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엔딩 3

by 킥더드림

3
12년 전.
화창한 봄날, 수겸은 학교 도서관에 가고 있다. 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햇살이 따사롭다.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지 도서관에 갇혀 공부하기 싫은 날씨이다. ‘오늘 같은 날 도서관에 가는 건 날씨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수겸은 잠시 도서관에 가지 말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대신에 햇살이 주는 즐거움을 조금 더 느끼기 위해 잠시 벤치에 앉았다 가기로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소보다 학생들이 훨씬 많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다들 수업을 빼먹고 방황하고 있나 보다. 다소 무거운 표정의 학생들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밝고 활력이 넘쳐 보인다. 학생들의 옷도 날씨만큼이나 밝고 화사하다. 이유 없이 괜히 들뜨고 설레는 날이다. 수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에 손으로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듯한 작은 솜뭉치 같은 구름 하나가 떠 있다. 저 위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부나 보다. 구름이 바람에 실려 아주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계속 보고 있지 않았다면 마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계속 보고 있으니 마치 술에 취한 듯, 최면에 걸린 듯 나른하고 노곤해 진다. ‘따뜻하고 평화롭다. 도서관에 가기 싫다. 계속 여기 앉아 있고 싶다. 혼자 도서관에 가기 진짜 싫은 날이다.’ 이때 누군가 수겸이의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수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뭐하냐?” 민구가 고개를 들어 수겸이가 쳐다보던 구름을 본다.
“어! 민구구나.”
하늘을 계속 보면서 민구가 말한다. “뭘 보고 있던 거야? UFO라도 봤어? 내가 저 위에서 내려오다 너 봤는데 벤치에 앉아서 계속 하늘을 보더라.”
“도서관 가는 길에 햇살이 너무 좋아서 잠시 앉아서 하늘 보고 있었어. 수업 갔다 오는 거야?
”응, 지금 막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이야.”
“그렇구나. 민구야, 너 혹시 약속 있어?”
“약속은 없고 영화 보러 갈 거야.”
“지금? 누구랑 가는데?”
“나 혼자.”
“혼자 영화 본다고?”
“응 나는 주로 영화관에 혼자 가.”
“혼자 봐도 재미있어?”
“영화가 혼자 보면 재미없고, 둘이 보면 재미있고 그런 거는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같이 보면 더 좋잖아.”
“혼자 보면 집중이 더 잘 되는 장점도 있어. 너는 도서관 간다고 그랬나? 난 가봐야 돼서. 가 볼게. 다음에 보자.”
“그래. 영화 재미있게 봐.”
민구가 정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수겸은 민구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민구야!” 수겸이 꽤 멀어진 민구를 향해 큰 소리로 부른다.
민구가 멈추어 서서 뒤돌아본다. “응? 수겸아 왜?”
“민구야, 영화 다음에 보고 나랑 도서관 같이 가지 않을래?”
“도서관에? 나는 지금 공부할 거 없는데.”
“어떻게 학생이 공부할 게 없을 수가 있어? 평소에 미리미리 해야지.”
“그렇기는 한데 굳이 오늘은 안 해도 돼. 그런데 도서관에는 왜 같이 가자는 거야?”
“그냥 오늘 왠지 혼자 공부하는 게 싫어서. 영화 다음에 봐도 되는 거 아니야?”
“안돼. 자주 상영하는 영화가 아니어서 기회 있을 때 봐야 돼. 난 그럼 갈게. 공부 열심히 해.”
민구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다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수겸이도 도서관을 향해 걸어간다. 도서관을 가는 동안 따사로운 햇살이 수겸의 어깨 위로 계속 떨어진다.

