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주일 후. 여의도에 있는 한 주점에서 새봄과 가을이 술을 마시고 있다. 새봄은 가을과의 만남이 불편하고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그렇지 않다. 주하랑 둘이 얘기할 때보다 편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대학 때처럼 허물없이 대화가 오고 가는 건 아니다.
“너랑 주하랑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이 됐다니,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그 덕분에 너랑 다시 만나게 됐네.” 가을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엄청 신기해. 그나저나 너는 H엔터테인먼트에 다닌다면서? 예전부터 영화 좋아했었는데 잘 됐네.”
“그럴 거 같지?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 좋아하는 걸 일로 하니 좋겠다, 잘 됐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어쨌든 일이다 보니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많지.”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 일이니까 그렇기는 하겠지. 그래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야. 아, 그리고 주하한테 들었는데 너 영화 평론도 쓴다면서? 지인랑 평론가가 너라는 말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나 네 글 좋아해. 내가 읽었던 영화평론이 네가 쓴 거였다니, 주하랑 같이 일하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야.”
“좋아한다니 고마워.” 가을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왜 본명을 쓰지 않고 필명을 쓰는 거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럼 당연히 있지. 지금 H엔터테인먼트에 다니고 있는데 내가 본명으로 활동한다면 우리 회사에서 제작하거나, 수입하거나, 배급하는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제대로 된 평을 쓰겠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필명을 쓰는 거야.”
새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겠네.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어. 그럼 너희 회사 사람들은 네가 영화평론가라는 걸 모르는 거야?”
“응. 당연히 회사에서는 전혀 모르지. 내가 지인랑이라는 걸 아는 사람 별로 없어. 요즘에 영화 평론 잘 안 읽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관심도 없고. 그리고 본명을 쓰지 않으니까 더 과감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영화 산업에서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맘에 안 드는 영화를 눈치 안 보고 마음껏 깔 수 있어서 좋아. 하하.”
새봄도 가을을 따라 웃는다. “하하. 그런 게 있을 수 있겠네. 재밌다. 어쨌든 회사 다니면서 영화평론도 쓴다니 멋지다.”
“야야, 멋지기는 뭐가 멋져.”
“그런데 가을아!” 새봄이 말을 하려다 머뭇거린다.
“응? 왜 말을 하다 말아.”
“나 너한테 물어볼게 있어.” 새봄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뭔데?” 가을은 새봄이 무엇을 물어볼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너는 나랑 왜 연락을 끊었어? 주하 말에 의하면 그날 나랑 너랑 사소한 걸로 다퉜다고 하던데, 나는 너랑 다툰 기억이 없거든.”
“주하가 너하고 나하고 싸웠대?” 가을이 새봄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응. 그렇다고 말했어. 그런데 주하는 우리가 왜 싸웠는지는 기억을 못하더라고. 우리가 그랬었나? 나는 기억이 안나.”
“혹시 나 말고 동미랑 싸운 기억은 없어?”
“동미랑? 동미랑은 의견이 좀 안 맞는 일이 있었던 거 같아. 다투었거나 싸웠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고.”
“나는 아니고 너랑 동미랑 싸웠어. 네가 주하에게 심한 말을 한 이후에.”
“동미랑 내가 싸웠다고? 그리고 내가 주하에게 그렇게 심하게 했었나? 내 기억에는 그냥 취업에 대해서 조언 정도 해준 거 같거든.”
“그날 너 엄청 심했어. 말도 거칠게 하고 평소 네 모습이 전혀 아니었어.”
“너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구나.” 새봄은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랑 동미도 취직이 안 되는 상태였는데 왜 그날 유난히 주하한테만 심한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어. 주하가 술 많이 좋아하잖아. 네가 주하한테 매일 술만 쳐먹고 취업 준비는 안 하냐고 너같이 게을러터진 애는 몇 년 놀아봐야 정신을 차린다고도 그러고. 영어 시험, 중국어 능력 시험 공부는 하고 있냐고 그런 것도 준비 안 하고 뭐하고 사냐면서 멸시하듯 네가 말했어. 나랑 동미는 그만하라고 말렸는데도 너는 막무가내였어. 우리는 불문과였잖아. 중국어 능력 시험은 네가 관심이 있어서 공부한 거였는데, 주하에게 왜 그런 얘기까지 하는지 보면서도 너무 황당했어. 무슨 자격증 얘기도 했었던 거 같은데. 주하에게 말할 때 ‘너무 게으르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똑바로 해라’, ‘뭘 알고는 있는 거냐’ 이러 비슷한 표현을 네가 계속 썼어. 어쨌든 그날 주하는 상처도 많이 받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거야. 나도 너한테 묻고 싶어. 그날 취업 가지고 왜 주하한테만 그런 거야?”
