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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Dec 21. 2022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

옆 팀 부장님은 쌈닭이었다. 옆 팀이고 나와 업무로 얽히지 않은 부장님이라 직접 부딪히는 일은 없었지만, 부장님의 따지는 소리가 자주 들렸으므로 그분을 경계했다. 우리 팀 팀장님이 부서 이동을 하면서 옆 팀 부장님이 팀장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그래서 팀원들은 긴장했다. 우린 이제 죽었다!


그런데 막상 부장님을 곁에서 보니 일 잘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맺고 끊음이 확실하여 업무 정리를 잘해 주셨다. 대부분의 보직자들이 '좋은 게 좋은 거지' 또는 '내 손에 피 묻히기 싫어'라는 심정으로 상사나 타 부서에 싫은 소리는 못하고 자기 부하 직원만 잡는다. 그러나 부장님은 윗사람한테도, 다른 부서에도 싫은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까 싸움꾼으로 소문이 난 거다.


부장님은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계열사로 파견을 갔다. 나중에 우리 회사로 돌아오긴 했지만, 원하던 부서가 아닌 곳으로 발령받았다. 나중에 만난 부장님이 나에게 그랬다.

"주현 씨, 성질 좀 죽여.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말고. 그거 윗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해."

"아니, 부장님도 그러시면서!"

"내가 그렇게 살아봤으니까 하는 말이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후계동 '정희네'라는 곳이 나온다. '정희네'는 박동훈(이선균 분)의 친구 정희(오나라 분)가 운영하는 술집이다. 삼형제 박상훈(박호산 분), 박동훈(이선균 분), 박기훈(송새벽 분)과 상훈의 친구들은 후계동 출신이자 현 주민들이다. 이들은 '정희네'에 매일같이 드나든다.  


정희는 20년 가까이 한 남자를 잊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윤상원이고 스님이 되어 '겸덕'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20대에 사귀던 그가 갑자기 절로 들어가면서 정희는 이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정희네에서 윤상원이란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동훈 역시 동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상원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넷이 동창


부장이었던 동훈이 상무로 진급한 날 정희네에서 축하 파티가 열린다. 상훈의 아내이자 동훈의 동창인 애련도 정희네에 오랜만에 왔다. 술을 마시며 애련은 말한다.

"우리 학교 때 인기 투표하면 동훈이하고 상원이가 1, 2위였어. 상원이가 단연코 1등. 상원이는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운동 잘하지. 졸졸 쫓아다니는 계집애들 줄 섰지."


상원이라는 말에 주변이 조용해지고 옆에서 상훈은 애련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준다. 애련은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

"그만 찔러라, 인간아. 왜 그러니? 내가 지금 분위기 만들고 있잖니. 윤상원은 금기어가 아니다.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 아니, 어떻게 27년을 한동네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 이름을 금기어로 만들어 놔? 서방님 상원이랑 단짝이었어. 가뜩이나 쓸쓸한 인간이 27년 단짝 잃어버리고. 상원이 얘기 한 마디도 못하면 서방님아, 넌 친구 한 명도 없는 사람인 거잖아."


처음 이 장면을 볼 때 애련이 주변을 왜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드는가 싶었다. 눈치가 없나? 분위기 파악을 못하나? 취한 건가? 그러나 애련은 오랜 기간 동안 누구도 상원을 부르지 못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애련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알기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정희는 그동안 자신 때문에 윤상원 이름을 말하지 못했냐면서 오늘부로 윤상원을 금기어에서 해금한다고 선언한다.



문득 내가 애련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옳고 그름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내 이미지 안 해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사람으로 살면 되지. 그런데도 왜 굳이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지. 사회생활을 짧지 않은 기간 했으면서도 교훈이 없나.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그래도 누군가 말해야 바뀐다. 애련이 주책맞게라도 말을 꺼냈으니 윤상원이 해금되었지, 애련이 말하지 않았다면 윤상원은 아마 평생 금기어였을 거다.


나는, 또 한 번의 내지름으로 불편한 기분이 들지만, 내가 틀린 말을 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외쳐 본다.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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