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6일- 미지, 선아, 진서, 정인

by 킥더드림

17. 2021년 5월 26일- 미지, 선아, 진서, 정인
미지와 선아는 정인의 작업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걸어서 5층까지 올라오니, 출입문 옆에 걸려있는 현판 ‘Studio 월하정인(月下情人)’이 보인다. 선아는 현판을 잠시 쳐다본다.
“월하정인이 작업실 이름인가 보네?” 선아가 말했다.
“선아야, 네가 먼저 들어가.” 미지는 팔꿈치로 선아를 가볍게 민다.
“하하 알았어. 미지야.” 선아는 미지를 보며 웃는다.
선아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정인아!!”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선아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정인을 반갑게 불렀고, 그 뒤로 미지가 따라서 들어갔다.
“정인아, 놀래앴.….지?” 작업실로 들어선 선아가 갑자기 말을 더듬는다.
안으로 들어가니 정인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서도 같이 있다.
선아는 진서가 있어 놀랐다. “어? 진서야, 여기 어떻게?”
미지, 선아, 진서, 정인은 아무 말도 안하고 서로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고만 있다. 정적이 흐른다. 미지가 정인을 짝사랑한다고 해서 갑자기 오자고 한 것인데, 정인의 작업실에 진서가 있는 상황이 혼란스럽다. 정인과 진서도 갑자기 찾아 온 미지와 선아를 보고 당황한다.
“미지랑 선아 왔구나.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여기 앉아.” 정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선아랑 있는데 네 얘기가 나와서 그냥 놀러 왔어. 작업하는 거 응원도 할 겸 해서. 그리고 선아도 작업실에 한번 와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우리 와인 마시자.” 미지가 손에 들고 있는 와인과 안주가 담긴 쇼핑백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 그랬구나. 잘 됐다. 나도 막 작업 마무리했거든, 하하하 그런데 와인 잔이 없는데, 어떡하지? 종이컵에 먹어도 괜찮나?” 정인은 지금 상황이 어색하지만,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럴 줄 알고 일회용 와인 잔도 사왔어. 플라스틱이라서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종이컵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하하 물론 안주거리도 사왔고.” 선아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진서, 선아, 미지, 정인이 테이블에 앉아서 와인을 마신다.
‘진서가 정인의 작업실에 그냥 놀러 온건 아닌 게 분명하고. 둘이 처음 만난 게 저번에 서래마을에서 만났을 때였는데.. 그때 둘이 눈이 맞았나 보네. 두 달도 안 됐는데, 둘 사이가 엄청 빨리 발전했네. 진서 성격에 이렇게 빨리 남자와 사귄다는 것도 신기한데, 아니지 아직 사귀는 게 아닐 수도 있지. 그나저나 미지는 정인을 좋아하고 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미지는 둘이 만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나? 미지가 어떻게 알았겠어. 아마 몰랐을 거야.’ 선아는 같이 있는 정인과 진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난처하다.
“정인아, 전시회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선아가 물었다.
“응 잘 되고 있어. 나도 열심히 하고 있고, 후배들한테 작업하는 거 도움도 받고, 갤러리에서 지원도 잘 해주고 있어서 차질 없이 잘 하고 있어.”
“그렇구나. 나는 정인이 네가 이렇게 유명한 화가가 될 줄은 몰랐어. 고등학교 때 미대 준비할 때는 산업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지. 사실 우리나라에서 순수 미술로 성공하기 쉽지 않잖아. 대단하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야?” 선아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계속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한데, 현대 예술은 컨셉과 유명세가 가장 중요한 거 같아. 좋은 작품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지만, 유명해진 뒤에 작품이 더 관심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거든.”
“아, 그렇구나. 그런데 작품이 알려지기 전에 유명해지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선아가 말했다.
