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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r 10. 2022

슬기로운 집콕 놀이

놀이의 중요성


어린이에게 '놀이'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린이에게 놀이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신 페르세우스 님의 글이 있어 여기선 그걸로 대신합니다.

잘 노는 아이로 키울 것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노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이나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고, 즐거움을 느끼면서 삶을 지속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온전히 의무만 다하는 인생은 너무나 척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각보다 잘 노는 어른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네 부모 세대는 더욱 그러하죠. 일하며, 자녀 양육하며 가족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치다 보니 은퇴 후, 혹은 자녀를 독립시킨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른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취미 생활을 하며 인생을 즐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골프처럼 부부가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을 취미로 갖는 경우 즐거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부부간의 정도 돈독하게 다질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하지요.


잘 못 노는 어른을 꼽으라면 부모 세대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당장 저만 해도 잘 못 노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여유 시간이 생기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땐 '잉여 인간'이 된 것 같아 스스로를 책망했습니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바엔 나가서 친구를 만나거나 어딘가 새로운 곳에 가야 할 것 같았어요.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해 두려웠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할 일(=공부)'해놓고 놀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그 강박관념이 어른까지도 간 셈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학생 때 그 철칙을 지켰느냐 하면 당연히 지키지 못했죠. 독서실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나 일기를 쓴 다음 자책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요.


직장인이 된 후에 놀면 마음이 편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그건 제가 '놀이(=취미)'의 효용성을 따지느라 그랬죠. '이거 해서 얻다 쓰나?'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일본/중국 드라마를 볼 때는 '나는 지금 영어/일본어/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어.'라며 불편함을 덜곤 했습니다. 놀이는 꼭 인생에 도움이 되어야 한단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놀이의 스승


그러던 저에게 '놀이'의 스승이 찾아왔으니 그건 저의 남편입니다. 저한테 '논다'는 개념은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 부어라 마셔라 흥겹게 노는 것에 가까웠는데, 남편을 보니 집에서 혼자 참 잘도 놀더군요. 게임하다가 뉴스 보다가 웹툰 보다가 웹소설 읽다가 야구 보다가 기타 치다가 피곤(?)해지면 낮잠도 자고, 참으로 잔잔하게 잘 놉니다. 남편이 집안일을 미뤄두고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져서 "베짱이!"라고 부르곤 했지요. "그 많은 거 다 하려면(=놀려면) 아주 바쁘겠어?"라고 말했더니 하루가 아주 바쁘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 본인은 진심으로 아주 즐겁습니다.    


스승님에게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여행을 가서입니다. 저는 여행을 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다니는 스타일입니다. 평소엔 아침에 눈을 뜨기 힘든데 여행만 가면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집니다. '이 나라, 이 도시를 다시 못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장소는 대부분 다 가야 직성이 풀렸지요.


그러나 남편은 일단 휴양지로 여행 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휴양지에서도 호텔&리조트 밖으로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가끔 호텔 밖을 나가기도 하지요. 그건 저를 위해서입니다. 본인은 안 나가고 싶은데 저를 사랑해서 제가 화를 내기 때문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여행지에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평소에도 일하면서 바쁘게 사는데 여행까지 와서 바쁘게 지낼 필요가 있어? 나는 이런 망중한이 좋아. 수영하고 수영장 옆에 앉아서 음악 듣고 책 보는 거 좋잖아? 평소엔 못하는 거잖아."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주말이면 집에서 늘 빈둥대면서 여행까지 와서도 그러고 싶다고 말하는 남편한테 화가 켜켜이 쌓였던 참인데, 남편의 말에 갑자기 자아성찰을 하게 됐습니다. '나는 왜 여유가 없었을까? 왜 이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다음엔 어디 가지, 그다음엔 어디 가지? 하며 안달복달했을까?' 곁에 있는 한심한 베짱이가 갑자기 인생의 현자로 보입니다.


결국 남편의 여행 스타일을 따라가다 보니 이후 태어난 아이들까지 '안 나가' 병에 걸렸습니다. 전 여행을 갈 적마다 속이 터질 것 같지만 세 명이 행복하다면 한 명이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지요. (부들부들~) 우리 가족 여행 이야기는 기회가 된다면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써보겠습니다.


아무튼 여행에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 남편을 보니 남편이 달리 보였습니다. 남편의 집콕 놀이는 순도 100% 즐거움이었습니다. 놀이에 어떤 목적이 있지 않더군요. 죄책감도 없습니다. 놀이에서 목적 찾고 죄책감 느끼던 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남편의 자존감이 괜히 높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의 집콕 놀이


저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 공통된 화제를 나누는 것이 좋고, 한편으론 사람들이 각기 달라서 다른 대로 또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길어지는 코로나 시대에 약속이 자유롭지 못하고 아이 학교 보낸 시간에만 자유를 획득하는 엄마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 놀아야 합니다.  


예전 같으면 집에서 혼자 노는 모습이 잉여 인간 같다며 자책했을 겁니다. 사실 지금도 자책 중입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쉬면서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하게 만드는 것까진 못해도 일말의 정리는 하려고 결심했거든요. 그러나 다른 재미있는 일을 찾느라 살림엔 손을 못 대고 있네요. 휴직 들어가기 전에 저에게 "집안 정리요? 아마 집안 정리하려고 하시면 복직 때 되실 겁니다."라고 말한 후배 말이 생각나네요. 참 냉철하고 똑똑한 후배지요.