새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로 내가 했던 말이 기억이 안나. 내가 진짜 그랬다는 거지?”
“응, 그랬다니까. 지난 주에 주하랑도 얘기했다면서.”
“나는 왜 기억에 없을까? 너랑 주하랑 둘 다 비슷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너희들 말이 맞겠지.”
“그때 너 많이 취했었어. 그래서 기억이 안 날 수는 있을 거 같아.”
“그렇지? 나 많이 취했지? 그래서 내가 좀 오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가을은 새봄의 말을 단호하게 끊는다. “아니, 취해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내가 보기에 네가 그날 주하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어. 너는 술의 힘을 빌어서 평소 주하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마구 쏟아냈어. 몸은 술에 취한 듯 했지만, 네 눈빛은 그렇지 않았어. 술 취했다고 평소에 전혀 하지 않았던 생각이 튀어나오지는 않겠지. 어쨌든 그날 너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잡은 먹잇감을 물어뜯는 한 마리의 야수 같았어.”
가을의 단호함과 직설적인 표현에 새봄은 당황했다. “아.. 그런가?” 새봄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화제를 돌린다. “그럼 그날 나랑 동미는 왜 다퉜어?”
“정말 별거 아닌 걸로 다퉜어. 네가 주하한테 그러고 나서 동미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는지 갑자기 자기가 UFO를 봤다고 하는 거야.”
새봄이 놀라며 말한다. “동미가 UFO를 봤다고? 아, 그러고 보니 동미가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게 기억나.”
“동미가 자기가 본 UFO 얘기를 한참 했고 자기는 이 우주 어디인가에 외계인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는 말을 했어. 그랬더니 네가 이번에는 동미한테 뭐라고 하기 시작했어. 세상에 UFO가 어디 있냐고 하면서 꿈에서 본 걸 착각한 거라고 네가 말했어. 네 말을 듣고 동미가 꿈 아니라고 확실히 봤다고 그러는 거야. 동미가 그러니까 네가 그게 사실이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었을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동미가 너무 갑자기 나타났고 경황이 없어서 찍을 생각을 못했다고 했어. 그때부터 네가 동미를 막 쏘아붙였어. ‘너 진짜 멍청하다’, ‘상식이 있는 거냐’, ‘UFO는 그야말로 확인되지 않은 비행물체일 뿐이다’, ‘UFO를 봤다는 게 말이 되냐’, ‘너는 쓸데없는 공상에 너무 빠져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UFO를 봤다고 하는 건 망상이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이런 비슷한 말을 네가 계속 했어. 네가 그러니까 동미도 크게 화를 내기 시작했고 너희 둘이 한참 다퉜어. 주하는 둘이 싸울 때 집에 가버렸고, 나 혼자 너랑 동미를 말렸어.”
“음.. 동미가 UFO 얘기를 했었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내가 했다는 말은 이번에도 전혀 기억이 없어. 그날 나한테 무슨 일이었던 거지. 도대체 내가 왜 그런 거지? 나도 이해가 안 되네. 정말 내가 왜 그렇게까지 두 사람에게 심하게 했을까?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동미도 그날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야.”
“가을아, 너도 동미랑은 연락 안 되는 거지?”
“응. 프랑스로 유학 가서 가끔 연락을 했는데 취업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연락을 자주 못하게 됐지. 그렇게 뜸하게 연락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아쉽게 연락이 완전히 끊겼어. 동미는 SNS도 안 하는 것 같더라고, 검색도 안 되고, 추천도 안 떠.”
“그렇구나. 동미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새봄의 말에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동미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하네.”
“그런데 가을아, 그날 너하고 나하고도 무슨 일 있었어? 우리는 싸우거나 그러지 않았잖아.”
