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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Sep 13. 2022

불량 주부의 살림 일지

* 오늘은 '해요' 체로 써볼까 해요.


얼마 전 냉동실에 보관하였던 대파의 끝을 보고야 말았어요. 아래 글을 써놓고 아직 발행을 하기도 전에 마지막 대파를 남편이 요리하며 쓰고 만 것이에요. 남편이 만들어준 잡채 덮밥 맛있었어요. 파 기름까지 내서 제대로 만들었더라고요. (사진 없음)


작별 인사 없이 대파를 보내드리는 바람에 그토록 미루던 대파 구매를 하고야 말았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흙대파는 품절이었기 때문에 초벌 손질된 대파를 주문했어요. 그리고 어젯밤 11시경 대파가, 아니 이마트몰 배송이 도착한다는 카톡이 왔지요. 뭐 좋은 거라고 잠도 못 자고 기다리나 싶었지만, 거기엔 우리 아이가 먹을 소중한 냉동 블루베리와 우유가 있으니 기다리기로 해요.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대파가, 아니 장본 물건이 도착했다고 하네요. 배송 기사님, 늦은 밤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1차 손질이 된 대파는 뽀얗고 이쁘네요. 그래도 반갑지는 않아요.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 파를 다듬기에 제격인 시간이지만 나의 소중한 밤 시간을 대파에 쏟지 않기로 해요.


일단 장본 물건과 대파를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냉장고가 터질 것 같아요. 명절을 지내고 나면 양가 어머님들께 반찬과 과일을 얻어 와요.

"됐어요, 안 먹어요." 하면 "너네는 도대체 뭘 먹고사는 거냐? 잘 좀 먹으며 살아라." 하는 잔소리가 돌아오기 때문에 커트할 건 커트하고 받을 건 받아요. 처음에 싸주시려던 것의 반의 반 정도가 되겠어요. 그런 것들을 냉장고에 욱여넣은 상태기 때문에 제가 장본 물건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네요. 일단 최대한 다 쑤셔 넣어요. 먹을 건 늘 없는 것 같은데 냉장고는 왜 꽉 찼을까요? 냉장고 정리가 시급하네요.


날이 밝았어요. 마음속에 대파 생각이 가득해요.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기도 모자란 인생인데, 싫어하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게 아이러니예요. 어쨌든 대파를 손질하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 바로 냉장고 정리예요. 사실 대파를 손질하고 냉동실에 넣을 자리도 없으니 냉동실 정리가 더 급한 듯하지만 일단 냉장고부터 정리해요.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통들을 열기가 두려워요. 역시나 뚜껑을 여니 푸른색, 하얀색 곰팡이가 인사해요. 반갑지 않은 친구들이에요. 그래도 저희 아이들은 반가워할지도 몰라요.

"얘들아, 너희 파란 곰팡이 구경할래?"

"오! 파란 곰팡이네요? 파란색에 흰색이 섞여 있네요?"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요. 아이들과 함께라면 별게 다 즐겁네요.


음식 쓰레기가 한가득, 설거지거리가 한가득이에요. 폭풍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까지 다 닦고 나니 뿌듯해요. 아차! 서랍으로 이루어진 신선칸, 야채칸, 과일칸은 정리를 안 했네요. 그건 서랍이니 그냥 닫아두기로 해요. 놔두면 언젠가 하게 되겠죠. 냉동실 정리는 안 하냐고요? 그것도 다음에요. 냉장고와 냉동실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잖아요. 사실 이런 식으로 냉동실은 늘 외면을 받고 있어요. 어미새가 입 크게 벌리는 아기새한테만 먹이를 주잖아요. 배고픈 새는 입을 더 크게 벌려야 먹이를 먹을 수 있다더라고요. 그러니까, 냉동실도 언젠가 급해지면 하긴 할 거란 소리예요.


자, 다음은 대망의 대파 썰기입니다. 본격적으로 대파 썰기 전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야! 오전에 여기 화장실 쓴 사람 누구야? 변기 막혔으면 말 좀 해주지."

아이들한테 물어봤더니 둘 다 아니라네요. 둘 다 한사코 화장실을 안 썼다네요. 막혔으면 막혔다고 말 좀 해주지.

일단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변기를 뚫어요. '뚫어뻥'은 유용한 발명품이에요. 이게 될까 싶은데 항상 잘 되네요. 그 김에 화장실 청소를 해요. 청소하고 나니 뿌듯해요.


아 맞다. 잊고 있던 대파 타임이네요. 창문을 열고 대파를 썰기 시작해요. 썰다 보니 제법 재미있다는 착각에 빠졌어요. 그러나 착각 맞아요. 눈물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대파 두 줄기를 썰어 한 봉지에 넣고 손을 씻고 눈물을 닦은 후 또 대파 두 줄기를 썰어요. 그렇게 대파 미션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어요. 앞의 두 미션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나 봐요. 대파를 썰어서 냉동실에 구겨 넣어놨더니 홀가분해요.

제법 잘 썬 듯?


냉동실엔 뭐가 이렇게 가득할까요? 냉장고도, 냉동실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기가 힘들어요. RFID 도입이 시급해요. 통에 칩을 부착하여 물건 위치 검색이 가능하고, 유효기간 임박품은 경고음이 울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누군가 꼭 개발해줬으면 해요.


사실 제 소원은 그게 아니에요. 예전부터 제 소원은 모두가 음식 대신 알약을 먹고사는 거예요. 음식 하는 시간도 절약하고 뭐 먹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고 설거지로 싸울 일도 없고 음식 쓰레기 걱정도 없잖아요?

알약 얘길 했더니 남편이 말하네요.

"그럼 회사에서 점심시간 없이 내리 일해야 한다?"

"내리 일하다 빨리 퇴근하면 좋잖아."

"그게 되겠니?"

"아, 안 되겠구나."

 

집안일은 왜 이리 귀찮은 걸까요? 야무지게 살림하시는 분들을 보면 감탄하게 돼요. (부럽진 않음)

저도 귀찮다면서 할 건 다 해요. 보세요. 오늘 제가 대파 손질에 화장실 청소까지 했잖아요. 소고기 뭇국도 끓였네요. 집안일로 글도 한 편 써내다니 오늘은 참 뿌듯한 하루예요. 이상, 불량 주부의 살림 일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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