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정인

by 킥더드림

18. 2021년 4월 3일- 정인
반포의 한 아파트.
“정인아, 일어나. 얼른 일어나. 도대체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어머니가 커튼을 열면서 정인을 깨운다.
커튼이 열리니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잠에서 깬 정인은 갑자기 늘어난 광양에 눈이 부시다. 가늘게 눈을 떠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편하게 자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해도 밤낮이 바뀌면 안돼. 일찍 자고 일찍 좀 일어나, 제발.”
“알았어.” 정인이 잠에서 덜 깨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촬영 알바하러 갔고, 아버지는 운동하러 가셨고, 너만 일어나면 돼. 어여 일어나서 씻고 밥 먹어. 너 밥 먹고 나면, 오늘 아빠랑 같이 영화도 한 편 보고 미술관도 갈 거야. 빨리 일어나.”
“엄마, 요새는 스트리밍으로 많이 본다니까, 그렇게 극장 자주 가는 거 귀찮지 않아?” 정인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나도 가끔 스트리밍으로도 보기는 본다니까, 그래도 극장에서 영화를 만나는 설렘이 좋아. 어쨌든 쓸데 없는 얘기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알았어.” 정인은 여전히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다.
“그리고 저번에 엄마가 아이디어 준 거 작품에 반영했어?” 어머니가 정인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뭐였지?”
“며칠 전에 얘기한 거 있잖아.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데, 스크린 속 연기하는 배우들 입에서 연필이 쏟아져 나오는 거야. 그런데 그 연필이 관객들 머리에 막 박히는 거지. 얘기해줬잖아, 기억 안나? 어떤 거 같아?”
“아 생각난다. 그런데 엄마, 난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아닌 거 같은데?”
“왜 배우들 입에서 연필이 나와 관객 입에 박히는지 설명이 안되잖아. 내가 납득이 안 되는 걸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어?”
“왜 설명이 안돼, 바보야. 요새 영화들은 너무 일방적이야. 관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안 준다니까. 감독이 자기 철학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한데, 한편으로는 소통할 여지를 남겨둬야 되는 거야. 영화 무지렁이 주제에 뭘 안다고..”
”음, 그래도 이번 전시회 주제랑은 전반적인 흐름이 안 맞는데.. 어쨌든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요. 하지만 엄마, 너무 기대는 하지마. 내가 영화 무지렁이라서..”
정인의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어유, 영화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나중에 무슨 미디어아트를 하겠다고..”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영화 잘 몰라도 미디어아트 할 수 있거든.”
정인은 일어나서 밥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씻고 그리고 자신의 작업실로 갔다.

얼마 전 미지와 얘기를 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바로는, 오늘 미지가 진서와 선아를 만난다. 미지한테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오늘 셋이 만나는 자리에 갈 계획이다. 셋이 저녁을 먹고 난 후 자리를 옮길 시간 즈음에 가려고 한다. 오늘 같은 날을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다. 선아와 미지는 중고등학교 때 동네 친구이다. 미지는 중학교 때부터 꽤 친했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로 친해졌는지는 기억은 안 난다. 미지와는 지금도 연락도 자주 하고 자주 보고 있다. 선아는 대학교 1학년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진서는 아마 나를 기억 못할 것이다. 진서는 모르고 있을 테지만, 진서와 나는 매우 특별한 인연이다.

