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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는 한 손에 방금 산 셔츠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다른 의류 매장을 둘러 보고 있다. 쇼핑을 더 할 생각은 없고 시간도 때울 겸 그냥 구경하는 중이다. 한참 옷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확신 없는 말투로 민구를 부른다. “혹시 민구?”
뒤를 돌아보니 키가 크고 검은색 오버핏 스웻셔츠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서있다. 누군지 모르겠다.
“민구 맞네.”
목소리가 매우 낯익다. 모자 밑에 가려진 얼굴을 자세히 보니 수겸이다.
“어! 수겸아.”
“긴가 민가 했는데 맞네 맞아.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잘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수겸은 반가움에 민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야? 나 방금 네 생각했었어. 진짜 너무 신기하다. 네 생각했는데 바로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에이 거짓말. 방금 내 생각했다고?”
민구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수겸이에게 보여준다. “응. 나 방금 여기서 셔츠 샀거든. 매장 안에 네 사진 엄청 크게 붙어있던데. 사진 보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고.”
“야, 그건 내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내 사진이 보인 거잖아. 내 생각한 거랑은 완전히 다른 거지.
“뭐.. 그렇긴 하지만, 사진 보고 이런저런 네 생각을 했어.”
“어쨌든 민구야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어디 가서 차라도 한 잔 할까? 시간 괜찮아?”
“당연히 시간 괜찮지. 같이 차 한 잔 하자. 그리고 나 가끔 네 생각해.”
수겸이 손바닥으로 민구의 어깨를 치며 말한다. “뻥 치지마.”
민구와 수겸은 의류 매장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과 티라미수 조각 케이크 하나를 시켰다.
“민구야, 진짜 반갑다. 너 멋있어 졌다. 예전에는 청바지에 후드티만 입고 다녔는데, 셔츠랑 코트 입으니까 완전 세련돼 보여. 그리고 학교 다닐 때보다 살도 빠져서 날렵해 보인다.”
민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고마워.”
“아까 네가 쇼핑했다는 옷 봐도 될까?”
민구가 쇼핑백을 건넨다. “그럼.”
수겸이 반듯하게 직사각형으로 접혀 폴리백에 들어있는 셔츠 두 벌을 쇼핑백에서 꺼낸다. “단색 화이트랑 블루 셔츠네. 꺼내서 봐도 되지?”
“응? 그럼 당연히 꺼내도 되지. 그냥 기본 셔츠야.”
수겸이 흰색 셔츠를 꺼내서 펼쳐 본다. “깔끔하고 예쁘다. 지금 입고 있는 깅엄체크도 너랑 잘 어울리는데, 요즘 같은 봄 날씨에는 이런 밝은 색의 기본 셔츠가 더 잘 맞을 거 같아. 음.. 내 생각에 너는 얼굴이 하얘서 화이트 보다 블루가 더 잘 어울릴 거야. 둘 다 잘 샀네.”
수겸이 흰색 셔츠를 잘 접어서 다시 폴리백에 넣었다.
“잘 나가는 모델이 잘 샀다고 하니까 기분 좋다.” 민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잘 나가는 모델 아니거든.”
“아까 너 봤을 때 모델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겠더라고. 누가 봐도 한 눈에 모델임을 알아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보이더라.
“나인 줄은 못 알아보고, 그냥 모델이구나 한 거야? 난 너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는데 말이지.”
“응. 너무 오랜만이라서 바로는 못 알아 봤어. 내가 눈썰미가 좀 없어. 그나저나 대학원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 갔었는데 어떻게 모델이 된 거야?”
“나 M전자에 들어갔던 거는 알고 있지?”
“응. AI 개발하는 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민구가 대답했다.
“맞아. 가전사업부에서 AI 개발 업무를 했지. 그때는 매일 코딩만 했던 것 같아. 입사하고 1년 정도 됐을 때 사내 모델 선발이 있었어. TV 광고 모델인 연예인과 함께 직원을 같이 출연시키는 프로젝트가 있었거든. 사실 그때는 정신 없이 바빠서 사내 모델 선발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같이 일하던 책임연구원님이 나를 추천했었더라고. 키가 커서 그랬는지 내가 여러 후보 중에 최종적으로 사내 모델로 선발이 됐어.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M전자 제품 광고에 나오게 된 거야.”
“그 광고 기억나. 네가 나와서 깜짝 놀랬었는데 그때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구나.”
“응. 그때만해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 그 이후에 광고를 보고 모델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와서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하게 된 거지.”
