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맑은 아침. 기호는 현지가 오늘 자신의 옷 입은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집을 나왔다. 이맘때 즈음 아침은 조금 춥거나 쌀쌀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기분 좋게 시원한 정도의 기온이다. 기호는 전철역으로 걸어가면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 색이 너무 예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짙은 파란색 물감을 칠해 놓은 듯하다. 멋진 하늘에 매혹돼 계속 보고 있는데 파란 하늘에 하얀색 작은 별빛 같은 것이 반짝한다. 한 번 반짝하더니 바로 사라졌다. ‘방금 저게 뭐였지?’ 기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잘못 본 건가? 분명 무언가가 반짝거렸는데.’
혹시 한 번 더 반짝일까 하고 하늘을 계속 봤지만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 기호는 전철역을 향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러시아워가 막 지난 시간임에도 지하철 2호선 안에 사람들이 꽤 많다. 기호는 지하철 맨 뒤칸 객실과 운전실을 막아놓은 벽에 기대 서있다. 학교를 갈 때마다 빈자리가 있더라도 늘 이 자리에서 서서 간다.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앉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이다. 지금 기호는 머릿속에 현지 생각으로 가득하다. 오늘 엄마와 자신 단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을 현지에게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현지가 앞에 있으면 비밀을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몇 번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하지 못했다. 현지가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두렵고, 혹시 비밀을 듣고 이별 통보를 하지 않을까도 걱정된다. 더 이상 현지를 속이고 만날 수는 없다. 기호는 현지와 사귄 지 7개월이 넘었다. 어느 정도 관계가 안정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현지가 쉽게 이별을 선택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도 가져본다.
‘오늘은 무조건 얘기해야 해. 현지가 이해해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나라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이해 받지 못하더라도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기호의 생각이 계속 왔다 갔다 한다. 사람들로 붐비던 전철 안은 많이 한산해졌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인다. 기호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있는다. 현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본다. 영화감상 동아리에서 현지를 처음 만났다. 첫 눈에 현지가 마음에 들었다. 동아리 첫 회식 때가 생각난다. 현지는 기호가 앉은 가장 반대편 끝자리에 앉아있었다. 기호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하면서도 현지에게 계속 신경이 갔다. 틈나는 대로 현지의 옆모습을 흘끗 흘끗 쳐다봤다. 현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서 적당한 템포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지는 맑은 눈빛과 옅은 미소를 보이며 옆에 앉은 선배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현지의 그 눈빛과 미소는 천진한 면을 드러내면서도 뒤로는 경계심을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술기운에 하얀 얼굴은 조금 홍조를 띠었고 긴 생머리는 사선으로 매끈하게 뻗은 어깨위로 흐트러져 흘러내린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이 홍조 띤 한쪽 뺨에 검붉은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리카락이 만들어낸 명암은 현지의 얼굴을 한 층 더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호는 그 깊이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분위기에 매료된 기호는 곁눈질로 보다 잠시 멍하니 현지를 바라보았다. 마침 고개를 돌리던 현지와 눈이 마주쳤다. 술기운에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기호를 발견한 현지는 놀라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기호를 향해 친근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그 웃음이 기호의 마음 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기호도 현지를 따라 어색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현지의 눈웃음 때문이지 아니면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현지가 자신에게 눈웃음을 지었고 자신의 가슴은 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리를 바꿔가면서 술을 마시다 현지와도 이야기를 할 기회가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회식을 계기로 현지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냥 친한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현지는 같은 심리학과 선배랑 사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눈웃음은 기호의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다. 기호는 1학년을 마치고 1년 동안 휴학했다. 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1년 동안 약물 치료와 상담을 받으며 보냈다. 치료를 받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증상이 많이 호전되어 복학하게 됐다. 복학한 첫날 기호는 수업을 다 마치고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그때 수업을 듣고 나오는 현지를 우연히 만났다. 그날 현지를 만난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현지도 수업을 다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길을 걷다가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현지와 단둘이 저녁을 먹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기호는 자신이 휴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지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걸 알게 됐다. 저녁만 먹기로 했다가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술을 마시며 좀 더 깊이 있고 사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기호는 현지의 부모님이 중학교 때 이혼했고 그 후부터 아버지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재혼을 한 이후로는 만나지도 연락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여동생은 1년에 한 번 정도 어머니를 만난다고 했다. 1년에 한 번 여동생으로부터 듣는 소식이 어머니와의 유일한 접점이라고 했다. 당시 기호는 현지의 눈에서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을 읽었다. 현지의 이런 사정을 듣고 기호는 고등학교 3학년 겨울에 아버지와 쌍둥이 형이 교통사고로 죽은 사실을 말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게 처음이었다. 현지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기호의 말을 들은 현지는 왜 우울증으로 1년이나 휴학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고 했다. 자신도 중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상당 기간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현지는 술잔을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기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반 정도 술이 담겨있는 술잔을 보고 있던 기호는 고개를 들어 현지를 봤다. 기호와 현지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기호는 누군가와 이렇게 한참 동안 눈맞춤을 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계속 손을 잡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현지와 손잡고 말없이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기호에게는 많은 위로가 됐다. 그 순간 두 사람 마음 속 깊은 곳에 잠겨있던 결핍이 만났고, 그 결핍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게 하는 매개체와도 같았다. 기호와 현지는 그 날 이후로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