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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ul 25. 2023

한텐을 입는 일

 2018년 겨울,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맨 유투부를 보던 어느 날이었다. 그 당시의 침착맨은 언제나 방송에서 일본풍의 특이한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침착맨에 푹 빠져있던 나는 그 특이한 외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저거 힙한데? 저게 뭐지? 하고 알아보니 일본의 전통 의복 “한텐”이라는 옷이란다. 괜찮은 게 있으면 사볼까 해서 파는 곳을 찾아보았으나 살 수 있는 곳은 네이버 쇼핑뿐이었고, 거기에는 멋없는 잠옷용 싸구려 한텐들 밖에 없었다. 계속 알아봐도 괜찮은 한텐이 보이지 않아 아쉬워하며 한텐 사는 일을 그만두었더랬다.


 그렇게 한텐을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힙스터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바지인 그라미치의 루즈 테이퍼드 팬츠를 직접 입어보고 사기 위해 연남동의 한 편집샵에 가기로 했다. 외출하는 김에 연남동 주변에서 아는 형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고 약속 한 시간쯤 전에 편집샵에 도착했다. 입어보려 했던 바지를 입어봤다. 옷맵시가 전체적으로 낭낭하니 편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었다. 바지를 사기로 결정하고 편집샵을 둘러봤다. 편집샵 안에는 만듦새가 좋은 옷들이 정말 많았다. 보기만 해도 비싼 옷들이 즐비해 있었고 실제로도 비쌌다. 하나같이 그런 아이템들 뿐이었다. 직업도 없이 복학을 기다리는 갓 전역한 나에게 이 편집샵은 너무 과분한 장소였다. 뭔가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걸려있는 옷들을 뒤적이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실루엣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렇게 찾아봐도 나오지 않던 한텐이었다.


 파란색 배경에 패치워크로 페이즐리 문양 (물방울 아메바같이 생긴 문양)이 박힌 가을 겨울용 두툼한 한텐이었다.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한텐이 내 눈앞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너무 힙하다는 생각을 하며 가장 먼저 가격표를 확인했다. 62만 원... 역시나 비싸군.. 나는 그때까지 20만 원 이상 가는 옷은 패딩 이외에 사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사러 온 바지의 가격도 12만 원으로 당시 내 기준으로는 꽤 큰맘을 먹었던 것이었다. 비싼 가격에 헛웃음을 지으며 한번 입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점원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한텐을 입어봤다. 옷을 입고 앞섶을 여미고 거울을 봤다. 봤는데, 너무 괜찮았다. 그 순간 이 옷을 정말 사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한텐을 입은 실루엣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일반적이지 않은 내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옷 자체가 이쁜 것 이외에도 한텐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으니 한텐을 사면 분명 힙스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군 생활 동안 모아둔 푼돈의 일부로 옷을 살 수 있긴 했다. 파란 한텐을 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너무 비싸다는 생각, 이 두 가지 생각이 계속 상충하여 30분가량 그 좁은 편집샵 안을 배회하며 고민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나는 만나기로 한 형을 내가 있는 편집샵으로 불렀다. 형은 옷이 이쁘다면서 “정말 사고 싶으면 사는 게 맞지 않아?”라는 말로 내 구매 욕구를 더 부추겼고 나는 결국 이 한텐을 사기로 결심하게 된다. 마침 매장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도 있어서 60만 원 초반대의 옷을 40만 원 후반대에 살 수 있었다. 오십 가까이 되는 돈이 아깝기도 했지만, 냅두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돈이라고 합리화를 하니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한텐을 산 후 며칠간 내가 돈을 잘 쓴 건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그래도 환불할 수는 없었다. 옷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텐이라는 이 난해한 옷을 나는 여름이 올 때까지 잘도 입고 다녔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 앞에도 그 옷을 입고 갔고 개강을 하고 대학교 수업이나 과실에 갈 때도 입었다. 그 옷을 처음 보는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은 일본 점원 같다면서 나를 놀렸지만 그런 관심도 꽤 좋았다. 내 눈에 이 옷은 너무 멋있고 힙했기 때문에 알아볼 사람은 알아볼 것이란 생각과 함께 당당하게 입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주구장창 입고 다니던 한텐이 봄을 맞아 장롱에 들어가고 몇 개월 후,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2019년의 가을이 오고 한텐을 입을 법한 날씨가 되었음에도 한텐을 농에서 꺼낼 수 없었다. 이 시국에 일본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일본 불매 운동에 동참하느라 그런 건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 차에 대한 김치, 젓갈 테러 등도 감행되고 있었고 인천에서는 렉서스 차 부수기 퍼포먼스가 일어나기도 하는 등, 반일 감정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그딴 거 신경 안 써!!!!”하고 일본 옷을 입기에는 그 후폭풍이 꽤나 두려웠다. 부모님한테서 한 소리 들을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큰맘 먹고 샀던 40만 원 후반대의 한텐은 2019년에도 2020년에도 내 선택을 받지 못한 채 농에서 잠자고 있어야 했다. 반일 감정은 이제 공공연한 국민 정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언급을 조심해야 한다. 유명인들 모두 일본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 꺼려야 한다. 언급을 했다 하면 바로 논란이 되어버린다. 성시경이 인스타에 고독한 미식가에 나온 오사카 맛집을 소개했다가 친일파, 매국노라면서 대중들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단지 이 시국에 일본의 좋은 면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매국노 취급을 하는 상황이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정의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군중심리의 광기가 아닌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신 나간 세력이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 때문에, 나는 키린지, 카시오페아의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되고, 지브리, 에반게리온을 봐서는 안 되고, 일본식 카레나 텐동을 먹어서는 안 되는 걸까? 잘못된 건 잘못된 것으로 좋은 건 좋은 것으로 남을 수 없는 걸까?