“그랬구나. 광고나 화보에서 너 보면 어떻게 모델이 됐는지 궁금했거든. 어때, 일은 재미있어? 수입은 어떤가, 회사 다니는 거 보다 나은가?”
“야,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내가 아는 모델이라고는 너 밖에 없는데, 너 말고 누구한테 이런 거 물어보냐?”
“일단 수입은 회사 다니는 거보다 훨씬 괜찮아.”
“그렇구나. 부럽다.”
“야 부럽기는.. 난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코딩하고 싶다. 모델은 일만 놓고 보면 재미있고 좋은데.. 정신적으로 힘든 게 많아. 외모로 뽐내야 하고 경쟁도 너무 치열하다 보니까 시기, 질투, 모함 이런 게 너무 심해 이 바닥은. 그리고 언제까지 모델 일을 할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하고. 아주 아주 잘 나가는 거 아니면 엄청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미래가 많이 불안한 직업이야.”
“그런 점이 있구나. 화려한 만큼 어두운 면도 있나 보네. 정말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아 맞다. 오늘 너 생일이잖아. 축하해! 그런데 생일날 쇼핑몰에서 혼자 뭐 하는 거야?”
“어? 내 생일인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기는.. 너는 내 생일 까먹었어? 네 생일이 삼일절이고, 내 생일은 광복절이잖아. 그래서 대학 때 네가 우리는 전생에 독립투사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러고. 우리는 특별한 인연이라면서 농담하고 그랬잖아.”
“아! 맞다. 기억난다. 네 생일은 광복절이지.”
“민구 너 완전 섭섭하다. 그리고 너 왜 내 톡 씹어?”
“톡? 무슨 톡?”
“내가 오늘 오전에 생일 축하 톡 보냈는데. 못 받았어?”
“뭐? 그게 네가 보낸 거였어?”
스팸이라고 생각한 톡이 수겸이가 보낸 것이었다니. 민구는 수겸이가 자신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랬다. 민구도 수겸의 생일이 광복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광복절마다 수겸이가 생각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야! 너 진짜 너무 한다. 나 작년에도 보냈거든. 그것도 아마 씹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너는 내 번호도 모르는 거야?”
“작년에도 너였어? 네 번호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민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번호를 검색한다. “반.. 수.. 겸.. 네 번호 여기 있네. 010-785..”
“야야, 그거 옛날 번호야. 몇 년 전에 번호 바꿨어. 내 번호 저장도 안 한 거야?” 수겸은 포크로 케이크 한 부분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번호 바꿨어? 바뀐 번호 나한테 알려준 거 맞아?”
“당연하지. 친한 사람들한테 다 보냈어.”
“그럼 내가 번호를 입력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수겸은 민구의 전화기를 가로채서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너 진짜 두고 봐. 내가 제대로 복수할거니까.”
“미안해 수겸아.”
“됐고 이미 나 맘 상했어. 그나저나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데 나 지우랑 이혼하려고 해.”
“이혼한다는 얘기는 들었어. 아직 완전히 법적으로 끝난 건 아니야?”
“응. 그거는 아직. 지금 소송 중에 있어.”
“괜찮다면 왜 이혼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럼 괜찮아. 지우가 바람을 피웠어.”
수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어머, 진짜? 바람을 피웠다고?”
민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몰랐구나?”
“그거는 몰랐어. 그래서 이혼하는 거구나. 괜히 내가 미안하다.”
“네가 왜 미안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너한테 소개시켜준 거 같아서 말이야. 정아는 좋은 친구인데 그래서.. 정아 친구인 네 와이프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지. 내 책임도 있는 거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드네.”
“네가 미안해할 거 전혀 없어.”
“그런데 지우가 바람 피우는 거는 어떻게 알았어?”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은 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먼저 얘기하더라고 다른 남자 생겼다고.”
“어머, 네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했다고? 자기가 바람 피우고 있다는 걸? 말도 안돼. 그 얘기 들었을 때 충격 엄청 컸겠다.”
“그렇지. 그 말 듣고 충격 엄청 컸지. 상처도 많이 받았고.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격이었고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이상한 감정이 들더라고. 요즘 병원 다니면서 우울증 치료하는 중이야.”
“그러게 정신적인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닐 텐데, 상담도 받고 치료도 필요할 거 같아.”
“그래도 다행히 최근에는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수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니 뭘? 설마 바람 피운걸?”
“응. 꽤 오래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 이혼하자는 말이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서로 관계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직감을 하고 있었어. 사실상 끝난 관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법적으로 이혼을 하자마자 만나는 거는 되고 그 전에는 안 되고.. 그런 게 더 이상하잖아?”