“그날 너랑 나랑은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지? 아무 일도 없었는지? 그런데 너는 내 연락 왜 안 받았어? 너희 셋이서 나를 따돌리기로 한 거였어?”
“아무리 그래도 당시에 우리가 어린애도 아니었는데, 셋이 작당해서 너를 따돌렸겠어? 그건 절대 아니야.”
“셋이 일부러 따돌린 건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그럼 너는 왜 나랑 관계를 단절 한 거야?”
“음.. 내가 너를 안 보려고 했던 이유를 말하면 네가 많이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너한테 내 말이 너무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뭔데? 괜찮으니까 말해봐.” 새봄이 재촉하듯 말했다.
”사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되나 싶은데 어차피 오래 전 일이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만난 이상 우리 관계도 풀어야 하니까 그냥 말할게.”
새봄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얘기해 줘. 나는 꼭 알고 싶어. 너희들이랑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힘들었다고. 내가 너희한테 상처 준 줄은 모르고 나만 상처받았다고 생각했어. 이유라도 알고 싶었어.”
가을은 잔에 반정도 남아있던 소주를 한 번에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잔과 비어있는 새봄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한 모금씩 마셨다.
가을은 반 정도 남은 소주 잔을 잠시 내려다보다 말한다. “그날 주하랑 동미에게 심한 말을 쏟아내는 네 모습이 마치 괴물 같았어. 그날 내 앞에 괴물이 있었어.”
“괴… 물? 내가 괴물로 보였다고?” 새봄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가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어. 당시 취업이 매우 어려운 시기였잖아. 취업이 안 돼서 졸업하고도 1, 2년 동안 알바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던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넌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됐잖아. 취업을 먼저 한 너는 그날 우리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어. 그냥 취업이 먼저 됐을 뿐인데. 특히 주하를 타겟으로 삼아 가르치고, 나무라고, 혼내려 했어. 마치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한 존재인양, 세상 이치를 혼자 다 깨닫고 있는 현자인양 행동했어. 취업 빨리 된 거 갖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세상 혼자 잘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 네 모습이 내 눈에는 괴물로 보였어.”
“…...” 새봄은 가을이 왜 당시 자신의 모습을 괴물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너는 학교 다닐 때 매우 겸손한 편이었잖아. 평소와 전혀 다른 너의 괴물 같은 모습에 난 소름이 끼쳤어. 네 무의식에 잠재돼 있던 괴물이 어떤 트리거에 의해서 갑자기 확 튀어나온 것만 같았어. 너의 그런 모습을 보니까 네가 사회에 나가서 성공을 하게 되면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괴물로 진화될지 막 상상이 되더라고.” 잠시 적막이 흐른다. “내가 너무 있는 그대로 말했나?”
“아니야.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이제야 이해가 좀 되네.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해서 너도 나랑 관계를 끊은 거였구나.”
“아니. 내가 너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건 너의 그런 모습 때문이 아니야.”
새봄이 놀라면서 묻는다. “그게 아니라고?”
“응. 그건 아니야.”
“그럼 왜 그랬던 거야?”
가을이 잔에 남아 있는 소주를 마셨고, 새봄도 가을이를 따라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새봄이 자신의 잔과 가을이의 잔을 채운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보고 내가 더 끔찍하게 느껴졌던 게 뭔 줄 알아?” 가을이 물었다.
“아니 모르겠어. 뭔데?” 새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더 끔찍했던 건 그런 너의 모습에서 내 자신을 봤다는 거야. 내 안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던, 외면하고 있었던 괴물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어.”
새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내 모습에서 네 자신을 봤다니,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날 네가 주하랑 동미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말들은 내가 평소 주하랑 동미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들이었어. 내가 걔네 둘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들을 네가 그대로 말하고 있더라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가을이의 말에 새봄은 놀랐다.
잠시 숨을 고른 가을이가 차분히 말을 이어간다. “너의 그런 모습이 괴물 같으면서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그대로 쏟아내는 네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 한편에서는 알 수 없는 어떤 희열 같은 게 느껴졌어. 하고는 싶지만 내가 못하는 것을 누군가 대신 해주었을 때 느껴지는 후련함, 짜릿함 같은 거 있잖아. 나 대신 네가 토해내 주는, 배설해 주는 그런 시원함을 느꼈어.”