2003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봄날. 미술학원 수업이 끝났다. 집으로 가기 위해 학원이 있는 상가 건물에서 나와 아파트 단지 안을 걷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꽤 늦은 시간이라, 길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까지는 한 블록 정도 남았다. 학원을 마치면 항상 거의 같은 시간이 되고, 언제나 같은 길로 집에 간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오늘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생각 없이 걷고 있었고, 그저 빨리 집에 가서 게임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집까지 한 블록을 남겨두고, 어디선가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안돼, 언니 안돼. 언니, 안돼. 언니, 언니~~” 비명 소리는 점점 커졌다.
비명 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렸고, 나는 소리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비명 소리는 계속 들리고 위에서 어떤 여자가 떨어지고 있었다. 쿵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던 아파트 건물 앞 화단에 떨어졌다. 내가 걷고 있던 보도블록과 화단은 바로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서있던 위치에서 여자가 떨어진 곳은 불과 3미터 혹은 4미터 정도 밖에 안됐다. 거의 바로 내 앞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떨어지는 속도가 일으키는 바람이 느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너무 놀란 나는 뒤로 넘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떨어지는 걸 눈으로 보고도 상황 파악이 잘 안됐고, 무슨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나는 일어나서 멍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언니, 언니, 엉엉엉 언니, 언니, 엉엉” 아파트 건물 위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계속 들린다.
떨어진 사람은 위아래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고,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이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바닥에 닿은 쪽의 두개골은 으스러졌다. 턱이 심하게 돌아갈 정도로 턱 관절이 깨졌다. 오른팔이 비틀어져 있는 것이 어깨도 심하게 부숴진 것 같다. 잠시 신음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이 없어졌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데, 눈은 뜨고 있다. 고개를 드니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베란다 난간에 몸의 반을 걸치고 계속해서 울부짖고 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고 지금 이 상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보았고 또 보고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뛰어 왔다. 또 다른 경비 아저씨가 뛰어 왔고, 한 명이 어디론가 다시 뛰어갔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극도의 공포감이 몰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미술도구를 버리고 나는 집으로 달려갔다. 도망치듯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울부짖는 비명 소리는 등뒤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다음 날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으로 동네가 떠들썩했다. 나는 그것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매일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다. 어떤 때는 내 자신이 떨어지는 꿈을 꾸기도 하고, 어떤 날은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떨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심한 우울증과 공포심에 학교도 휴학을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집중했다. 약을 먹으면 우울감과 공포심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일시적이었다. 악몽을 꾸는 것은 약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 사고가 난 장소는 너무 무서워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 올 때는 항상 그 길을 피해 멀리 돌아오고는 했다. 악몽을 꾸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이러한 공포심으로 신경쇠약은 날로 심해졌고,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 사건 이후 매일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야만 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지났을 즈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자 잔 날이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그 사건이 났던 바로 그 장소에 서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가로등이 주위를 밝히고 있다. 이상한 것은 어떠한 두려움이나 공포심도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후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눈 앞에서 날아다닌다. 나비는 내 앞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잠시 날더니, 어디론가로 느리게 날아간다. 나는 그 나비를 따라갔다. 나비가 날아간 곳은 그 아파트 건물 옆에 있는 놀이터였다. 나비는 계속해서 놀이터 주위를 날아다녔다. 나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나비에게 고정했다. 내 시선도 나비를 따라 움직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도 나비가 날아다니네. 나를 왜 이리로 데려 온 거지?’라는 생각을 꿈에서 했다.
그러다 나비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아, 꿈이었구나. 꿈이 너무 생생한데..’ 마치 현실처럼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꿈에서 나온 그 놀이터로 달려갔다. 빨리 뛰었다. 그 사건이 났던 장소를 지나, 놀이터 근처에 도착했다. 너무 빨리 뛰어온 나머지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가쁜 숨을 잠시 몰아 쉬고 놀이터로 가려는 순간, 놀이터에 누군가가 있는 걸 보았다. 내 나이 정도 돼 보이는, 한 소녀가 그네에 앉아 있다. 놀이터 옆 화단에 있는 큰 나무 뒤에 숨어, 그 소녀를 지켜봤다. 소녀는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그네에 앉아 울고 있는 소녀는 그날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던 바로 그 사람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무 뒤에서 계속 지켜봤다. 30분정도 울더니, 그 소녀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 울부짖던 여자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15층 정도 되는 것 같고, 불은 다 꺼져있다. 잠시 후 그 집 방에 불이 켜졌다. 놀이터에서 울던 소녀는 그날 비명을 지르던 여자임에 분명하다. 10분 정도 지나자 다시 불이 꺼졌다. 나는 다음날도 같은 시간에 놀이터에 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그 소녀는 그날도 홀로 그네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또 소녀를 지켜봤다. 언니를 잃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도 아팠다. 그 다음날에도 같은 시간에 놀이터에 갔다. 소녀는 또 그네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소녀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매일 같이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소녀를 매일 밤 보면서, 내 마음 속의 공포와 두려움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녀를 보면서 공포심은 함께 슬퍼하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됐고, 소녀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녀로부터 치유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조금씩 내 마음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일 밤 지켜보면서, 나는 그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지났다. 매일 밤 놀이터에서 울던 소녀가 갑자기 보이지를 않는다. 그 다음 밤도 그리고 그 다음 밤도 소녀는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놀이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와 소녀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기다렸다. 집에서 나온 소녀를 따라갔고, OO여중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수소문한 끝에, 소녀의 이름이 김진서라는 것도 알았다. 얼마 후 나는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진서를 본 이후 진서가 항상 마음 속에 있었다.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OO남자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진서는 OO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때 한번은 하교를 하던 진서 뒤를 따라가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늘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그날은 무슨 용기가 생겨서인지 진서에게 다가가서 전화번호를 물었었다. 하지만 진서는 차갑게 거절했다. 진서는 감정이 결여된 표정으로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어떠한 핑계나 이유도 대지 않았고 싫다는 말만을 하고 냉정하게 가버렸다. 나는 그때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 좀 더 진서 앞에 당당하게 나타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진서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이선아가 나한테 사귀자고 했다. 선아로부터 사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어리둥절했다. 선아는 반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다. 얼굴도 예뻤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매우 잘했다. 진서와 선아가 OO여고에서 전교 1, 2등을 다툰다고 알고 있었다. 예쁘고 인기 많은 선아가 사귀자고 하는데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선아를 만나면 공부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아를 사귀면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미술 실기도 열심히 준비했다. 선아와 나는 같은 대학교에 들어갔고,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우리는 헤어졌다. 선아를 만나면서도 나는 진서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선아를 만난 것도 언젠가 진서를 만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서와 나는 이러한 특별하면서 슬픈 인연이 있다.