수겸은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어간다. “음.. 뭐..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틀린 얘기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잖아. 관계가 사실상 끝났더라도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 걸 알면 분노가 치밀고 배심감도 많이 들 거잖아. 엄청나게 큰 상처를 주는 건데,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같이 사네 못 사네 싸우는 사이에서 그런 예의가 의미가 있을까? 사실상의 관계도 끝났고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상황에서 각자 자기 살길 찾아가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분노나 배신감은 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
“그럼 너도 사이가 안 좋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만났겠네?”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거 말고, 관계가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 없을 때.. 그런 경우에 기회가 있다면 나도 누군가를 만났을 것 같아. 오히려 이혼하는 상황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나보다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지우가 결혼의 마무리를 더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
“음..” 수겸이는 커피 한 모금 마시면서 민구가 한 말을 곱씹는다. “그렇게는 전혀 생각 해 본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지우는 환상적인 마무리를 하고 있는 거야.”
“환상적인 마무리라고? 이혼하기 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돼.”
“평생 연애도 안 하고 혼자 살 거 아니라면 이혼하면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뭐.. 논리적으로야 맞는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잖아. 모든 상황에서 논리가 감정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지 않나? 너 진짜 감정적이지 않고 냉정하다. 마치 남의 일처럼 자기객관화를 잘 하네. 그래도 한 사람은 너무 큰 상처를 받으니까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
“누구든 상처를 전혀 안주고, 전혀 안받고 살 수는 없어. 너도 연애를 하면서 상처를 주기도 또 받기도 했을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그건 좀.. 상처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
“수겸아, 넌 결혼의 완성이 뭐라고 생각해?”
“결혼의 완성?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어. 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야.”
“이건 또 무슨 괴변이야! 너 충격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잘 생각해봐. 인류의 역사가 수백만 년 됐는데 80세가 넘도록 살게 된 거는 불과 100년도 안됐잖아. 옛날에는 대부분 40대에 죽었다고. 나만해도 작년에 폐렴에 걸렸었거든. 폐렴은 항생제만 먹으면 나을 수 있지만, 항생제 안 먹으면 그냥 죽는 병이야. 내가 만약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항생제를 먹을 수 있었을까? 그냥 서른 셋에 죽었을 거야. 내가 지금 살아서 너랑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는 건 항생제를 먹고 내 수명 이상 살고 있기 때문이야.”
“그거랑 결혼의 완성이 이혼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30대 초반이나 중반에 결혼해서 이혼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과 결혼 생활을 50년 정도 해야 하는 거잖아. 인간의 평균 수명이 이렇게 길어진 게 불과 100년도 안 됐으니까, 40년, 50년 이상을 한 사람이랑 결혼해서 사는 것도 불과 얼마 안된 거지. 인류 역사 대부분은 이렇게 오랜 기간 한 사람과 결혼 상태를 유지 해본 경험이 없어. 우리 DNA에 코딩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생활방식일지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첫 결혼 상대와 이혼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고 보여져. 그래서 나는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고 생각해.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과정 중 하나지.”
“하하. 그다지 과학적 논리 전개는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 일정 부분 동의 하는 게 인간은 동일한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무감각해지잖아.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고. 그런 차원에서 보면 네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이혼하지 않고 평생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오히려 결혼을 실패한 건가?”
“아니, 실패는 아니지.”
“그럼 뭐야?”
“미완성이지. 우리가 살면서 모든 걸 완성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많은 것들을 완성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기도 하잖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완성하지 못 할 수 있는 거지.”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고 이혼하는 타이밍에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환상적인 마무리이다. 재미있네. 이상하게 설득이 되기도 하고. 하기는 우리 부모님만 해도 오래 전에 이혼하고 지금은 각자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니까. 민구 너의 부모님은 어떠셔?”
“우리 부모님은 아직 미완성이야.”
“아직? 언젠가 완성될 수도 있다는 거야?”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엄마를 위해서 완성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구나. 이런 생각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하게 된 거야?”
“응. 결혼하면서 또 이혼하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됐어.”
“충격이 너무 커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 아니지?”
“절대 아니야. 큰 충격으로 오히려 세상을 바로 보게 됐어.”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신다. 민구가 먼저 입을 연다.
“수겸아, 너 남자친구 있어?”
“응. 있어.”
“그렇구나. 남자 친구는 어떤 일 해?”
“자기 아버지 회사에서 일해.”
