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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Oct 24. 2022

나는 애틋할 준비가 되었는데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 스포를 담고 있으며 지극히 개인적 느낌입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일본의 남녀 작가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은 헤어진 연인의 이야기를 각각의 시각으로 쓴 소설이다. 즉, 남자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남자 주인공 준세이의 시각으로 서술하고,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주인공 아오이의 시각으로 서술하였다. 작가의 협업으로 탄생한 로맨스 소설에 출간 당시에 많은 화제가 되었다.

 

나에게는 이 표지(파란 책, 주황 책)가 익숙한데 현재는 이 디자인은 절판되었고 표지가 바뀌었다.


20년 전에 츠지 히토나리, 에쿠니 가오리의 책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재미있게 읽었다. '재미있게'라는 말로는 부족한 게, 읽고 나서 한동안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었다. 특정 인물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그 이상의 여운이 남았다. 서툴렀던 청춘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연인이 옆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애틋함과 저릿저릿함은 무엇인지, 강렬한 그리움의 힘이란 무엇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기대했다. 영화를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영화 후유증에 시달리면 어쩌나 미리부터 걱정했다.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冷情と情熱のあいだ(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자막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도, 이어서 이탈리아 풍경과 함께 나오는 엔야(Enya)의 음악도 기대감을 올리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초반에 "나에게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ぼくには忘られない人がいた.)"라는 준세이(타케노우치 유타카 분)의 대사를 듣는 순간 울컥했다.

나는 애틋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자 주인공 아오이(진혜림(陳慧琳, Kelly Chen) 분)가 나오기까지는 그랬다. 아오이의 첫 등장 장면부터 책에서의 아오이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흠칫 놀랐다. 일단 캐스팅이야 그냥 넘기고 극에 최대한 집중해 보려 했으나, 진혜림의 연기 때문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표정이 왜 이리 한결같은지, 그것도 무표정 죽상으로. 적어도 젊은 시절 준세이랑 사랑했을 때만이라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순 없었나? 왜 젊은 날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마저 시력을 잃은 듯한 표정 혹은 시한부 인생을 판정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느냔 말이다.


영화의 흐름도 뭔가 매끄럽지 않았다. 이야기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하이라이트인 10년 후 피렌체 두오모에서의 재회 장면도 뭔가 밍숭맹숭했다. 두오모에서 둘이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긴장감도 없었고 만난 후에도 아오이의 감정선이나 행동은 다소 의아했다. (책에서도 이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허망했다. 멋진 원작에 아름다운 풍경에 훌륭한 음악을 깔고도 영화의 결과물이 이거라고? 나는 가슴 아릴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아직 감동이든 가슴 뭉클함이든 애틋함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게 끝이라고?


약 20년 전 극장에서 나오며 나는 나의 느낌을 설명할 수 없어서 그저 "2% 부족한 영화네.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아쉽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20년 후인 지금, 그때의 허탈한 느낌을 잊어버리고 <냉정과 열정 사이>를 또 보았다. 여전히 "나에게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대사에 가슴 뛰었고, 다케노우치 유타카는 다시 봐도 멋지다고 생각했고, 그 후엔 실망했고 마지막엔 허탈했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보니 예전에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왜 영화 감상평을 남길 수 없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속에 '이 이야기로 만든 영화라면 무조건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별로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호했던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20년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영화평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 생각이 간절해졌다.

올 가을이 가기 전에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의 원작 소설을 읽어야겠다.




+ 일본어 제목이 '냉정과 정열 사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 영화 보는 내내 타케노우치 유타카 깔끔하게 이발해 주고 싶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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