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스틱 레스토랑
해가 지기 전 어느 저녁 성휘는 신사동의 한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걷고 있다. 파란색 하트가 그려진 하얀색 티셔츠에 옅은 색 빈티지 데님팬츠를 입고 있다. 그 위에 무릎 높이까지 내려오는 패딩을 입었다. 해가 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고 아직 날이 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지나는 골목은 이상하게 어둡게 느껴진다.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모든 가게들의 불이 꺼져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 하다. 일찍 문을 닫은 가게도 있는 것 같고, 아예 폐업을 한 가게도 많은 것 같다. 원래 이 골목 분위기가 이랬나 싶다. 한 블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여기는 문을 연 가게들이 드문 드문 있다. 또 한 블럭을 더 지나 다른 골목으로 왔다. 여기 있는 가게는 대부분 문을 열었다. 두 블럭 전에 지나온 골목과 지금 지나는 골목은 같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어떤 차이가 이렇게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드는지 궁금하다. 거리도 멀지 않고 별 다를 것도 없는데 말이다. 성휘는 계속 골목을 걷는다. 마치 마음 속 미로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이 골목길에는 예쁜 식당들이 많이 모여있다. 집이랑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분위기 좋은 식당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걷다 보니 유독 눈에 띄는 식당이 있다. 성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식당 입구 앞에 섰다. 입구에 붙은 작은 간판에 예쁜 글자체로 <레스토랑 상크튀에르>라고 적혀있다. 식당 이름이 왠지 마음에 든다. 2층짜리 건물에 1층 전체가 식당이다. 식당 건물 앞에 꽤 넓은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에는 이름 모를 여러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중간에는 테라스 반 이상에 그늘을 만들어 낼 만한 아주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테라스보다는 정원이나 뜰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듯하다. 큰 나무를 중심으로 테이블 여러 개가 놓여있고 각 테이블 마다 파라솔이 있다. 테라스 한 쪽에 있는 담을 따라 폭이 좁고 긴 화단도 있다. 화단에는 연한 빨간색 꽃들이 심어져 있다. 성휘는 테라스의 아름다움에 홀렸다. 입구에 서서 넋을 놓고 이 식당을 계속 바라본다. 해가 넘어 가면서 주황빛 저녁 노을이 내려 앉아 테라스는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식당 건물은 접이식 유리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어 테라스 너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빨간색과 녹색으로 꾸며진 벽이 눈에 확 띈다. 식당 안은 다양한 꽃과 고풍스러운 소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멋진 인테리어 위로 할로겐 조명의 따뜻한 빛이 떨어지고 있다. 주황빛 자연광과 은은한 할로겐 조명, 나뭇잎의 녹색과 실내 벽의 청록색, 꽃의 다홍색과 실내 벽의 붉은색, 오래된 나무의 불규칙한 나뭇결과 매끈하게 손질된 테이블의 나뭇결. 이렇듯 레스토랑 상크튀에르는 자연적이면서도 인공적인 질감과 색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간이다. 식당 건물 안과 테라스에는 식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 지금은 2월 달이다. 어떻게 여기 나무는 푸르고 꽃이 피어있단 말인가. 성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가로수를 본다. 나뭇가지가 앙상하다. 그러고 보니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시공간이다. 성휘는 무엇에 홀린 든 자신도 모르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기분이 아주 잠시 들었다.
'이 기분은 뭐지?'
잠시 후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다.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기까지 하다. 성휘는 입고 있던 얇은 패딩을 벗었다. 패딩을 벗으니 더운 감은 사라졌고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됐다. 순간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 한 것만 같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아름다운 종업원이 성휘에게 다가온다.
"몇 분이세요?" 종업원이 물었다.
"혼자 왔는데요." 성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종업원은 밝은 미소와 함께 매우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
종업원은 성휘를 테라스 가장 안쪽으로 데리고 가서 담장 아래 있는 화단 옆 두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두 사람이 앉는 자리 치고는 테이블이 꽤 큰 편이어서 좋다.
"테이블 위에 메뉴 천천히 보시고 어떤 걸로 주문할지 결정하시면 불러주세요." 종업원은 밝은 미소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
성휘는 주위를 둘러본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테라스 안이 훨씬 넓고 분위기도 좋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안 식당도 멀리서 볼 때 보다 훨씬 예쁘다. 식사를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밝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면서 얘기하는 사람들, 바라만 봐도 좋은지 말없이 미소를 짓는 사람들, 음식의 맛에 감탄을 쏟아내며 만족해하는 사람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메뉴를 꼼꼼히 살펴본 끝에 자리를 안내해 준 종업원에게 알리 올리오 파스타, 연어 샐러드, 레드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진짜 여기 너무 좋은데요. 저는 이 근처에 살면서 여기를 오늘 처음 알았어요. 건물, 인테리어, 조경 정말 다 너무 멋져요." 성휘가 주문을 마치고 종업원에게 말했다.