어쨌든 저의 집콕 놀이를 소개합니다.


1. 피아노


영창피아노에서 만든 전자 피아노 Kurzweil

초등학생 시절에 피아노를 배운 이후에 성인이 될 때까지 거의 치지 않았습니다. 결혼하면서 친정 집에 있던 피아노를 신혼집에 옮겨 갖고 갔지만 아주 가끔씩만 쳤습니다. 많이 치지 않았던 이유는 치면서 즐겁지가 않았거든요. 자주 안 치니 악보도 못 보겠고, 자꾸 틀리니 화가 났습니다. '이거 쳐서 내가 콩쿠르 나갈 것도 아니고 어디다 쓰나?' 했죠. 남편이 "합주 하자." 하면 '내가 밴드 할 것도 아닌데 웬 합주?'라고 속으로 삐죽거렸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갖고 있던 피아노는 다시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한 10년 넘게 잊고 있다가 작년부터 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전자피아노를 샀습니다. 피아노를 산 이후에 온 가족이 필(Feel) 받을 때마다 애용하고 있습니다만, 그중 가장 단골손님은 단연코 저입니다.

잘 치는 실력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연습할수록 실력이 늡니다. 그 당연한 원리를 이제야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너무 어려운 악보는 포기합니다. 그래도 되지요. 취미인데요, 뭐.


2. 스티커북 & 보석십자수

스티커북 완성 전&후
보석십자수 무드 등. 전구의 불을 켜기 전&후

머리가 복잡할 땐 단순 노동이 해결책입니다. 단순 노동을 하면 머릿속 생각을 비워내면서 소기의 성과를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스티커북과 보석십자수는 참 즐거운 놀이입니다. 스티커북은 정해진 번호대로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멋진 작품 한 편 완성! 보석십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인형 눈알 붙이기 부업이 있었다고 하죠? 놀면서 돈도 버는 괜찮은 부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스티커북과 보석십자수를 하면서 적성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머리 쓰는 일이여, 가라! 단순하고 명확한 작업만이 살 길!


3. 드라마 정주행


앞서 언급한 취미 효용론 때문에 저는 예전에 한국 드라마를 보면 이상한 죄책감이 들곤 했습니다. 외국 드라마는 외국어 공부라는 핑계라도 있었는데 한국 드라마는 그런 핑계를 못 대니까요. 하다못해 보고 나서 감상문이라도 남겨야 그 죄책감이 덜어졌지요. 여전히 그런 의무감은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거운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즐기려고 노력합니다. 드라마는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종합 예술입니다. 각본부터 연출과 음악, 배우들의 연기, 의상 등등 많은 요소들이 잘 어우러지고 버무려졌지요. 드라마 보는 건 돈도 안 드는 건전한 취미니 정당히 즐겨도 되겠지요?

SBS <그해 우리는>,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


4. 독서

책을 한동안 안 읽다가 오랜만에 읽으니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평을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이 문제였지요.  얼마 전에 김초엽 님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마침 브런치에 리뷰 게시판을 만들었으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대해 뭐라도 써보고 싶었는데 정체 상태입니다. 아마 못 쓸 것 같아요. 그렇게 막혀 버리니 다른 책도 읽기가 싫어집니다. 의무감은 버리고 순수하게 즐겨야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요즘 읽고 있는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5. 브런치

요즘 저의 집콕 놀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놀이이지요.

(쓰고 읽고 교류하는 기쁨의 장을 만들어준 다음 카카오 브런치에 감사합니다.)


브런치도 분명히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의무감 내지 압박감이 생겼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잘 쓰고 싶단 생각도 작용을 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잘 쓰는 것'보다 중요한 건 '계속 쓰는 것'이지요. 잘 쓰지 못할 바에 쓰지 않겠다고 해 버리면 다 소용없으니까요.


제 글럼프에 도움을 주었던 작은나무 작가님의 글로 잠시 소개합니다. "브런치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거운 글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친구와 소소하게 수다 떠는 느낌의 편안하고 때로는 비밀스러운 일상의 이야기들과 에세이들이 주를 차지"한다는 말이 큰 도움이 됐지요. 잘 쓰려는 것보다 브런치다운 느낌으로 계속 써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브런치 구독자 늘리는 방법 (작은나무님의 허락 없이 훅 들어가는 인용이네요.)


또한 '글 써서 얻다 쓰나?'라는 생각도 접어 두려고 합니다. 언젠가 제 글이 다른 모습으로 가치를 발휘하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지금 이렇게 쓰는 것 자체가 즐거우니까요. 지금은 즐거움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어른에게도 '놀이'는 중요하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오랫동안 견지해 오던 놀이 효용론을 버리기가 이렇게나 힘이 듭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저의 집콕 놀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삶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놀이 스승(=남편)을 보더라도 소소하게 잘 놀아서 그런지 일도 잘합니다.


이제 아이 하교까지 20분 남아서 마음이 급합니다. 서둘러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오은영 박사님의 명언을 남기며 마무리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비생산적인 시간이 아니고 휴식과 회복의 시간이거든요. 그래야 그다음에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요."  - 금쪽상담소 5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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