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시우는 아무런 기대 없이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빛 알갱이들이 물결치듯 시우에게로 마구 쏟아져 내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더 없이 맑은 날이다. 빛 알갱이들은 사정없이 시우의 얼굴을 때려 대기 바쁘다. 눈 부시고 얼굴이 따갑다. 얼마나 되었을까? 이렇게 햇빛을 직접 피부에 쐬는 것은 꽤나 오랜만의 일이다. 집 근처 예술의 전당으로 향한다.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십 분 정도 걸으니 그 곳에 도착했다. 우면산 바로 아래 예술의 전당의 긴 광장은 산책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산책로로 만들어지진 않았을 테지만 우면산의 풍경을 끼고 꽤나 멋진 건물들 사이로 길게 뻗은 광장은 공연이나 전시를 보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산책하고 싶은 사람도 불러들이는 것이 분명하다. 아직은 여름이라고 부르기 이른 계절, 기온이 올라가는 날이 하루하루 거듭되는 만큼 햇살은 점점 강렬해지고 딱 그만큼씩 우면산은 더 푸르러지고 있다. 따뜻하고 쾌청한 날씨 때문인지 평소 보다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다들 밝은 표정에 즐거운 모습이다. 격식 있는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의 정장 차림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화사하면서도 편하게 차려 입었다. 간혹 눈에 띄게 세련된 사람들도 지나 다닌다. 이들 가운데 시우의 표정과 모습은 어딘가 동떨어져 보인다. 다른 세상에서 혼자 뚝 떨어진 분위기다. 매만지다 만 머리, 까슬까슬한 수염, 축 처진 어깨, 의욕 없는 눈꺼풀, 구깃구깃한 바지, 먼지 덮인 까만 스니커즈. 거기에다 계절에 맞지 않은 얇은 코트까지 입었다. 바람이 휙 불었다. 시우의 코트는 바람에 힘없이 나풀나풀한다.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느리게 걷는다. 그 모습은 마치 삶의 의미를 잃고 황량한 사막을 떠도는, 곧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고독한 검객을 떠오르게 한다. 고독은 누구에게나 태어남과 동시에 디폴트로 주어진 조건이다. 주위는 사람들의 소곤소곤 거리는 소리로 매워져 있고 거기에는 어떤 즐거운 멜로디가 실려있는 듯하다. 그 즐거운 소곤거림조차 잠시 고독을 가리고 있을 뿐 그 기본 디폴트 값을 삭제하지는 못한다.
커플 한 쌍이 힘껏 팔짱을 끼고 시우 옆을 지나간다. 왠지 그들에게 눈길이 갔다. 둘 다 한껏 꾸미고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모습이 사귀게 된지 그리 오래된 커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라파엘로의 <의자의 앉은 성모>에서 어린 세례 요한이 성모와 아기 예수를 보듯 시우는 그들을 쳐다본다. 그러다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여기는 다 좋은데 대중교통으로 오기가 너무 불편하다. 그렇지?”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말에 호응한다. “맞아. 전철역에서 걸어오기에는 너무 멀고, 역에서 나와서 버스 갈아타는 건 불편하고 말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다음에 오게 되면 차를 가지고 오자. 주차는 편한지 모르겠네.”
“주차 공간은 잘 돼있겠지. 문제는 이 일대가 차가 많이 막히는 곳이라는 거야.”
시우는 지나가는 커플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예술의 전당 앞 큰 길 바로 건너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의 접근성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의 말이 맞다. 가장 가까운 전철역인 남부터미널 역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오기가 꽤 멀다. 더군다나 완만한 오르막 길을 따라 계속 걸어야만 한다. 걷지 않으려면 지하에서 올라와 마을 버스로 갈아타야만 하는데 이것 또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겨야 하는 공간의 접근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시우는 주위를 둘러본다. 음악당, 국악원, 오페라하우스 같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돌아간다. 예술의 전당의 과거가 계산됐다. 참으로 오랜만에 된 계산이다. 예술의 전당 건립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간에 알력 다툼이 있었다. 그 이전부터 지하철 공사를 할 때마다 종종 문화재 보존과 관련한 이슈가 있었고 두 기관은 원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불편한 감정만 남기게 됐다. 그러면서 두 기관 간 감정의 골은 예술의 전당 공사로까지 이어졌다. 그로 인해서 전철역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접근성을 높이는 공사에 대한 허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알력 다툼으로 인한 불편함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 돼버렸다. 이유를 알고 나니까 시우는 어이가 없고 화가 많이 났다. 행정처리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아니다 싶다. 그러다 시우는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화낼 일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내 봐야 본인만 손해다.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은가? 이제는 과거계산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정말로 벗어나고 싶다. 이 따위 계산 탓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지 오래됐음에도 아직 괴로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빠져 나오기가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그렇다고 지금 그녀가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깊은 한강으로 뛰어들면 편해질까? 어쩌면 그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모른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다. 아아! 그렇게 된다면 함께 사는 고양이 닐스와 베르너는 누가 돌본단 말인가? 그들이 이 선택을 망설이게 붙잡는 유일한 이유이다.그날의 사고만 아니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