“맞아. 아주 어려운 일이지. 관심을 끌만한 주제와 컨셉을 잡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요새는 예술의 개념 자체가 많이 확장돼서, 미술 전공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해. 자기만의 개성 있는 아이디어와 컨셉이 있다면, 꼭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등의 정통적인 방식이 아니어도 예술을 할 수가 있어. 온라인 영상, SNS 사진과 같이 어떠한 매체가 되었든 간에 자신의 개성을 표현만 할 수 있다면, 그거 자체로 예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이러한 생리를 전략적으로 이용한 부분도 있어. 작품을 만들 때 주목을 끌 수 있게 의도적으로 파격적인 컨셉을 잡는 것도 있고, 미지랑 같이 작업한 것도 하나의 예술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어. 어쨌든 미지 브랜드랑 콜라보 제안을 한 것은 미지한테도 도움이 되고, 나도 유명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정인은 정리가 되지 않은 아무 말이나 하고 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음, 개념의 확장이라, 무슨 말인지 이해는 잘 안 된다. SNS도 예술이 될 수 있다니, 그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어쨌든 여기 있는 네 작품을 아직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만 봐도 파격을 넘어 과격해 보이기는 하네. 확실히 시선을 끄네 끌어. 너 이번 전시회도 완판하면 한 턱 쏴라. 알았지? 하하하” 선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하하”
미지와 진서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특히 미지는 말이 거의 없고, 와인만 마시고 있다. 작업실 책상 뒤에 테라스로 나가는 문이 열려 있어, 가끔씩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이미 와인 한 병은 비웠고, 두 병째도 반 이상을 마셨다.
“야, 최정인, 네가 유명해진 건 다 내 덕인 거 알지?” 조용하던 미지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말해 다들 놀랬다.
“응, 그럼 잘 알지.”
“나도 너랑 같이 작업해서 우리 브랜드가 잘 된 건 인정해. 그런데 너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기분이 좀 나쁘네.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던 게, 날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한 거였어?”
“너 갑자기 왜 그래? 그만해.” 선아가 미지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미지야, 우리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접근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이용했다기 보다, 그때 너도 새로운 디자인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내가 디자인 아이디어가 있으니까, 같이 일 해보자고 제안을 했던 거였고. 솔직히 너랑 하는 작업이 잘 되면, 나도 유명해질 수 있다고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야. 너는 이미 유명한 디자이너이니까. 성공하면 서로 잘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래? 그럼 이용한 거 맞네. 어쨌든 나를 통해서 유명해지려는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진서랑 정인이 너희 둘이 무슨 사이야?”
“야 진짜 너 왜 그래? 그만해 미지야.” 선아가 미지의 팔을 잡아 당기면서 말린다.
“우리 둘이 사귀고 있어. 저번에 우리 넷이 만났을 때 친해져서, 얼마 전부터 사귀는 사이로 발전했어.” 조용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진서가 말했다.
“정인아, 너 진서 이혼한 거 알고 있지?” 미지가 말했다.
“미지야, 가자 가자.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왜 그래 자꾸.” 선아가 미지를 일으키려 하자, 미지가 뿌리친다.
“그럼, 알고 있지. 그런 거는 전혀 문제가 안돼. 그런데 미지야 너 오늘 왜 그래?” 정인이 당황해 하며 말했다.
“야 최정인, 너 나 이용했잖아. 너 나랑 같이 잤잖아. 나 남편이랑 사이 안 좋은 거 알고 있었고, 내가 너한테 호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나랑 같이 콜라보하고 싶어서 내 마음 이용해서 잠도 같이 잔 거였잖아.” 미지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진서, 선아, 정인 셋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진서야, 너는 괜찮아? 정인이 나랑 같이 잤는데, 상관없어?” 미지는 날카로운 눈매로 진서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그그거는 술 먹고 실수로..” 당황한 정인은 말을 더듬는다.
“미지야, 일단 흥분을 가라앉혀.” 진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독이듯이 말했다.
“야, 흥분하고 안하고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정인이랑 나랑 같이 잤다고, 괜찮은지 묻잖아? 네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든 거야. 알아?” 미지의 목소리는 격앙되고 분노에 차있다.
진서가 차분하게 말한다. “미지야, 사실 나는 둘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는 몰랐어. 그렇다고 너희 둘이 사귄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실수로 원나잇 한 거 같은데.. 그리고 이미 나는 정인이를 많이 좋아하고 있어.”