 일본이 우리나라에 했던 만행들과 일본 정부의 정책이 싫어서 일본의 문화나 일본 사람, 일본의 모든 것을 싫어하는 일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일본 기업을 불매하는 건 내수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그렇다 쳐도, 그 감정의 비약으로 인해 일식집을 운영하는 한국인들이 피해를 본 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건가? 한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일본이 태도를 바꾸기 전까지, 적어도 반일 기조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초밥집이든 라멘집이든 일식집은 절대 가지 않겠다.” 그는 반일 감정이 있음을 고려하고 일식집을 차렸어야 하는 것이 사업가의 기본이라고 말하며 반일 운동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는 일식집 사장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에 빠져 죄 없는 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과연 정당한가.

 왜 성시경은 오사카 맛집을 소개하고 일 때문이었다고 변명을 해야 했을까. 일본 불매 운동이 가지는 의의나 명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비난하고 배척하여 피해를 주는 일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얘기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가수나 작가, 영화감독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폄하하려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와 그 작가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는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쓴 거야??”, “약쟁이 음악이 좋아 봤자지. 범죄자잖아.”, “그 사람 영화 어쩐지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어.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댓글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물론 잘못에 따라서 그 사람이 꼴 보기 싫을 수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이제까지 세상에 끼친 영향과 그 결과물의 독립적인 예술성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과연 괜찮은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 예술가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비난, 당연히 할 수 있다.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그 예술가의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도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그 예술가가 만들어 낸 작품에 도덕적 잣대를 그대로 끌고 들어와 평가를 하자면 머릿속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이 작품.. 좋은데 어떻게 하지..? 감독이 쓰레기인데, 작품이 좋잖아. 작품이 좋다는 내 생각을 세상에 말해도 될까?”와 같은 자기검열이 이루어지게 되고, 범죄자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게 되면 공격을 받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범죄자의 작품을 억지로 폄하하거나, 언급을 아예 하지 않게 된다.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데에 사회적 지탄을 감수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 그것이 건강한 행동이고,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결론은 이렇다. 예술가의 인성과는 별개로 작품이 가진 가치가 분명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작품을 좋게 평가할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른, 부도덕한 예술가가 낳은, 그 작품의 가치를 연좌제처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억지가 있어 보인다. 이것은 전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예술이 마음에 들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작품은 그대로 평가하되 “그런데 좀 아쉽다.. ㅇㅇ만 안했더라도..”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정도가 나로서는 솔직하고 가감 없는, 대중으로서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너무 큰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와 그의 작품들이 아무리 좋다고 느껴져도, 작품에 대한 공공연한 언급을 지양함으로써 피해자들을 향한 2차 가해를 막는 것이 우선일지도 모른다. 물론 범죄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 너무 애매하긴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술가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의 작품은 별개의 작품으로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 작품은 되게 좋은데, 저지른 범죄는 진짜 개같더라.” 정도로 얘기해도 “너 어떻게 그 범죄자 새끼, 바람 핀 새끼 작품이 좋다고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보면 대부분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잘못을 욕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듯하다. 인터넷 밖 현실도 별반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쑤시지 않을 세상이 오긴 오나. “그 성별”, “그 국가”, “그 새끼” 같은 맹목적인 타자화와 혐오가 끝나는 날이 오긴 올까. 그런 쪽으로는 그다지 기대가 없다. 각자의 정의가 편을 갈라서 싸우는 일을 바라보는 게 너무 힘이 든다.


 안 그래도 소수의 취향이던 일본 옷이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후에도 나는 틈틈이 한텐을 입을 기회를 엿보곤 했지만, 나가기 전 번번이 자신을 잃게 되어 결국 한텐은 장롱으로 향하기 일쑤였다. “다른 거 입고 말지 뭐..” 오래 입지 않아 한텐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되는 요즘이다.


 가을은 온다.

 쌀쌀한 바람에 가을옷을 꺼낼 때가 되면 일단 한텐을 꺼내긴 하겠지. 내가 과연 방향 잃은 비난의 눈초리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난 가상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기준을, 모두가 응당 해내야 할 의무로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


 이번 가을에는 한텐을 입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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