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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Apr 16. 2021

02. 저녁이 있는 삶이 시작되고 싸움이 늘었다.

왜 때문에?

우리는 먹는 얘기를 하면 왜 꼭 싸움이 될까.

시간이 지나 생각하면 민망하고 우스운데도, 그 순간엔 더 이상 진지할 수 없을 만큼 정색을 하고 승부를 건다.

오늘 뭐 먹지? 하는 고민은 대체로 즐거운 대화가 되지만, 때때로 끔찍한 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항상 시작은 별게 아닌데, 그저 오늘 저녁 메뉴를 함께 의논하던 것뿐이었는데

끝으로 치달을수록 하찮게 여긴다느니, 처참한 기분이라느니, 별 이상한 단어까지 등장하며 기묘하고 무거운 싸움이 되어버린다.


나는 계획대로 흘러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즉흥적인 사람? 아니, 그렇게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뭐든지 맛있게 먹는 능력이 있지만, 특별히 맛있어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은 딱히 없다.

남편은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고, 약간은 미식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저녁 메뉴보다는 생활비 예산이 더 중요하고

남편은 저녁 한 끼가 하루의 유일한 행복이라고 말할 정도로 저녁 메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끔 나는 남편을 너무 먹을 것만 밝히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가끔 남편은 나를 너무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치부한다.(남편은 나의 이 감상을 부정할 확률이 높다.)


이쯤에서 예상했을 수도 있지만, 매번 대화는 메뉴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예산 이야기로 흘러가며 싸움이 된다.

결혼 초반엔 남편의 야근이 잦아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토록 바라던 저녁이 있는 삶이 이루어지자, 우리는 저녁 이야기를 하며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은 역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싸울 일이 있다면 싸움을 피하지 말자는 게 관계에 대한 내 나름의 원칙인데

음식으로 인한 싸움만큼은 피하고 싶다.

미묘한 억울함과 치사함으로 버무려진 싸움은 결말도 찝찝함을 남기며 미지근하게 끝나고 만다.

오늘도 빌어먹을 저녁 메뉴 이야기를 하다 카톡으로 한바탕 전쟁을 했는데

남편이 오늘 집에 안 들어가도 되냐는 톡을 전해 왔다.

내일 이른 아침에 병원 예약이 있어 병원 근처에서 자겠다고 했고, 다른 의미는 없다고 했다.

나도 여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고, 그러고 싶다면 그러라고 했다.

이게 바로 앞서 말한 찝찝함을 남기며 미지근하게 끝나는 결말이다.

이런 게 정말 싫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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