그저 자식을 통해서 엄마의 욕심만을 채우려 했던 것 같아. 엄마는 자식이 잘 되려면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자신만의 기준이 명확했고, 그것을 강압적으로 우리에게 시켰지. 우리가 못 따라오면 화도 많이 냈었고, 초등학교 때는 맞기도 많이 맞았어. 그리고 히스테리도 엄청 심해서 이유 없이 우리한테 짜증도 자주 냈어.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엄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이 나고는 했으니까. 아직까지 초등학교 때 엄마한테 맞은 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정도야. 중학교 때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아지면서, 엄마의 그런 면이 조금씩 없어졌어.” 선아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약간 흥분해서 말을 한다.
“네가 어머니한테 맞았다고?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 것 같았는데. 나는 너희 어머니는 완전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미지는 너무 뜻밖의 말을 들어서 많이 놀랬다.
“너는 친구니까, 당연히 좋은 모습 밖에 볼 수가 없었지. 휴~” 선아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그랬었구나.”
“내가 중학교 가면서 나도 좋은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다행이지, 만약에 그렇지 않았으면 엄마랑 갈등이 심했을 거야. 너처럼 학교 다닐 때 잘 놀고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했으면, 우리 엄마는 용납을 안 했을 걸. 지금 보면 네가 진정한 승자인데 말이지.”
“야야, 승자는 무슨.. 남편이 바람도 피우고.. 나도 무언가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한 느낌이 커 요새.”
“하하 내 입장에서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해. 나도 공허함이 크거든..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내가 바라던걸 이루어도 막상 기대만큼 만족감이 크지는 않더라고.. 그리고 진짜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게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을 많이 해, 요즘은.”
“그러게 정답은 없나 봐.”
“참, 그나저나 오늘 나한테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뭐야? 궁금하다.”
“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미지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파스타는 다 먹었고, 피자 두 조각만 남았다. 맥주 한 잔씩을 더 주문했다.
“응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선아도 미지를 따라 속삭이듯 말했다.
“음.. 내가 너한테 하려고 했던 말은..” 미지가 말하기를 주저한다.
“뭔데?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줘.”
“나 있잖아.. 그러니까..” 또 미지가 머뭇거린다.
“도대체 뭐야? 야, 속 터지겠다.”
“너 나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돼. 혼자 고민하다가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한테도 얘기 안하고 이상하게 생각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좀 얘기해줘.”
“나 사실.. 사실은 정인이를 좋아하고 있어.”
“정인이를 좋아한다고?”.
“응” 미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좋아한다는 게 그러니까.. 정인이를 이성으로써?” 선아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응” 미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선아는 그제서야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손을 입으로 막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한다.
“많이 놀랬지?” 미지가 물었다.
“그래 놀랬어. 어렸을 때 친구가 이성으로 보여?”
“사실은 어릴 때부터 혼자 좋아했었어. 어떻게 보면 나의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정말? 어릴 때 네가 정인이 좋아했었는지는 몰랐네. 그런데 첫사랑 못 잊고 그러는 건 남자가 그러지 않나?” 선아의 얼굴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다.
“첫사랑이라 못 잊고 그랬던 거는 아니고, 같이 일하면서 옛날 감정이 생겨난 거 같아. 선아야 나 어떡하지?”
“그런데 미지야. 남편이랑 별거 중이지 이혼한 건 아니잖아? 아직은..”
“그렇긴 한데,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상 부부로서의 관계는 끝났지. 서로 그걸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고 온전히 비즈니스 때문에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야.”
“하기야 남편이 상대를 계속 만나고 있다고 했지. 서로 관계가 끝난 걸 받아들이는 상황이라면 새로운 사람을 못 만날 것도 없지. 그런데 그 대상이 정인이라는 게 조금 놀랍긴 하다.”
“어떡하면 좋을까? 나 많이 좋아하고 있어.” 미지가 절박한 눈빛으로 선아를 바라본다.
“정인이도 널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니까, 고민이지.”
“둘 중에 하나지 않을까?”
“뭔데? 뭐?” 미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하거나, 아니면 자주 만나면서 네가 좋아하는 티를 은근히 내거나.”
“그러다 거절 당하면?”
“거절 당하면 어쩔 수 없지. 혼자 마음 아파하는 것 보다는 거절 당하더라도 결국에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거절 당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 화도 많이 날 것 같고.”
“그래도 감당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정인이가 먼저 다가 올 확률은 매우 낮을 거 같은데. 자주자주 만나다가 타이밍을 잡아서 고백을 하는 게 어때?”
“휴우..” 미지는 크게 한 숨을 쉬면서 남은 맥주를 다 마셔버린다. 잔을 비우는 미지를 보고 술이 약한 선아는 한 모금만 마셨다. 미지는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래도 선아 너 술이 많이 늘었다. 옛날 보다.” 미지가 말했다.
“뭐 회사 다니다 보니 조금 늘기는 늘었지. 갑자기 내 주량 얘기는..”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아! 미지야.”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선아가 미지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지금 정인이 작업실에 가볼까? 연락 없이 갑자기 가보는 거지. 너 정인이 작업실 어딘지 알지?”
“응, 어딘지 알긴 알지. 그런데 지금 바로?”
“응 바로. 와인 몇 병 사서 들고 가는 거지. 전시회 준비로 바쁠 텐데, 응원 차 친구들이 갑자기 찾아오면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자주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네가 남편하고 별거 중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고.”
“선아야,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렇지?”
선아는 자리에 앉아있는 미지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나온 미지와 선아는 와인 세 병과 안주거리로 치즈와 육포를 샀다. 둘은 정인의 작업실이 있는 홍대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