“아! 나.. 를 보면서 그랬었구나.” 새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희열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어. 바로 그런 감정이 드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고 혐오스러워 졌어. 너의 괴물 같은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안의 괴물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거 같았어. 그날 이후로 너를 보는 게 두려웠어. 너를 보면 또 다시 나의 내면 깊이 숨어있는 괴물이 다시 튀어나와 마주하게 될 까봐 무서웠어. 그래서 너를 볼 자신이 없었어. 너와 관계를 끊은 건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내 자신과의 문제였어. 진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게 두려워서 너를 피한 거였어. 역겨운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나는 취업이 먼저 됐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내 안에 숨겨 왔던 걸 그대로 토해낸 거였네. 반대로 너는 그걸 누르고 있었던 거고.”
“그날의 다툼은 그냥 친구들끼리 술 먹고 흔하게 일어나는 다툼 정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었는데 말이지. 어떻게 된 게 긴 시간이 흘러서까지 각자에게 각기 다른 아픔으로 남아 버렸네.”
“그러네. 나는 내가 따돌림 당한다고 생각했고 나만 상처받은 줄 알았어. 어쨌든 이 모든 게 내 말에서부터 비롯된 거네. 다 내 잘 못이야. 가을아, 미안하다.”
“아니야. 나한테 미안해 할 거 없어. 너를 외면한 나도 잘 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면 이제는 나를 봐도 괜찮아?”
가을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럼, 괜찮지. 그때는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그냥 외면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져? 네 안의 괴물이 사라졌어?”
“아니. 사라지지 않았고 불편한 내 진짜 모습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인정하기로 했어. 그래야만 무의식 속에 있는 그 괴물을 통제할 수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런 대사가 나와.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그 대사처럼 내 안의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게, 내 자신이 내면의 괴물에게 잡아 먹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고 있어.”
“나도 그 영화 좋아해. 너는 영화평론가여서 그런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보통 사람들과 어딘가 많이 다르다. 네 말을 들으니까 나는 이미 내 안의 괴물에게 잡아 먹힌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내 자신을 좀 들여다봐야겠다. 그 괴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야.
“나는 모든 사람 마음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 괴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나저나 새봄아, 내가 한 말에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야. 전혀 기분 상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마. 오히려 솔직히 얘기해줘서 고마워. 이유를 알았다는 게 나한테 가장 중요해.”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가을아, 당시 우리 네 명 모임 이름이 쿨 포테이토였잖아.”
“응. 그 이름 오랜만에 듣는다.” 가을이 반가운 듯 말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기억나?”
“내 기억으로는 날씨가 좋은 날, 우리 넷이 학교 잔디밭에 앉아서 맥주랑 감자칩 먹고 있었는데 동미가 뜬금없이 우리 모임 이름을 쿨 포테이토라고 하자고 했잖아. 다들 쿨 포테이토라는 말이 예쁘다면서 다 찬성했었고. 그렇게 정해진 거 아니었나?”
새봄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랬나? 강원도 놀러 가서 지은 게 아니고?”
“강원도면 우리 넷이 갔던 첫 여행 말하는 거지?”
“응. 나는 그때 지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거든.”
“그때 지었나? 내 기억으로는 학교에서 감자칩 먹으면서 지었던 거 같은데.”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 봤어. 그런데 학교 잔디밭에서 먹은 건 맥주랑 프렌치프라이 아니었어?”
가을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말한다. “감자칩이던 프렌치프라이던 뭐가 중요하냐?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새봄아, 많이 늦었다. 우리 이만 일어나자.”밤이 깊었다. 술집에서 나온 새봄과 가을은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가을이가 부른 택시가 먼저 왔다.
“가을아, 조심해서 들어가. 오랜만에 반가웠어.”
“그래, 나도 반가웠어.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가을이 타자마자 택시는 주저 없이 출발했고, 새봄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본다. 새봄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왔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가을이의 말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가을이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에 위안도 받았다. 홀가분하다. 새봄은 하늘을 올려다 본다. 어두운 하늘에 달이 환하게 떠있다. 예쁜 달을 볼 수 있는 건 좋지만 별이 별로 없는 건 아쉽다.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여의도 빌딩숲 사이에서 하늘에 많은 별이 보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몇몇 희미한 별들이 어두운 하늘에 드문드문 박혀있다. 새봄은 그 중에서 그나마 밝은 별 하나를 본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다. 그 별이 점점 밝아진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별이 아닌가? 그 별은 밝아지다 못해 둘레가 점점 더 커진다. 계속 커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어떠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더니 모양이 뚜렷해졌다. 그 별은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원형의 UFO로 변했다.
