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턱
성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형마트에 왔다. 혼자 마트를 둘러보고 있다. 회색 하트가 그려진 흰색 티셔츠에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옅은 베이지색 긴 주름치마를 입었다. 그 위에 얇은 패딩을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전체를 뒤로 넘겨서 묶었고 도수가 높은 알이 큰 안경을 쓰고 있다.
마트 안이 쌀쌀하다. ‘마트 안이 왜 이렇게 쌀쌀하지? 몸이 안 좋은가? 이런 대형마트에 히터가 고장 났을 리가 없을 텐데. 고장 나면 바로 고칠 텐데 좀 이상하네.’
성휘는 무엇을 먹을지 보기 위해 긴 통로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가끔 오는 마트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새삼 여기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건 이곳에 다 모아둔 것만 같다. 카트에 먹을 것을 잔뜩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별 고민 없이 진열대에서 물건을 집어 카트에 바로 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진열되어있는 같은 종류의 여러 식품을 매우 꼼꼼하게 비교해 보고 고민한 끝에 카트에 담는다. 인간의 삶에 있어 먹는 것이 중요하긴 한가 보다. 이렇게 먹을 것이 넘쳐나고 마음껏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맛있는 걸 더 많이 먹으려고 갈구한다. 없는 걸 찾아 헤매고 존재하지 않는 걸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그러고도 만족을 못 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게 인간인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성휘는 정육 코너를 지나가고 있다. 붉은색 빛이 도는 돼지고기와 소고기가 비닐포장에 위생적으로 말끔하게 싸인 채 각 부위별로 진열되어 있다. 매끈하고 윤기가 나는 비닐포장과 고기위로 떨어지는 야릇한 조명 빛이 붉은색 살코기를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한다. 성휘는 고기가 진열된 냉장실 안으로 손을 넣었다. 냉장실에서 나오는 찬 기운이 손 전체에 그대로 전달 되어 몸이 오싹거린다. 무심코 소고기 등심 부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고기를 누른 손가락 끝에 살코기의 부드러운 육질이 그대로 느껴졌다. 성휘는 정육 코너에서 나와 돌아다니다 라면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왔다. 라면을 보자마자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성휘는 평소 엄마가 먹지 못하게 하던 라면을 먹기로 마음 먹었다. 라면 5개가 들어있는 한 묶음을 사서 계산을 하고 마트에서 나왔다.
성휘는 라면 다섯 개가 들어있는 비닐 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한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죽으려는데 식욕이 있다니. 그렇다고 뭐.. 그렇게 대단한 식욕도 아니다. 그저 맛있게 끓여진 라면이 먹고 싶을 뿐이다.’
집에 왔다. 아무도 없다. 라면 먹기 좋은 날이다. 성휘는 냄비에 물을 적당량 붓고 전기레인지에 올려 놓는다. 라면 봉지를 뜯고 냉장고에서 파와 양파를 꺼냈다. 물이 끓는 동안 파와 양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물이 끓기 시작한다. 성휘는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었다. 냉장고에서 배추김치를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접시에 정갈하게 담는다. 김치를 썰고 나서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계란 하나를 꺼냈다. 냄비에 계란을 살짝 부딪쳐 껍질을 깬 후 끓고 있는 라면에 계란을 넣는다. 계란 껍질을 쓰레기 통에 버린다. 성휘는 혹시 계란 껍질에 살모넬라균이 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싱크대에서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었다. 끓고 있는 라면에 이미 썰어 놓은 파와 양파를 넣는다. 면이 어느 정도 잘 익은 거 같다. 전기레인지를 끄고 냄비에 있는 라면을 큰 그릇에 옮겨 담았다. 라면, 김치, 수저를 쟁반 위에 놓고 식탁으로 가져가 자리에 앉았다. 라면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한 젓가락을 들어 입으로 후후 불어 면을 식힌 후 입에 넣었다. 면을 씹기 시작한다. 맛있다. 얼마만에 먹어 보는 라면인가.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면의 개발은 인류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한 엄청난 사건이나 다름 없다. 라면 하나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하지만 성휘는 알고 있다. 라면을 먹는 이 소소한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라면은 근원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상쇄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맛있는 걸 엄마는 왜 못 먹게 하는 걸까?’
