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영주는 어느 날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손님에게 엉뚱한 책을 추천한 적도 있었다.
"전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혹시 이 책 읽으셨나요?"
"아니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전 다섯 번도 넘게 읽은 것 같아요. 사실 그렇게 재미있는 책은 아니에요. 아...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미예요. 그런 거 있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킥킥 웃게 되거나,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현기증이 나는 그런 재미요. 이 책엔 그런 재미는 없는데요. 하지만 뭐랄까, 일반적인 의미의 재미를 뛰어넘는 재미가... 있거든요. 이 책에는... 뚜렷한 사건, 사고가 없어요. 그냥 한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는데, 그것도 며칠뿐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이... 재미있더라고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손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와 영주는 괜히 바짝 긴장했다.
"아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해서요. 학교, 선생님, 친구, 부모님에 관한 생각..."
"그런데, 그 책이 저한테도 재미있을까요?"
손님이 표정을 풀지 않고 묻는 말에, 영주는 말문이 콱 막혔다.
그러게, 이 손님에게도 이 책이 재미있을까? 나는 왜 무턱대고 이 책을 추천한 거지?
- 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p. 34~35
테이블 위에는 영주가 지난주에 준 <호밀밭의 파수꾼>이 놓여 있었다. 영주가 다가가자 자세를 바로잡는 민철의 분위기로 보아 영주의 추천은 이번에도 실패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젠 정말 사회 부적응자 고딩의 독백이 가득한 저 책은 추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책 안 읽었지? 내용이 별로였어?"
영주가 민철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 그건 아니에요. 이 책 좋다는 건 저도 알아요."
민철이 다소곳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려웠어?"
영주는 괜스레 책을 만지작거렸다.
"서점 이모, 이 책에서 첫 대사가 언제 나오는지 아세요?"
지난주에 민철은 영주를 서점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언제 나오는데?"
영주는 멈칫하며 책을 펼쳤다.
"소설 시작하고 7페이지째에 나와요."
민철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 비가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덤덤했지만, 영주는 그 목소리에서 원망의 기색을 읽은 것만 같았다.
- 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p. 95~96
우리는 외출 준비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덧신을 신으면서 애클리에게 소리를 질러 영화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샤워 커튼을 통해 제대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이든 바로 대답하기를 싫어하는 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커튼을 헤치고 들어와 샤워룸의 문지방에 서서 나 말고 또 누가 가느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누구누구가 가는가를 알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녀석은 어디서 배가 난파당해 구조를 받게 되더라도 구명정에 타기 전에 노를 젓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반드시 묻고 나서야 탈 것이다.
-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9
마침내 샐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맞이하러 내려갔다. 그녀는 모양을 잔뜩 내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검은 코트에 검은 베레모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모자 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의 베레모는 보기 좋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결혼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미친놈이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에게 반한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다니, 난 좀 미친놈이다. 그 점은 시인한다.
-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