"그러시군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건축가세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이시죠. 건물이랑 조경 전부 다 저희 주인님께서 설계하고 디자인하신 거에요."
"아! 식당 사장님이 건축가구나. 어쩐지 분위기가 남다르다 했어요. 사장님 성함이 뭐에요?"
"저희 주인님 성함은 스텔라 리 입니다. "
"스텔라 리 선생님. 저는 처음 들어봤어요."
"아, 그러세요. 건축에 관심이 없으면 당연히 처음 들어보실 수 있죠. 건축 쪽에서는 신화 같은 분이세요.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어요. 작년에 귀국하셨고요. 2층이 저희 주인님 건축 사무소에요. 귀국하시기 전부터 건축 사무소랑 레스토랑을 같이 준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레스토랑 상크튀에르는 오픈한지 얼마 안 됐어요. 아마 그래서 고객님께서 저희 레스토랑을 모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문하신 음식은 조금 기다리시면 금방 나올 거에요." 이번에도 종업원은 밝은 미소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
성휘는 종업원이 식당 사장님을 왜 주인님이라고 부르지는 의아했다. 아무리 식당 주인이라 해도 사장님, 대표님과 같은 조금 더 적절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해가 완전히 지자 테라스 위를 엑스 자로 가로지는 전선에 줄줄이 걸린 백열등에 불이 들어왔다. 끈적끈적한 재즈음악도 흘러나온다. 자연광이 비출 때 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연출 된다. 해가 지기 전에는 즐거운 가운데 인위적인 엄숙함이 깔려 있었다면 지금은 은밀하게 숨겨 놓은 걸 풀어헤친 듯한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음식과 술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층 더 들뜨고 유쾌해 보인다. 바뀐 빛은 식당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바꿔놓았다. 이 곳은 마치 우리가 보는 세상은 빛으로 빚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하얀 접시에 예쁘게 담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알리 올리오 파스타. 큰 볼에 담긴 여러 종류의 야채와 얇게 썰린 훈제 연어. 다 맛있어 보인다. 우선 연어 샐러드를 먹어본다. 쌉싸래한 야채에 드레싱의 새콤달콤한 맛이 더해지고 거기다 잘 훈제된 연어의 식감까지 정말 기가 막히다. 이번에는 포크로 잘 말아 알리 올리오 파스타를 먹는다. 약간 탄듯한 마늘 향과 따뜻한 올리브 유의 부드러운 맛이 탱글탱글한 파스타 면발에 잘 어우러진다. 너무 맛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지금껏 먹어 본 알리 올리오 파스타 중 제일 맛있다. 파스타를 다 넘기기 전에 레드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마치 천국에 온 것 같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성휘는 눈 깜짝할 새 알리 올리오 파스타, 연어 샐러드, 와인 한 잔을 해치웠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 먹고 나니 크림 파스타 맛이 궁금해졌다. 미소를 남기고 간 종업원이 다시 찾아왔다.
“고객님,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저, 이번에 크림 파스타가 먹고 싶어요. 추천 좀 해주세요.”
종업원은 미소와 함께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저희는 한 사람 앞에 식사 하나밖에 제공하지 않습니다. 고객님께서는 이미 알리 올리오 파스타를 드셔서 크림 파스타를 주문 하실 수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이상한 식당이다. “왜 그런 거죠?” 성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고객님들께 최대한 신선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저희는 식자재를 많이 준비해 놓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한된 식재료로 가능한 많은 분들께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고객님께서 이해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종업원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할 수 없죠.”
“저희가 와인이랑 간단한 안주 정도는 주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휘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는 어떤 게 있죠?”
“고객님, 치즈 어떨까요? 여러 가지 치즈가 함께 나오는데 맛있어서 손님들한테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
“네. 좋아요. 치즈 주시고요. 제가 한 잔 마셨던 와인, 같은 걸로 한 병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업원은 이번에도 아름다운 미소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
성휘는 다른 테이블로 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천사 같고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녀의 뒷모습에도 미소가 보인다. 잠시 후 와인과 치즈가 나왔다. 큰 접시에 많지 않은 양의 다양한 치즈가 예쁘게 담겨있다. 작은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치즈 특유의 짭짜름함에 우유의 고소한 맛이 풍부하게 더해져 있다. 치즈도 너무 맛있다. 그리고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다시 한 번 지금 천국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