“부잣집 아들인가 보네?”
“응. 집에 돈은 많은 것 같더라고.”
“사귄 지 얼마나 됐어?”
“2년 정도 됐어.”
“2년 정도 됐으면 결혼 생각도 하겠네?”
“아니.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
“진짜? 2년이나 됐는데? 우리 나이에 그 정도 만나면 결혼 생각 당연히 하잖아.”
“이민구!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며? 뭔가 네 말에 앞뒤가 안 맞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그렇지.”
“결혼은 아직 잘 모르겠어.”
“왜? 혹시 결혼은 안하고 연애만 하자는 주의?”
“아니. 그런 건 전혀 아니야. 남자친구는 좋은 사람이야. 결혼하기도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착하고, 성실하고, 외모도 준수하고, 나한테 잘 해주고, 거기다 집에 돈도 있고. 생각해 보니까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네.”
“그러게. 다 좋은데 뭐가 문제야?”
“그런데 문제가..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어.”
“2년이나 만났는데 처음 만날 때처럼 계속 설레고, 만날 때마다 재미있을 수는 없지.”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처음 만날 때부터 재미가 없었어.”
“진짜? 처음부터 재미없었는데 왜 사귄 거야?”
“사람은 좋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사람이라는 게 좋았어. 그래서 재미없고 잘 안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사람만 좋아도 괜찮은 거지. 도대체 얼마나 재미없길래 그러는지 궁금하다. 유머 감각이 완전 꽝이야? 맨날 썰렁한 개그만 하는 스타일?”
“아니 그런 식의 재미가 아니라 같이 대화를 하면 재미가 없고 지겨워. 공통 관심사도 없고 정서적인 교감도 잘 안돼. 그래도 편안하긴 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런 상황인데 남자 친구랑 결혼 해도 될까?”
“네가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면 남자친구와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아.”
“어째서?”
“착하고, 성실하고, 너한테 잘 해주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돈도 많고,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많을 것 같고. 그것보다 좋은 조건이 있나?”
“야,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다고 했잖아!” 수겸이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있을 때 재미있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결혼해서도 계속 재미있을 거 같아?”
“아니, 꼭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아까 얘기했잖아. 인간은 동일한 자극이 반복되면 그 자극에 무뎌진다며? 결혼도 마찬가지야. 계속 좋을 수도 없고, 계속 재미있을 수도 없어. 결혼 생활에서 정서적 유대감과 성적 만족감이 평생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는 판타지야. 연애의 재미를 계속 느끼고 싶다면 결혼하지 않고 일정기간 누군가와 만나고 재미없을 때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지. 결혼을 했다면 아까 말한 환상적인 마무리를 해야 하고. 그런데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잖아. 그래서 네 남자친구가 좋은 사람이고, 너한테 잘 해주고, 돈까지 많다면 결혼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거야. 단 네가 언젠가 결혼할 마음이 있을 경우에. 사랑하는 감정, 함께하는 즐거움. 이런 거는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만 보고 결혼할 수는 없어. 결혼도 일종의 비즈니스 관계야. 돈이 많으면 나중에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경제적 이득을 좀 더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어. 아무래도 나눌 수 있는 파이가 커지니까. 어쨌든 네 남자친구는 결혼하기 좋은 사람으로 보여.”
“이혼까지 고려해서 결혼해도 괜찮을 사람이라는 거네. 정말 결혼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얘기네.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인 말이다. 너 같이 생각하면 세상에 결혼할 사람 아무도 없겠다.”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세상에는 비즈니스 목적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꽤 많아. 그런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어. 내 생각에는 비즈니스 목적으로 하면서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걸. 비즈니스 목적으로 결혼하는 게 나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냥 선택에 불과한 건데 말이야.”
“다들 자기기만을 하면서 결혼한다 이거네?”
“모두 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인간은 현실을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 시선도 신경을 쓰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멋진 사람이고 싶으니까.”
“네 말대로라면 내 남자친구는 확실히 결혼 상대로 이상적인 사람이네. 결혼을 끝낼 때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까지 고려해서 말이지. 하하”
민구는 매우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하하 재미있네. 그럼 너는 재산 분할을 어떻게 할 건데?”
“지금 재산분할이랑 위자료 소송 중에 있어.”
“재산분할 합의가 잘 안돼?”
“응. 나는 재산분할을 8:2나 7:3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지우는 5:5를 원해. 지우가 재산분할 소송을 걸어서 나는 위자료 소송을 냈어.”