1주일 후.
지난주와 같은 시간, 수겸은 학교 도서관을 가고 있다. 지난 주와 달리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비가 바로 쏟아져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하늘의 모습이다. 수겸은 ‘비 예보가 있었나?’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정문을 지나자마자 비 한 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가 쏟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면서 비 오는 양도 조금씩 늘어난다. 도서관까지 가려면 적어도 5분 이상은 걸린다. 비를 피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수겸은 가방을 머리위로 들고 뛰기 시작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온다. 이대로 도서관까지 갔다가는 옷이 흠뻑 젖을게 뻔하다. 수겸은 일단 바로 옆 인문대 건물로 가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방향을 틀어 인문대 건물로 가려는 순간 저 멀리서 우산을 쓰고 오는 민구가 보인다. 수겸은 민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 민구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민구는 수겸이 갑자기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었다. 민구는 최대한 비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 우산을 수겸의 몸 쪽으로 가져갔다. 비가 더 많이 오기 시작한다. 우산 위로 “투둑 투둑 투둑”하고 굵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겸아.”
수겸과 민구는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붙어 마주보고 있다. 한참을 뛰어온 수겸은 가쁘게 숨을 쉰다. 거친 날숨에 섞인 수증기의 온도가 민구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수겸이 흐트러진 호흡으로 말한다. “야, 어떻게 비가 오자마자.. 네가 우산을 쓰고.. 딱 나타나냐? 우연히도..”
“뭐가 우연이야? 우리 지난주에도 만났잖아. 나는 매주 이 시간이면 수업 끝나고 나오는데.”
“그러네. 지난주에도 만났구나. 너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수업이 있지만, 내가 이 시간에 또 여길 지나가는 건 우연이지. 그런데 오늘 비 예보 있었어?”
“아니.”
“비 예보 없었는데 어떻게 우산을 가지고 온 거야?”
“집에서 나오는데 하늘을 보니까 왠지 비가 올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그랬구나. 잘 했네.”
“오늘은 어디 가는 거야?”
“오늘도 도서관.”
“너 공부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생긴 건 그렇지 않아가지고.”
“내가 생긴 게 뭐 어때서? 나 공부 열심히 안 하게 생겼어?”
“응 날티 나게 생겨서 공부랑은 거리가 멀어 보여. 외모에서 풍기는 거는 노는 것만 좋아할 것 같은데, 생긴 거랑은 다르게 공부뿐만 아니라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아.”
“하하 칭찬이야, 욕이야?”
“그냥 보이는 대로 얘기한 거야. 내 느낌이야.”
“날티 나게 생겼다는 건 예쁘다는 거지?”
“날티 난다고 다 예쁜 건 아니지 않나?”
수겸이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그래? 나는 그냥 내 마음대로 생각할래.”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해.”
“민구야, 오늘은 나랑 같이 도서관에 같이 가지 않을래?”
“도서관에? 같이 밥을 먹자거나 차를 마시자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 자꾸 같이 가자고 하는 건 뭐야?”
“도서관 갈 때마다 너를 우연히 만나니까 그렇지. 공부하다가 잠깐 쉴 때 같이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하면 좋잖아.”
“나는 오늘도 공부할 거 없는데. 그리고 나 담배 안 피우는 거 알잖아.”
“야, 너는 어떻게 맥락을 이해 못 하냐? 꼭 담배를 같이 피우자는 게 아니라, 공부하다 머리도 식힐 겸 같이 얘기도 하고 그러자는 거지.”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어. 그래도 미리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가 만났는데 도서관을 같이 가자는 거는 좀 황당하지 않아?”
“음.. 그렇기는 하지. 맞는 말이기는 한데 꼭 그렇게 따져야겠냐? 오늘도 어디 갈 데 있는 거야?”
두 사람이 함께 우산을 쓰고 얘기하는 동안 비가 많이 잦아들고 있다.
“오늘은 독서모임이 있어.”
“독서모임? 그런 것도 해?”
“응”
“오늘 꼭 가야 해? 도서관 가서 책 읽으면 안 돼?”
“한 달에 한 번 하는 모임이어서 빠지기가 좀 그래. 그리고 학교 도서관은 공부하는 곳이지, 독서할만한 공간은 아닌 것 같아. 그런 생각 안 해봤어?”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해봤어. 공부도 책 읽는 거잖아. 도서관이 독서 할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거는 너무 이상하게 들리네.”
“너 학교 도서관에 다들 공부하러 가지, 독서하러 간다는 사람 본 적 있어?”
“음.. 그러게 독서하러 간다는 사람은 못 본 거 같긴 하네. 말 장난 같은데 묘하게 설득된다.”
“어쨌든 나 아니어도 네가 도서관에 가자고 하면 같이 갈 남자들 줄을 설 텐데.”
“야야, 네가 편한 친구니까 같이 가자고 하는 거지. 아무한테나 그러겠냐?”
“그럼 다음에 미리 약속 잡고 같이 가자.”
“됐거든. 나 도서관 앞에까지 데려다 줘.”
“수겸아, 이 우산 손잡이 잡아 봐.”
“손잡이는 왜?”
수겸은 우산 손잡이를 잡았고, 민구는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았다.
민구가 수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한다. “나 늦어서 그러는데 먼저 가볼게.”
말을 마치자마자 민구가 우산 밖으로 나와 정문 방향으로 뛰어간다. 비가 오는 양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내리고 있다.
“민구야! 비 맞으면서 가면 어떻게? 머리랑 옷이랑 젖잖아.”
뛰어가던 민구가 뒤돌아보며 말한다. “많이 안 와서 괜찮아. 공부 열심히 해. 우산 나중에 꼭 돌려줘.”
“우산이야, 당연히 돌려주지.” 수겸이 혼잣말을 했다.
수겸은 뛰어가는 민구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도서관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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