‘뭐지? 진짜 UFO 잖아!’
UFO는 어두운 여의도 상공을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새봄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한다. 이것은 환시임에 분명하다. 깨어나야 한다. 환각에서 깨어나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눈을 조심스럽게 뜨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여전히 UFO는 여의도 상공을 빠르게 날고 있다. 다시 두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어 본다. 살며시 눈을 떴다. UFO가 눈앞에서 날아다니고 있다.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던 UFO는 속도를 서서히 줄인다. UFO는 천천히 날아와 새봄이 정면으로 보고 있는 하늘에 멈추어 섰다. 크기가 엄청나게 크다. 새봄은 공중에 떠있는 UFO를 바라보고 있다. 그 UFO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현실에서 UFO를 보고 있는 건가? 저건 비행기도, 드론도 아니다. 그렇다고 형태가 없이 단순히 빛이 반사가 된 것도 아닌데.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진짜 둥근 원형의 비행 물체가 맞잖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멀지 않은 하늘에 떠있다. 분명히 내 눈앞에 있는 게 맞는데. 너무 크고 형태도 뚜렷해서 헛것을 보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내가 진짜 UFO를 보고 있다는 말인가? 동미가 봤다는 UFO가 진짜인가?”
새봄은 계속 하늘을 보다 주위를 둘러 본다.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다. 다시 하늘을 본다. UFO는 여전히 그 자리에 떠있다.
“빵빵” 경적소리가 들린다.
“택시 부르셨죠?” 택시기사가 창문을 열고 새봄을 보면서 말했다.
“네. 맞아요.” 새봄이 서둘러서 뒷문을 열고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님, 서초동 OO아파트로 가주세요.”
택시는 원효대교를 건너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다. 새봄은 창 밖을 내다본다. 저 멀리 여의도가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높은 빌딩들 위로 분명 UFO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UFO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을 열어도, 마른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떠봐도 비슷한 것조차 없다. 하늘에는 휘황찬란한 달만 떠있을 뿐 UFO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어! 아무것도 없네. 환시였나? 분명 UFO가 맞았는데, 잘못 본 게 아닌데. 그 사이에 다른 데로 날아갔나?’
새봄은 망설이다가 택시기사에게 물어본다. “기사님, 저한테 오시는 길에 하늘에서 이상한 거 못 보셨어요?”
“이상한 거라뇨?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우습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혹시 UFO 못 보셨어요?”
“UFO요? 지금 여의도로 오다가는 못 봤는데요. 제가 아주 오래 전에는 UFO를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때는 분명 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게 진짜 본 건지, 꿈에서 본 건지, 무언가 잘못 본건지 확신이 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봤다고 믿고 있어요. 우주가 어마어마하게 큰데 어딘가에 외계인이 있지 않을까요? 외계인이 있으면 UFO도 있을 수 있죠.” 택시기사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아.. 네. 기사님도 UFO 보신적이 있구나.”
“주변에 한번 물어보세요. 의외로 본 사람들 꽤 많아요. 그런데 진짜로 신기한 게 다들 본건지 아닌지 가물가물해 한다는 거에요. 저는 가끔 사람 마음이 UFO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나저나 손님께서 방금 UFO 보셨나 봐요?”
“전 잘못 봤나 봐요. 제가 취해서 헛것을 본 거 같아요.”
‘어떻게 된 거지? 정말 잘 못 본 건가? 잘 못 봤을 거야. 세상에 UFO가 어디 있겠어. 말도 안되지. 기사님도 못 보셨다잖아.’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새봄은 마음이 편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알고 싶었던 이유를 드디어 알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았으니까 이제 됐어. 이제 됐다고.” 새봄은 창 밖의 한강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새봄은 스마트폰에서 단체 톡방을 만든다. 주하와 가을이를 초대했다. 활짝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톡을 보낸다.
단톡방 이름: Cool Potato Reunion
『주하야, 가을아, 안녕! 다음 주에 우리 셋이서 술 한잔 하는 거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