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런 물경력으로는 이직도 못 한다고

회사 생활 5년이 나에게 남긴 것

by 감우

얼마 전 옛 직장 동료 H를 만났다. 재직 시절 그녀와 나는 서로를 싫어하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 사이였다. 그녀를 떠올리며 퇴사를 고민했던 게 몇 차례였는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회사의 과도기를 한 팀으로 겪어내며 미운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내가 퇴사 소식을 알리자 가장 크게 퇴사 파티를 열어 준 것도 그녀였고, 춤추며 퇴사할 거라던 나도 그녀 앞에서 결국 울음을 터트려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퇴사를 했다. 그리고 일 년 여의 시간이 지나, 옛 직장 근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에디팅팀’이라는 미명 하에 회사에서 발행되는 각종 문구 제작 및 작문 작업을 도맡는 부서였다. 작게는 상품의 상세글부터 크게는 메인 홍보에 쓰일 카피라이팅 작업까지 텍스트로 된 모든 작업물은 우리 부서에서 나왔다. 각종 팀에서 문구 요청이 쇄도했다. 다들 한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인 것처럼, 하다못해 인사팀에서 올리는 구인 공고문조차 우리 팀으로 요청이 들어왔다. 이 팀은 애초에 대표 직속 부서로 신설된 팀이라 헤드급 인사는 처음부터 없었다. 팀원들의 연차는 고작 몇 개월 차이로 엇비슷했지만 그 안에서도 서열이 나뉘었다. 부서장이 없는 팀이어서인지 서열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더 거세었다.


나는 회사 생활을 비교적 늦게 시작한 편이라 내 위에 나보다 어린 사람이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나이를 무기 삼아 서열을 재조정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바랐던 단 한 가지는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프로가 될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그 프로세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팀원들은 전부 성실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H는 가장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직원이었고, 내가 그녀에 대해 불호를 넘어 경멸의 감정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러서조차 그 부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씁쓸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성장하지 못하고, 왜 우리는 매일 얼굴을 붉혀야만 하는 걸까.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떤 데이터를 참고하여, 어떤 니즈를 겨냥해서, 어떻게 방향성을 잡아가라는 식의 가르침은 누구도 주지 않았고, 출판사 교정교열팀이라도 되는 듯이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한 부분만을 지적하거나 강조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작업시간을 빨라졌다. 더 이상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 대한 지적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어떤 가르침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회사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일이 편해질수록, 불안감은 정비례 곡선을 그리며 상승했다. 그렇게 5년이 흘러 퇴사를 결심할 때까지도, 나는 스스로를 프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H를 만나 이런 이야기들을 담담히 나눴다. ‘쓰기’의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브랜드의 규모와 상관없이 너도나도 스토리텔링을 외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우리가 했던 업무처럼 ‘쓰기’만을 요하는 곳은 없더라고. 애초에 시작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한 회사에서만 통하는 전문가는 전문가가 아니다. 좋은 사수를 만나는 것은 노력이나 능력이 아닌 운에 의해 결정되지만, 때로는 운 좋게 걸린 무언가가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다시 돌아가도 그보다 더 할 게 없다고 느낄 만큼 회사 생활에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단 한순간도 미련을 가진 적이 없지만, 언제나 그 시절을 돌아보면 혀끝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H는 이직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날 우린, 조금 많이 취한 채로 헤어졌다.





이전 15화#14. N 잡러 시대, 지속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