단숨에 라면 한 그릇을 먹었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마셨다. 이 즐거움을 라면 한 그릇으로 끝내기는 많이 아쉽다. 성휘는 부엌으로 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라면 한 그릇을 더 끓였다. 식탁으로 가져와 두 그릇째 먹기 시작한다. 여전히 맛있다. 그런데 먹을수록 배가 부르기 시작한다. 두 그릇째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에는 배가 가득 찬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하나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휘는 부엌으로 가서 라면 한 개를 더 끓였다. 이번에는 계란, 파, 양파를 넣지 않았다. 라면 세 그릇째를 먹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첫 번째 젓가락부터 맛있지가 않다. 면은 텁텁하고 국물은 느끼하다. 그래도 성휘는 계속 먹는다. 꾸역꾸역 먹는다. 중간 정도 먹었을 때 배가 터질 것 같고 목에서 신물이 넘어올 것만 같다.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먹으리라 다짐한다. 한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다시 먹기 시작한다. 억지로 억지로 세 번째 라면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성휘는 먹은 그릇을 쟁반에 올리고 부엌으로 간다. 배가 너무 불러서 부엌까지 몇 발 안 되는 거리조차 걷는 것이 버겁다. 싱크대에서 그릇에 묻은 기름기와 김치국물을 적당히 헹궈냈다. 먹은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세척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방금 먹은 라면이 안에서 넘어오려고 한다. 성휘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간다. 가는 동안 라면이 식도를 역류해 입안으로 도달했다. 안에서는 계속 넘어온다. 성휘는 필사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에 도착했다. 변기에 먹은 라면을 게워낸다. 면발과 국물이 시큼한 위산과 함께 쏟아져 나온다. 토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다. 한참을 게워낸 후 성휘는 화장실 바닥에 천장을 보고 누웠다. 입 주위에 라면 찌꺼기와 국물이 묻어있고 옷에도 여기저기 라면 국물이 많이 튀어 더러워졌다. 성휘는 일어나 다시 부엌으로 갔다. 다용도실 문을 연다.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넣는다. 속옷까지 다 벗어서 넣었다. 성휘는 알몸으로 싱크대로 가서 서랍을 열어 과도를 꺼냈다. 오른 손에 과도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책상 한 켠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시 화장실로 갔다. 물기 없이 건조하게 마른 세면대에 과도와 스마트폰을 놓았다. 성휘는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하면서 이도 닦는다. 이를 닦으니 입안에 감돌던 시큼하고 텁텁한 맛이 사라지고 민트 향으로 채워졌다. 몸 구석구석도 깨끗이 씻었다. 샤워를 마치고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는다. 욕조에 앉았을 때 가슴 높이 정도까지 오도록 물을 채운 뒤 수도를 잠갔다. 화장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하다. 성휘는 세면대에 있던 과도와 스마트폰을 욕조와 붙어있는 선반에 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니 금방 몸이 이완되고 노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콧잔등과 인중 주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성휘는 스마트폰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열어 음악을 검색한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을 선택하고 음악을 재생 한다. 화장실 안에 오페라가 울려 퍼진다. 성휘는 오른손으로 과도를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한다. 선곡한 음악이 마음에 든다. 음악이 자신의 심정과 잘 맞는 것 같다.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떴다. 성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과도 끝으로 왼 손목 안 왼쪽 끝을 찌른다. 칼이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좀 더 힘있게 찌른다. 뜨거운 통증과 함께 칼 끝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주저하지 않고 칼을 잡고 있는 손을 안으로 당겨서 손목 끝까지 그었다. 베인 곳에서 붉은 피가 스며 나온다. 핏방울이 욕조 안의 물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성휘는 떨어지는 핏방울을 본다. 핏방울은 붉은 색 잉크마냥 물 안에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내며 서서히 퍼져나간다. 물이 점점 붉게 변하면서 물 안의 성휘의 몸도 점점 붉은 색으로 보인다. 이내 욕조 안의 물 전체가 붉은 피와 뒤섞여 투명함은 사라졌다. 성휘는 어제 남자친구에게 갑자기 화를 냈던 게 생각났다. 화를 크게 냈었고 남자친구는 영문도 모른 채 받아주었다. 그 화를 받아주다니 착하다. 하지만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지는 않다. 부모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두렵다. 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약해진다. 조금씩 조금씩 나른해진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혼미해져 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신이 흐려질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기분이 왜 좋아지지?'
성휘는 알 수 없는 쾌감마저 들었다. 첫 번째 라면을 먹을 때와는 다른 기분 좋음이다. 갑자기 죽기 싫어졌다.
'어쩌면 문득문득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즐거움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있으면 대학생이 되는데 대학생활도 못해보고 죽는 건 억울하다. 제대로 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의식을 잃어가던 성휘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사랑의 죽음>이 흘러나오는 스마트폰을 힘겹게 들었다. 피 묻은 손이 스마트폰을 피범벅으로 만든다. 통화 앱을 누르고 맨 위 즐겨찾기로 고정 돼있는 남자친구 이름 조진성을 눌렀다. 전화가 걸려 신호가 가고 남자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성아, 우리 집으로 빨리 와 줘. 나 화장실에 있어. 우리 집 현관 번호는 내 생년월일이야." 힘 없이 말한 후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여! 다시 살고 싶어졌습니다. 살아나면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제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나요? 너무너무 두려워요! 저와 함께해주세요.'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고 몸의 형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손목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입술은 점점 파래진다. 의식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