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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May 29. 2016

청춘이라는 단어의 색깔은 어쩌면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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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노동은 하지 않고 그저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유자적하고 싶었다.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강박에 얽매여 나그네로 살 수 없는 현실에 갑갑증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너무 많은 것들에 얽매여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은 이렇게 돌고 돌다 모든 것에 얽매인 삶을 쳇바퀴처럼 돌리는 이십 대 중반이 되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할 때가 분명 있었던 것도 같은데 이젠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널리 퍼뜨린 동명의 책마저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이다. '청춘'이라는 단어에 가슴 뛰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텐데 이젠 '청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반항심이 들끓는다. 청춘? 그래서 뭐 어쩌라고. 청춘이 뭐! 뭐! 뭐!!!!  

 

 왜 이 시대의 청춘은 꿈을 꾸지 않는가, 통탄을 숨기지 않던 몇 해 전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었었다. 너는 꿈이 뭐니? 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고작 이십 대 초반의 나이였고,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가 막 적응기를 끝냈을 무렵의 젊디 젊은, 말 그대로 청춘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란 것이 과언이었다.

요새는 꿈 타령하는 것도 사치야. 그저 제대로 밥 벌어먹고살면 다행이지.

너는 때가 어느 때인데 꿈 타령이냐, 공부나 해라.

열심히 공부해 전과를 한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때가 어느 때라니, 꿈 타령이라니.. 한 순간에 나는 한심한 치로 취급당하고 그만이었다.

때론 나를 동경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쪽은 조금 더 우울했다.

나는 잘 하는 것도 없고, 좋은 대학에도 가지 못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나도 꿈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는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서 부럽다...

그 시절의 나는 그토록 염세적이 되어버린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 또한 가진 게 꿈 밖에 없었으므로, 그마저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실낱같은 꿈을 붙들고 그래도 나는 꿈이 있어 자위하던 시절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오늘에 와서야 나는 그들을 오롯이 이해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염세의 물결에 스미듯 물들었다. 언젠가부터 전처럼 힘차고 긍정적은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려던 것이 아닌데 자꾸만 염세적인 글을 썼고, 그러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들을 지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간이 왔다. 매일 정체감이 나를 옥죄었다. 사춘기 때도 하지 않았던,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나아가는가를 사색하며 점차로 우울해졌다.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났고, 무기력해져 하루 종일 잠만 자며 하루를 보내기를 한 달, 그리고 일 년. 지금의 젊음까지도 나를 비껴간 뒤엔 난 어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떠한 말들로 나를 위로할 수 있을까. 매일 두려움에 시달려 하루 종일 잠을 자면서도 푹 잠들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나와 같은 고민을 품고 있었기에 더 우울했고, 그러나 한 편 안도했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같은 시절이라는 싱그러운 의미는 퇴색되었다. 지금의 청춘이라면 열정 페이라는 개념 앞에 농락당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문장 앞에 무력해지면서도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꺾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냘픈 존재들일뿐이다. 그럼에도 앞으로의 남은 날이 아득하여 무너질 수도 없는 존재들. 나보다 앞서가는 이들을 시기하고, 나보다 뒤서 오는 이들에 안도하며 점차 사악해지는 존재들. 이들이 내일의 대한민국을 짊어져야 할 청춘의 현실인 것이다.


여러분의 청춘은 안녕하신가요?

내일의 대한민국은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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