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3. 목
자기 연민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자기혐오에 대한 혐오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나는 나를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고, 본인을 혐오하는 누군가를 보는 일도 견디기 힘들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일은 불쌍하거나 짠하거나 걱정된다기보다 그야말로 불편하고 힘이 든다. 오랜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과 자기 분석을 통해 얻어낸 단 하나의 결론은 '명확한 답을 도출해 낼 수 없음'이라고 언젠가의 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나마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아줄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나 자신조차도 '그나마'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이 깨달음이 나를 고립으로 향하게 한 시초다.
"내가 제일 힘들어."라는 말은 나를 위한 주문과 비슷하다. 스스로에게 자주 이 말을 해 준다.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다. 왜냐면 나로 사는 것은 나뿐이니까. 너는 나의 힘듦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내가 너의 힘듦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제일 힘들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너도 제일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너'보다' 내가 '더' 힘들어"라고 말하는 순간 여러 비극이 시작된다. 하지만 문제적 동물인 인간은 쉬운 길을 갈 수 없는 저주에 걸려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 쉬운 말을 삼키는 일이 그렇게나 어려운 것을 보면 말이다. 분명 이유는 있다. 나에게는 내가 제일 힘드니까. 내 세상 안에서는 네가 나보다 더 힘들 리가 없으니까. 이런 생각은 그저 내 마음속에만 간직해 둘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 사실을 네 입을 통해서도 시인받고 싶은 욕구가 저주의 씨앗이 된다.
이해가 안 되면 외우는 수밖에 없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도 자동 반사처럼 답을 낼 수 있을 만큼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너라는 것을. 너는 나라는 것을. 내가 제일 힘들다면, 너도 제일 힘들다는 것을.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까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진도를 나가려고 했는데 또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는 말도 하지 않지만, 나보다 네가 더 힘들다는 말은 더욱 하지 않는다. 인사치레로도 하지 않는다. '너는 네 스스로 많이 걱정해 주렴. 미안한데 나도 내가 제일 힘들어서, 나 챙기기도 바쁘거든.' 하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나를 위한 걱정도 사절, 너를 위한 걱정도 사절하고 싶은 마음. 나는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너도 제발 너 알아서 챙기라는 마음이 고립을 심화시킨다. 지극히 자발적인 고립의 상태가 된다. 더 깊은 웅덩이를 파고 홀로 들어앉아 있다.
얼마 전 <사유노트>를 읽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고립된 사람들은 문제도 고립된 채로 푼다. 풀려고 애를 쓰는데, 고립된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 대부분 고립되어서 생기는 문제인데, 고립된 채로 풀려고 하니 풀리기는커녕 더 엉켜버리는 것이 고립된 사람의 고립된 패턴이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더 고립된 사람이 되어간다. 고립된 채로 고립을 풀려는 노력도 그만두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문장을 읽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내가 쓴 문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고 생각했지만) 책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고립은 죄악이라고까지 했다. 나도 작가만큼 살고 나면 그렇게 말하게 될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요즘 나의 키워드는 '고립'이다.
일기에 가게 얘기를 안 쓰고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는 어김없이 내가 고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게 되는 글들. 고립된 채로 고립을 풀려는 노력의 시도들. 그렇게 점점 더 깊은 고립으로 나아가는 과정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결국 문제는 나다. 결국엔 또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