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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Mar 31. 2022

아이가 사죄의 편지를 주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작은 아이와 나는 누워서 빈둥거렸고 큰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갑자기 큰 아이가 문 틈으로 종이배를 던져 주었다.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배 편지였다.

갑자기 웬 편지지?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펼쳤다.

... 편지를 펼치지 말았어야 했다.

엄마께

엄마, 건이에요.
제가 그냥 핸드폰을 뚜껑이랑 피아노 사이에 넣어 봤는데,
그 안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정말 죄송해요. 엄마가 몇십만원을 주고 산 핸드폰을...
어떤 벌이든 받을게요. 등짝 스메싱 100번 맞기, 벌 2시간 서있기. 뭐든 괜찮아요. 이것도 괜찮아요.
제 지갑에 있는 돈 다 엄마께 드릴게요. 엄만 어떤 벌을 선택하시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 편지의 첫 번째 포인트는 "그냥"이다.


내 동생이 어렸을 때 그렇게 "그냥" 이상한 일을 많이 해서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 사실 나는 동생을 보면서 '와, 나는 그런 재밌는 생각을 못했는데 쟤는 어쩜 저렇게 신기한 생각을 잘하지? 정말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는 늘 혼구녕이었다. 나는 호기심 많고 창의적인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동생도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잘 살고 있다. ㅋㅋ)


아무튼 우리 애는 대체 왜 그딴 짓을 했냐? "그냥" 궁금하니까!

핸드폰이 과연 그 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했겠지. 설마 그 틈으로 들어갈까 싶었겠지. 근데 쏘옥 안으로 들어갔겠지. (후우...)


두 번째 포인트는 "몇십만 원을 주고 산 핸드폰"이다.

키즈폰이라 사실 2년 약정 외에 별도의 기기값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첫 키즈폰은 바닷물에 빠뜨려 저 세상으로 가셨고, 두 번째로 마련한 현 키즈폰은 아이가 사자마자 패턴을 열라 바꾸더니 개통한 지 하루 만에 패턴을 까먹어서 A/S 센터에 찾아가 초기화를 해야 했다. 정말 빡침의 역사를 자랑하는 키즈폰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포인트는 벌 관련인데...

아니, 이 녀석은 벌도 받아본 적이 없으면서 편지에 저렇게 쓰면 엄마가 뭐가 되냐? 응?

이 부분은 아무래도 흔한 남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마지막 포인트는 깨알 그림이다.

사고를 치고 초조한 가운데 디테일하게 그림을 그린 것에 박수를 보낸다.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사죄의 편지를 읽고서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서 피아노로 갔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손을 든다. (실로 헐리우드 액션이다.)

됐다고, 그만하라고 해도 일단은 계속한다. (안 혼나기 위한 효과적 전략이다.)

건반 하나가 눌려 있다. (좌) / 저 좁은 틈 사이로 핸드폰이 들어갔다. (우)

뚜껑과 본체 사이에 틈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곳에 틈이 있었구나.

어느새 손을 내리고 내 곁으로 온 아이는 더 잘 보이게 해 준다면서 전화를 건다. 흥겨운 벨 소리가 피아노 안에서 울린다. 참으로 웃픈 장면이다.

피아노 건반 하나가 눌려 있다. 그곳에 아이의 핸드폰이 자리 잡았나 보다.


영창피아노 (Kurzweil)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아이가 피아노 뚜껑 위 틈에다 핸드폰을 넣었는데요."

"네?"

"뚜껑이랑 피아노 사이에 틈이 있는데 거기 핸드폰을 넣어서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런 사례는 처음인지 접수 직원이 의아해한다. 기사가 다음 주에 연락하고 방문하겠단다.


"핸드폰도 정지시켜야 하지 않아요? 1주일 동안 못 쓰는데."

엄마가 분노의 노선으로 가지 않음을 확인한 아이는 안심한 눈치다.


그리고 내게 마지막 미션을 안겨 준다.

"엄마! 변기 막혔어요. 뚫어 주세요!"

참으로 고된 하루다.




+ 남편이 퇴근하고 피아노 나사를 풀어 뚜껑을 열고 핸드폰을 꺼냈다.

남편이 더 큰 사고를 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다.

내일 고객센터에 다시 취소 전화해야겠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얼굴을 안 보여도 돼서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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