진서의 차분한 말투에 미지는 더욱 화가 난다. 미지는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하다. “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거 실수 아니었거든. 명백히 실수 아니었어. 네가 그러고도 친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당황한 표정으로 정인이 말한다. “미지야, 그날 우리 둘이 많이 취했었잖아. 그래서 실수..”
“실수 아니었다고, 네가 마음먹고 의도한 거잖아!” 미지가 정인을 향해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 선아는 대화에 전혀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미지는 테이블에서 일어나더니 더욱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진서를 노려본다. 테이블에 있던 와인 병을 들더니, 갑자기 진서의 머리를 세게 내려친다. 병이 깨지고, 병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인과 선아는 당황한 채 아무런 손도 못쓰고 멍하니 보고만 있다. 머리를 맞고 당황한 진서도 미지를 멍하니 쳐다본다. 미지의 얼굴은 더욱더 분노에 찬 표정으로 변했다. 미지는 테이블에 있는 다른 와인 병을 들어, 다시 한번 진서의 머리를 내려쳤다. 와인 병이 산산조각 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정인의 작품들과 작업실 벽은 와인으로 얼룩졌다. 진서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지는 쓰러진 진서를 내려다보고 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머리가 하얘진 정인은 그제서야 미지를 말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미지 등 뒤로 달려들었다. 정인이 지르는 소리에, 미지가 몸을 돌렸다. 미지가 몸을 돌리자, 미지 손에 있는 깨진 와인 병이 달려드는 정인의 복부로 향한다. 정인은 달려가는 관성을 제어하지 못했고, 미지의 손에 들려있는 깨진 와인 병은 정인의 왼쪽 하복부를 파고든다. 와인 병이 정인의 복부 안 깊숙이 들어갔다. 정인이 ‘컥’하는 소리를 낸다. 병에 찔린 부위에서 피가 스며 나와, 셔츠가 붉은 색으로 변한다.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진다. 미지는 멍한 표정으로 정인의 배에서 와인 병을 빼냈다. 정인은 피가 흘러나오는 배를 움켜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지는 여전히 깨진 와인 병을 손에 들고 있다. 선아는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서있고,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한다. 미지와 선아가 눈이 마주쳤다.
“미미미미미미.. 미지야.” 선아는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겨우 말했다.
“선아야, 나 어떡하지?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충동적으로 저질러 졌다. 미지를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미지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릿속이 하얗다. 미지는 쓰러져 신음을 하고 있는 진서와 정인을 바라본다.
“진서야, 정인아, 미미미..안해.” 미지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오른 손에 들고 있던 깨진 와인 병으로 자신의 왼 손목을 긋는다. 미지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그리고 한 번 더 손목을 세차게 긋는다. 더 많은 피가 손목에서 뿜어져 나오듯 흐른다. 현기증이 나고 어지럽다. 앞을 보고 있는 시선은 카메라의 포커스가 나가듯 희미해져 간다. 힘이 빠지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미지도 기절하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어어어어…어떡하지? 지금 이게 뭐어어..지?” 선아는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되고, 이게 무슨 일인지 혼란스럽다. 발만 동동 구르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때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통해서 나비 한 마리가 들어왔다. 나비는 쓰러져 있는 진서, 미지, 정인 위를 돌면서 날고 있다. 큰 원을 그리며 날아 다닌다. 선아는 멍하니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고 있다. 나비는 공중에서 몇 번을 돌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에 사뿐이 내려 앉았다. 선아는 핸드폰에 앉아있는 나비를 본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선아는 나비가 앉아 있던 핸드폰을 재빨리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저기요. 119죠? 제 친구들이 많이 다쳤거든요. 심하게 다쳤어요. 빨리 좀 와주세요.” 선아는 눈물을 흘리며 119에 도움을 청한다.
“주소요? 그러니까 여기가 홍대 근처인데요. 저기 그러니까.. 여기 주소가.. 아, 잠시만요.”
선아는 노트북이 있는 책상으로 뛰어가, 인터넷으로 지도를 검색해 위치를 알려준다. 선아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른다. 흐르는 눈물에 의해 얼굴에 묻은 와인과 화장이 점점 번진다. 진서, 미지, 정인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잠시 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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