대학 때도 우연히 진서를 본적이 몇 번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처럼 용기를 내서 말을 걸지는 못했다. 여러 번의 연애를 하면서도, 항상 마음 한편에는 진서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만났던 여자친구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에 따라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서를 사랑하는 것 또한 그때 받은 큰 충격이 상처로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사건을 함께 겪은 유일한 사람도 진서이고, 그날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진서이다. 우리는 같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진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당시의 공포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게 있다. 사실 나는 언젠가는 진서를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진서랑 친한 미지와 계속 연락을 하면서 지냈다. 미지는 이른 나이에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이다. 미지는 결혼을 했음에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돈 못 버는 화가였던 나는 미지의 명성과 인맥을 이용할 기회를 항상 엿보고 있었다. 미지가 자신의 브랜드를 대기업에 매각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들어야 하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 내가 콜라보를 제안했다.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그 때 같이 일을 하면서 미지의 남편이 바이섹슈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업계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했는데, 미지만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지금은 미지도 알고 있는 거 같고, 둘은 쇼윈도우 부부로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진서를 만나기 위해서 미지에게 연락을 할 예정이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하던 정인은 시계를 본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었다. 정인은 미지에게 전화를 건다.
“미지야! 뭐해?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려고 연락했지.”
“아 그래, 친구들이랑 있구나. 그럼 담에 봐야겠네.”
“진짜, 내 얘기를?”
“정말, 나 가도 되는 거야? 나야 좋지. 알았어. 그럼 갈게. 주소 좀 보내줘.”
“알았어. 이따 봐.”
정인은 작업실에서 나와 차를 탔다. 차가 막히지 않아 홍대에서 반포까지 20분이 채 안 걸렸다. 정인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서래마을로 걸어간다. 미지가 톡으로 알려 준 수제맥주 전문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가게 안은 빈 테이블이 없을 만큼 손님들로 차있다. 안쪽 끝에 진서, 선아, 미지가 앉아 있다. 미지가 정인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오른 손을 길게 뻗어 올려 정인을 향해 팔을 흔든다. 팔을 흔드는 미지를 보고 선아도 정인에게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진서를 만난다는 생각에 흥분이 된다. 정인은 셋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빠르게 걸어가 앉았다. 지금, 정인 앞에는 진서가 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어쩌면 사랑은 문명이 만들어낸 공산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뇌가 만들어낸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 경험이 아픔과 상처라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 뇌 속에 더 강하게 각인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과 상처 마저 달콤하다고 느껴야 살아갈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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