“네가 7이나 8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응. 재산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재산을 모으는데 기여도가 내가 더 크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재산 분할도 쉬운 게 아니네. 그런데 아내가 바람 피운 거를 이해한다면서, 환상적인 마무리라는 얘기까지 하면서 위자료 소송은 왜 하는 거야?”
“걔가 재산분할 소송을 먼저 내서, 거기에 화도 좀 나고 그렇다면 나도 내 몫을 최대한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하는 거야.”
“네 말대로 철저하게 비즈니스네. 처음 만났을 때 감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민구는 카페 밖을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좋았을 때 생각하면 많이 아쉽기는 한데 그렇다고 옛날 감정이 남아 있거나 하지는 않아.”
“그럼 관계를 회복할 마음은 전혀 없는 거네?”
“당연히 전혀 없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기까지 안 왔지. 나도 빨리 이혼 마무리하고 마음 추스르고 나서 다른 사람 만나고 싶어.”
“그렇구나. 그런데 궁금한 게 지우의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까지 한 거야?”
민구는 또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그런데 이상하게 처음 만났을 때 나랑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예감이 틀리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나는 내가 엄청 평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말을 잘하거나 유머감각이 뛰어나지도 않고, 옷을 잘 입거나 스타일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 남자친구처럼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잖아. 딱히 모자란 부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스타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내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아주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편도 아니거든. 이런 나의 평범함과 소심함이 지우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 평범한 미모에 적당히 옷을 잘 입고, 별거 아닌 내 말을 재미있게 들어주고, 자기 일도 열심히 하고, 화려함을 쫓거나 허영심이 많지도 않고. 이런 지우의 무난해 보이는 모습이 나랑 잘 맞아 보였어. 그리고 적극적이지 않은 성향인 내가 연락하면 빨리 답을 하고, 만남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편하고 좋았어.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고 결혼까지 하게 된 거야.”
“그랬구나. 난 사실 내가 소개시켜 줬지만 너랑 잘 안 될 거 같았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왜 소개해준 거야?”
수겸이는 남아있는 마지막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말한다. “내 친구이자 네 와이프 친구이기도 한 소연이랑 나랑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어. 한창 술 마시는 중에 지우한테 연락이 와서 같이 합류해서 셋이 마시기 시작했어. 난 그날 지우를 처음 봤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소연이가 괜찮은 사람 있으면 지우 좀 소개시켜 주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떤 스타일 좋아하냐고 물어 봤지. 지우가 자기는 지적이고 재미있는 사람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그 얘기 듣는 순간 네가 딱 떠올랐어. 그 자리에서 너한테 바로 연락을 했고. 네가 소개팅 하겠다고 해서 지우한테 번호 받아서 너한테 전달해준 거였어. 느낌에 너랑 잘 될 것 같지는 않았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좋아하기에 너무 평범해 보였어. 물론 첫인상에서 오는 선입견이었겠지. 그런데 너는 그런 평범함에 매력을 느꼈다니. 나는 네가 화려하고 감각적인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랬구나. 나는 지적이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데.. 왜 나를? 친구들은 나보고 엄청 재미없다고 그래.”
“그래? 남자 애들이 보기에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여자인 내가 볼 때는 너 재미있어.”
“내가?”
“응 난 오늘도 재미있는데. 결혼의 완성은 이혼이라든지. 사이가 안 좋은 부부관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견해도 그렇고. 이혼과 동시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환상적인 마무리이다. 이런 얘기 너무 재미있어. 엉뚱해 보이기도 하고 괴변 같기도 하면서 여러 경험과 많은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일 거잖아. 물론 네 말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남자친구 만나면 재미없는 얘기만 하는데 오랜만에 너 만나서 이런 얘기하니까 좋아.”
“남자친구랑은 주로 어떤 얘기하는데?”
“주식, 정치, 게임, 스포츠. 이런 얘기 주로 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아니거든.”
“너는 뭐에 관심이 있는데?”
“오늘 같이 내가 생각 못 해본 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지. 그리고 나는 패션, 문화, 예술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
“지금 나랑 얘기하는 게 재미있다면 아마 오랜만에 만나서 그럴 거야. 맨날 보면 아무리 관심 분야가 같다고 해도 언젠가는 재미없어지는 날이 올 걸. 계속 새로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수겸이 민구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그렇겠지?”
민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난 그렇다고 생각해.”
“어렵네. 그런데 민구야, 나 궁금한 거 있어. 궁금하면서 섭섭한 거야.”
“궁금하면서 섭섭하다고?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