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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Apr 24. 2022

강낭콩 삼형제

"엄마, 엄마가 안 좋아할 소식이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큰 아이 건이가 학교 끝나고 전화했다.

"뭔데?"

"오늘 학교에서 강낭콩을 심었거든요. 근데 이거 집에 가져가야 한대요."

"그게 왜 나쁜 소식이야?"

"엄마 화분 늘어나는 거 안 좋아하잖아요."

"아, 아니야. 괜찮아. 학교에서 심은 건 가져와야지."


우리 집엔 다육이와 채송화  화분 4개가 있다. 더 늘어나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화분 개수를 더 늘리지 말자고 했더니 아이가 걱정을 했나 보다.


아이는 강낭콩을 커피 원두 담는 비닐팩처럼 생긴 비닐 화분(?)에 심어 왔다. 그게 화분이란다. 물도 안 빠질 거 같고 제대로 서지도 못해서 아직 싹이 나지 않은 강낭콩 세 개를 꺼내 화분에 심었다. 싹이 난 다음 옮겨 신는 것보다 아예 처음부터 화분에 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옮겨 심는 건 남편 담당)


아이는 콩 세 개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강강이, 낭낭이, 콩콩이.

아이는 작명의 달인이다. 심사숙고하지 않고도 번뜩이는 이름을 잘도 지어낸다.

"누가 누군지 못 알아보면 어떡해요? 우리 강강이, 낭낭이, 콩콩이."

남편은 화분에 '강, 낭, 콩'이라고 이름을 써주었다.


강낭콩을 심은 다음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 고민이 있어요."

"응? 어떤 고민?"

"강강이, 낭낭이, 콩콩이가 위로 안 나고 옆으로 나면 어떡해요? 어디가 위인지 모르고 옆으로 자랄 수도 있잖아요."

10여 년 전에 뽑은 내 아래쪽 사랑니가 생각났다. 사랑니는 위로 솟아나지 않고 잇몸 속에서 옆으로 자라나 옆니들을 밀어냈다. 결국 잇몸을 찢고 발치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랑니처럼 콩의 새싹이 옆으로 날까 봐 걱정이란 말이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식물은 중력이랑 빛을 감지하는 센서가 있어서 위로 자라나게 되어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남편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에 배웠던 것 같다. 어쨌든 난 대답하지 못할 뻔했는데 마침 남편이 있어 다행이다.

(오래전에 배운 굴지성, 주광성 등등이 그것이다. 용어는 생각이 안 나서 찾아봤다.)


시계 방향으로 강강이, 낭낭이, 콩콩이 (심은 지 6일 만에 싹이 났다.)


며칠 동안 감감무소식이던 강낭콩 삼형제 중 가장 먼저 소식을 알린 것은 콩콩이다. 콩콩이의 연둣빛 새싹이 눈에 확 띄어서 아이에게 알렸더니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엄마, 자세히 보면 낭낭이도 나오고 있어요!"

낭낭이 새싹은 한창 흙을 뚫고 있는 중이다. 강강이는 아직 잠잠하다.

알고 보니 콩콩이가 첫째, 낭낭이가 둘째, 강강이가 막내였구나.




여태까지 우리 집을 거쳐 간 식물 중 씨앗부터 열매까지 맺은 것은 방울토마토와 당근이다.

방울토마토는 남편이 방울토마토를 먹다가 씨를 던져 넣듯이 화분에 심은 이후 무럭무럭 자라서 남편의 키까지 넘어섰다. (알고 보니 일조량이 부족하여 웃자란 거라고.) 식물 집사 남편은 퇴근하면 나와 아이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우리 토돌이들 잘 있었나?"라며 방울토마토부터 찾곤 했다.


사람 키보다 큰 방울토마토는 골칫거리였다. 청소하다가 화분을 엎은 대참사가 몇 번 일어났다. 그때부터 내가 식물을 키우지 말자고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방울토마토는 열매를 맺었다. 아이들은 방울토마토가 불쌍하다며 먹지 말자고 했지만 안 먹는다고 평생 남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는 몇 개 안 되는 방울토마토를 수확하여 잘 먹었다.   

웃자란 방울토마토 나무와 꽤나 달콤했던 방울토마토


당근은 작은 아이가 다이소에서 산 당근 씨앗을 심으면서 키우게 됐다. 당근 씨를 많이 심었더니 싹이 아주 많이 나서 튼튼하게 자란 줄기 한두 개씩을 화분 하나에 옮겨 심고 나머지는 솎아 주었다. 당근 줄기가 실해 보여서 무청처럼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나 찾아봤더니 당근 줄기는 쓰고 억세서 잘 먹지는 않는다고.


흙 속에 파묻힌 당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은 들뜨기 시작했는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바로 뿌리 파리였다. 당근의 단맛을 맛보겠다고 찾아온 뿌리 파리 때문에 옆에 있던 채송화와 다육이도 함께 봉변을 당했다. 결국 당근이 더 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당근을 뽑아내기로 했다. 기대하고 뽑은 당근의 크기는? 애걔, 겨우 요만해? 가장 큰 당근이 장난감 당근보다도 작다.

당근 수확물. 수확물 중 가장 큰 당근은 장난감 당근보다 작고 실제 당근보다 훨씬 작다.




생명체를 돌보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지만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은 신기하고 기특하다. 집에서 씨앗을 심고 가까이에서 관찰하니 많은 것을 배운다. 씨앗에서 싹을 틔울 때까지 초조함을 느끼고, 기다리다 보면 싹이 난다는 기쁨을 맛본다.


어제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오늘 낭낭이, 콩콩이를 보니 어제보다 훨씬 컸다.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별 움직임이 없이 잠잠해 보이는 식물에도 힘이 있다. 부디 강낭콩 삼형제가 햇빛과 물과 건이(와 건이 아빠)의 사랑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길 바란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강강이도 무사히 깨어나길.)

흙을 뚫고 나오는 낭낭이와 콩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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