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Aug 26. 2022

프로 불편러의 시선을 따라서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에는 많은 책과 영화가 언급된다. 그중 <호밀밭의 파수꾼>은 두 번이나 언급된다. 주인공 영주 사장이 두 번 추천하지만 추천해준 사람에게 두 번 다 까이는(?) 책이다.


영주는 어느 날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손님에게 엉뚱한 책을 추천한 적도 있었다.
  "전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혹시 이 책 읽으셨나요?"
  "아니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전 다섯 번도 넘게 읽은 것 같아요. 사실 그렇게 재미있는 책은 아니에요. 아...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미예요. 그런 거 있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킥킥 웃게 되거나,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현기증이 나는 그런 재미요. 이 책엔 그런 재미는 없는데요. 하지만 뭐랄까, 일반적인 의미의 재미를 뛰어넘는 재미가... 있거든요. 이 책에는... 뚜렷한 사건, 사고가 없어요. 그냥 한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는데, 그것도 며칠뿐이에요. 그런데 저는 이 책이... 재미있더라고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요?"
  손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와 영주는 괜히 바짝 긴장했다.
  "아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해서요. 학교, 선생님, 친구, 부모님에 관한 생각..."
  "그런데, 그 책이 저한테도 재미있을까요?"
  손님이 표정을 풀지 않고 묻는 말에, 영주는 말문이 콱 막혔다.
그러게, 이 손님에게도 이 책이 재미있을까? 나는 왜 무턱대고 이 책을 추천한 거지?

- 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p. 34~35


테이블 위에는 영주가 지난주에 준 <호밀밭의 파수꾼>이 놓여 있었다. 영주가 다가가자 자세를 바로잡는 민철의 분위기로 보아 영주의 추천은 이번에도 실패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젠 정말 사회 부적응자 고딩의 독백이 가득한 저 책은 추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책 안 읽었지? 내용이 별로였어?"
  영주가 민철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 그건 아니에요. 이 책 좋다는 건 저도 알아요."
  민철이 다소곳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려웠어?"
  영주는 괜스레 책을 만지작거렸다.
  "서점 이모, 이 책에서 첫 대사가 언제 나오는지 아세요?"
  지난주에 민철은 영주를 서점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언제 나오는데?"
  영주는 멈칫하며 책을 펼쳤다.
  "소설 시작하고 7페이지째에 나와요."
  민철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 비가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덤덤했지만, 영주는 그 목소리에서 원망의 기색을 읽은 것만 같았다.

- 황보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p. 95~96



그래서 읽어보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얼마나 재미없는지) 궁금해서.


나 같은 경우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큰 결심이 필요하다. '명작'이라 칭해지는 작품들은 보통 가독성이 떨어지고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질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입 장벽이 높달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페이지만 서너 번 읽은 것 같다. 결국 읽어내는 날이 올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호밀밭의 파수꾼>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있다? 첫 대화는 비록 7페이지째에 나온다고 해도 '나'의 서술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어투라 술술 읽힌다. 은근히 이야기꾼이라 별일 아닌 사건도 궁금하게 만든다. 게다가 '프로 불편러'인 '나'의 시니컬한 말투가 은근히 매력 있다. 아닌 건 곧 죽어도 아니라고 얘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인공의 면모에 공감 가는 구석도 있었다.


이 책은 '나'인 홀든 콜필드가 퇴학당한 후 부모에게 퇴학 통지서가 가기까지 3일간 - 아직은 부모가 주인공이 퇴학당한 사실을 모르는 기간 동안, 게다가 이 퇴학은 벌써 네 번째 - 의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공은 세상을 예민하게 보는 눈과 명철함을 가졌기 때문에 학교든 부모든 교사든 친구들이든, 그들의 단점을 부각하여 본다. 그의 눈에 세상은 위선과 거만과 더러움과 토 나오는 일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런 불만을 표현한 부분이 은근히 웃기다. 폭소할 만큼은 아니지만 잔잔하게 사람을 웃긴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우리는 외출 준비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덧신을 신으면서 애클리에게 소리를 질러 영화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샤워 커튼을 통해 제대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이든 바로 대답하기를 싫어하는 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커튼을 헤치고 들어와 샤워룸의 문지방에 서서 나 말고 또 누가 가느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누구누구가 가는가를 알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녀석은 어디서 배가 난파당해 구조를 받게 되더라도 구명정에 타기 전에 노를 젓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반드시 묻고 나서야 탈 것이다.
   
-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59


주인공은 담배와 술로써 나이가 많은 어른인 척 행동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단 하나도 꼽지 못하고, 수중에 돈이 많다고 생각하여 돈을 펑펑 쓰다가 3일 째엔 돈에 쪼들리며, 퇴학 때문에 아버지한테 죽임 당할까 봐 (=호되게 혼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청소년일 뿐이다.


또한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 친구인 제인 갤러허에게는 전화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맘에 썩 들지는 않지만 불러내기 좋은 여자 친구 샐리를 불러 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데이트를 한다.


  마침내 샐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맞이하러 내려갔다. 그녀는 모양을 잔뜩 내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검은 코트에 검은 베레모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모자 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의 베레모는 보기 좋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결혼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미친놈이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에게 반한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다니, 난 좀 미친놈이다. 그 점은 시인한다.

-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p. 187


나는 시각적 묘사가 과한 소설을 잘 못 읽는다. 아마도 내가 세세한 묘사를 읽고 이미지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해서인 것 같다. 그런데 <호밀밭의 파수꾼>은 시각적 묘사와 심리적 묘사가 적당하여 장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주인공이 자살 등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까 굉장히 조마조마했는데 그렇게 끝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주인공은 동생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행복을 느낀다. 나름 평화로운 마무리였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자전적 얘기를 담고 있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 책이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것에는 다소 의아함이 든다. 내가 청소년일 때 이 책을 만났다면 삐딱해도 너무 삐딱한 주인공의 시선에 내 생활이 흔들렸을 듯하다. 어른이 되어 읽어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작가는 책 서두에 "어머님께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남겼는데 과연 어머님이 이 책을 처음에 보시고 기뻐했을지 의문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곳에 가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