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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Aug 19. 2022

그곳에 가고 싶다

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고

<생활의 달인>이란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각 분야에서 쌓은 시간과 노력으로 그 분야에서 달인이 된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게차를 기가 막히게 운전하는 달인, 대형 화물에 비닐을 한 번에 촥 펴서 빳빳하게 포장하는 달인, 떡을 똑같은 크기와 무게로 빚어내는 달인 등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달인들은 달인이 되겠다고 처음부터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다. 그냥 어쩌다 꾸준히 하다 보니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10여 년 전에 선배 언니에게 <생활의 달인>에 나온 사람들 대단하지 않냐고 열띤 목소리로 말했더니 선배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나는 참 쓸데없는 데 열정 올리는 사람들이 많구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긴 속세의 기준으로 보면 별게 아닌 재주일 수도 있지. 그러면서도 참 씁쓸했다. 저렇게 그들의 땀과 노력을 폄하할 건 아닌데. 달인들의 성과는 비록 세상의 객관화된 가치 - 예를 들자면 자격증이나 수당 등 - 로 평가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달인들의 그 모습 그대로 충분히 대단하고 멋있다.




여기 속세의 기준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가 있다. 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의 휴남동 서점이다. 직장에서 번아웃에 시달리다가 이혼하고 서점을 연 영주, 명문대에서 성실히 학점과 스펙을 관리해 왔지만 번번이 취직에 실패한 후 소소한 일을 하려고 서점 바리스타 아르바이트로 온 민준, 계약직에 전전하다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자 일을 관두고 서점에서 뜨개질을 하는 정서, 꿈도 삶의 의욕도 없이 뜨개질이나 구경하고 앉아 있는 고등학생 민철까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모두 실패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천천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속도로 발돋움한다. 누구도 왜 치열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느냐고 다그치지 않는다. 성취 지향적으로 살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서로를 응원할 뿐이다.   


자신만의 페이스로 천천히 성장하는 '휴남동 서점'의 등장인물들도 어느 날 각 분야의 달인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달인이 아니면 또 어떠한가? 세상이 인정해 주든 인정해 주지 않든 그 성장은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코로나 자가 격리 기간 중에 읽었다. 원래는 여행 가서 읽을 계획으로 큰맘 먹고 산 책이다. (휴직 중에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통장 잔액을 보고 위기감이 느껴져 책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후에 사고 있다.) 단숨에 읽기보다 천천히 조금씩 '휴남동 서점'을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요즘은 작가와의 북토크도 하고 이벤트도 하는 소규모의 서점들이 많이 있다는데 나는 실제로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휴남동 서점'을 다른 서점에 대입하지 않고 나만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나는 '휴남동 서점'의 북 이벤트 현장에 와 있었다. 그 꿈 덕분에 기분 좋은 낮잠이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휴식한 느낌이었다.


어딘가에 꼭 있을 것만 같은 '휴남동 서점'에 가고 싶다. 멍하니 앉아서 휴식하고 싶다. 책에 붙인 영주 사장님의 메모를 찬찬히 읽어보고 정서의 뜨개질 구경도 하고 민준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 게다가 영국 밴드 Keane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서점이라니! 음악 취향마저 나와 딱 맞으니 그 공간이 얼마나 환상적일까.


영주는 늘 하던 대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창문부터 차례대로 닫았다. 이어서 에어컨을 켜고 음원 사이트에서 늘 듣던 음악을 틀었다. 영국 그룹 킨Keane의 앨범 <호프스 앤드 피어스Hopes And Fears>. 2004년에 나온 이 앨범을 영주는 작년에서야 처음 들었고, 듣자마자 빠져 거의 매일 듣고 있다. 가수의 나른하면서도 몽환적인 목소리가 서점을 가득 채운다. 오늘 하루가 시작됐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p.12


킨(Keane), <호프스 앤드 피어스(Hopes And Fears)> 중 Everybody's Chan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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